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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어떤 무한 변주 중인 후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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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가 앉아있었던 그 광장의 이름을 기억할 수 없다. 아니, 우리는 처음부터 그 광장의 이름을 알았던 적이 없다. 그러나 그날, 우리가 파리에서 열차를 타고 아비뇽에 도착해서 차를 빌리고 처음 야외 식탁에 앉아 파란 하늘 아래 노란 햇빛 속에서 양고기 꾸스꾸스를 먹었던 날, 우리는 우리가 떠나온 곳에서 여객선이 침몰하고, 수학여행을 떠났던 소년 소녀들이 물속으로 영원히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비뇽에서, 파란 하늘 아래 노란 햇빛 속에서, 끊어진 아비뇽 다리 위에서, 끊어진 아비뇽 다리의 절단면 앞에서 하염없이 강물을, 하늘보다 더 파란 강물을 바라보고 있던 비둘기며, 떠내려가다가 다리 기둥에 걸려 반쯤 잠겨 있던 커다란 나뭇가지, 하늘보다 더 파란 강물 위에 검푸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던, 자기 둥치를 잃어버린 커다란 나뭇가지.

우리는 이제 각자 개별자로만 살기를 그만두었다는 데서 오는 설렘과 약간의 불안과 불만을 가지고, 그 끊어진 다리를 거닐며 서로의 얼굴에 스치듯 지나가는 그림자를 발견할 때마다, 그것을 발견한 데서 오는 스스로의 불안을 감추려 때로는 노력하고, 때로는 그것을 들키지 않을까봐 얼굴 위로 슬쩍 비쳐보이고는 했지만,

그 모든 개인적이고 사적이며 둘만의 관계인 작은 감정의 움직임들은, 방치된 채 가라앉아 가던 여객선에 비해 얼마나 하찮은 것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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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것이었나? 가령, 나는 이 글을 다음과 같이 시작할 수 있다;

내가 결혼하자 여객선이 침몰했다. 그래서 결혼 1주년이 다가오던 어느 새벽에 나는 다음과 같은 꿈을 꾸어야만 했다; 나는 어느 안개 낀 호숫가를 걷고 있었다. 안개가 짙어 호숫가의 가시거리는 몇 미터에 불과했다. 나는 찰랑거리는 물결에 발을 스치며 걷다가 호숫가에 떠밀려온 망가진 장난감 배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을 고치려 한다. 배를 분리하고, 다시 조립하고, 무언가로 붙이고... 이제 이 배는 가라앉지 않을 거야, 이제 이 배는 가라앉지 않을 거야, 중얼거리면서. 배를 다시 물 위에 띄워놓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을 때, 나는 놀라운 광경과 마주친다. 이제 막 안개가 걷히고 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호수는 세계의 모든 해안에서 잃어버린 모든 장난감들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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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부에서 계획 없이 돌아다니며 갖가지 우스꽝스럽고 어설픈 시행착오를 겪은 우리는, 여행 8일째에 파리로 돌아왔다. 아마도 거기서였을까. 아니면 그보다 며칠 전, 마르세유의 숙소에서였을까.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뉴스를 보겠다고 영어 채널을 찾다가 목격한 것은 잠자는 듯한 소녀를 배 위로 끌어올리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녀는 전혀 상하지 않았고, 심지어 창백하지도 않았다. 그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만 같았다.

음기야, 음기가 이 세계를 엄습하고 있는 것만 같아. 여행 나흘째에 묵었던, 가는 곳마다 샘과 분수가 있었던, 우리가 도착한 다음날부터 이틀 동안 비만 축축하게 뿌리던 엑스에서 몸서리치며 달아났는데, 그때 이미 가라앉는 배의 선실 속을 상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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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그만해야 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사적인 추억과 사회적인 사건당신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적도 없는을 뒤섞어 정돈되지 않아 복잡한, 혹은 지나치게 강렬하여 도저히 발설할 수 없는, 그 일에 관하여, 우리가 뉴스에서 보도 자료로 수십, 수백 번 보았던 그 장면들을 가공하여 개인적인 감정의 저장소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그것에 관해서쓸 것을 요청받았습니다. 그것써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정동에 관해서, 써야 합니다. 당신의 정동을 써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그것을 단지 씀으로써, 당신의 양심을 위무하려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정도로 괴롭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충분히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지만 않는다면, 당신의 손은 그다지 더럽지 않습니다. 당신이 현미경의 배율을 높일수록 슬픈 수동을 찾아다니고 있는 중독자라는 사실을 증명할 뿐입니다. 왜 즐거워하면 안 됩니까? 대답해보십시오. 당신은 하루에도 여러 번씩 웃습니다. 게다가, 일련의 그 사건들에는 슬픈 측면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일은 일어났습니다. 그 사실은 변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의 궤적 속에서 크고 작은 연대들이 만들어졌습니다. 당신의 슬픈 수동과 관련 없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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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내 머릿속의 목소리다.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 내가 느닷없이 떠오른 어떤 장면회색 하늘 아래 회색 바다에 반쯤 커다란 동물처럼 몸을 담근 배 한 척과 쏟아져 내린 컨테이너들, 이상하리만치 그 주위는 고요하고 그 장면을 찍을 때 외삽되었을 법한 우웅...하는 쉼 없는 기계음이 들려오는에 대해 그것을 잊으려 도리질 치고, 그 안에 봉인된 아우성을 상상하지 않으려 다른 곳에 부러 주의를 빼앗기기로 하고, 실제로 혼란한 지경이 되도록 매체의 끊임없는 말소리를 링거처럼 귀에 주입함으로써 결국 신경쇠약 직전에 도달할 때에도, 목소리는 계속 이미 속삭이고 있는 중이다. 네가 해야 할 일은 소용없이 그것을 떠올리고 몸서리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분류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너의, 순전히 지나친 상상의 참혹을 통과한 신음소리를 받아쓰는 것이 아니라 너를 때린다고 여겨지는그 이미지의 파장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적절한 방식으로 연구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거기에 감정을 투자할 필요는 없으며, 이해와 분석과 비판은 동시에 성립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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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런가? 나는 그러한 견해를 믿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떤 정동 연구자들의 이런 조언을 만났을 때, 나는 속이 다 후련하다고 느끼기도 했었다.; “접촉의 윤리는 정동적 역량의 일상적 무한성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정도에 달려 있다. 이러한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국가, 정치, 심지어 학제적 분석은 정동적 힘이 문화적 성숙이나 심지어 건전한 비판의 탈을 쓴 유아적 주관성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여긴다.”(론 버텔슨, 앤드루 머피, 일상의 무한성과 힘의 윤리: 정동과 리토르넬로에 대한 가타리의 분석, 정동 이론, 갈무리, 2015, p.267.) 이 말은 호주의 탐파호 사건에 관해,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푸른 수평선에 떠 있는 붉은 선체의 이미지와 그것이 남긴 정치적 삶의 파장에 관해 그들이 쓴 글의 마지막 문장이었고, 아마도 더 심한 말이 생략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생략된 심한 말을 대략 다음과 같이 추정하여 나는 더욱 더 부풀려 번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학계라는 해체된 모더니티의 폐허의 사원에서, 유명론의 사제들은 부서진 돌들을 주워 문양이 비슷한 것들만 한곳에 쌓아 서낭당을 만들고 거기에 각각 팻말들을 붙여두었는데, 그중 작은 돌무더기 하나는 정동 이론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오른쪽에는 윤리학이, 왼쪽에는 미학이, 앞뒤에는 매체 연구와 문화연구가 있고, 어떤 이들은 가장 미시적이고 특징적인 감정들을 지칭하기 위해 그 무더기의 돌을 사용하며, 또 어떤 이들은 가장 시의적이고 정치적인 전지구적 시스템의 균열을 벌리기 위해 아까 사용한 그 돌을 다시 사용한다. 어떤 이들은 16세기의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사실에서 이 돌의 권위를 찾고, 어떤 이들은 이 돌이 부싯돌로 쓰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벽에 그어보니 글자를 쓸 수 있다는 사실마저 발견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단지 돌멩이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또 다른 이는 모든 돌멩이는 각자 다른 쓰임새가 있다고 말한다. 가장 관대한 우리 시대의 사제는, 이러한 다양성이야말로 돌 일반의 가장 큰 쓰임새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돌을 써댐으로써 결과적으로 이 돌의 문양을 지워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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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돌에 관해 언젠가 내가 가졌던 견해를 약간 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이 생각을 또 다시 고쳐먹는다. 10여 년쯤 전에, 나는 정동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었다(정동, 그리고 다중의 도덕, 자율평론15, 2005). 그것은 하트와 네그리의 제국다중에 대한 반응으로서 나온 것이었는데, 제국론자들이 혁명적 형상으로 지목/이론화한 다중의 성격을 정동적 특질로 설명한 것에 나는 설득되지 않고 있었다. 내 생각에,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쓰고 있는 정동에 관한 설명은 그가 하고자 하는 전체적인 이야기에서 독립적으로 떼어내기 힘든 것이었으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수많은 경험을 타당하게도, 그의 시대에는 당연한 것이었던 형이상학적 사유와 (현실적인 정합성을 고려하여) 인간의 물리적 변용과 함께 설명하기 위한 나름대로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인간의 일견 비이성적인 측면들이 그의 삶 안에서 요동치고 있다면, 그러한 측면들을 누락하고 성립하는 인간에 대한 설명은 부실하다고 할 수밖에 없으니까. 당대의 견해로서는 제법 괴이하게 보였을 법한 인간에 관한 물리적이고 (알고 보면 필연적인) 비이성적인 측면의 형이상학적 대응 관계에 대한 그의 서술은, 철학사적인 문맥 안에서는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철학사 상의 다른 이론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인간 일반이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 사람됨의 바람직한 형상과 그 덕의 내용을, 이전의 서술에서는 누락되어 있었다고 생각되는 바를 편입시키기 위해 개념의 비틀기이를테면 신의 개념을 자연 전체로 확장한다든지, 사유와 연장성이 동일한 것에 대한 두 가지 설명/묘사 방식으로 정립한다든지를 실행에 옮겼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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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벵센 대학에서의 정동에 대한 강의(이제는 정동 이론의 전초 기지가 된)는 그 같은 스피노자의 유물론적인 측면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이다. 하기는, 이것은 11년 만에 다시 읽은 지금의 독후감이기는 하다. 2005년의 내 관점에서 정동을 통한 되기의 존재라는 제국론자들의 다중에 대한 정의는, 스피노자의 일견 쾌락법칙과도 비슷한 기쁜 수동슬픈 수동’(정념)의 이분법을 통한 가치론에 지나치게 낙관적인 기대를 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스피노자가 제시하고 있는 덕자-자유인의 모습이 최종적으로는 자연 전체로 확대된 신의 일부로서의 인간이 결정론적인 세계를 받아들일 때, 이것이 좌절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로 이끌어간다는 점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관조의 자세라면, -자연 전체-이성의 강고한 이념을 빼버린 상태에서 기쁜 수동에 이끌린 되기란 유희에 골몰한 존재와 비슷한 무엇이 아닌가?

그 텍스트를 다시 읽고 난 지금도 이 점에 관한 의문은 완전히 해명되지 않았다.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스피노자가 의미한 것은 매우 단순한 어떤 것, 즉 슬픔이 누구도 지성적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슬픔 속에서는 비참해집니다. 권력(power-that-be; pouvoirs)이 슬퍼할 백성들을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고뇌(agony)는 결코 지성이나 쾌활의 문화적 게임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슬픈 정동을 가지고 있는 한, 하나의 신체가 여러분의 신체 위에, 하나의 영혼이 여러분의 영혼 위에, 여러분의 것들과 합치하지 않는 조건들과 그러한 관계 속에서 작용합니다.”(질 들뢰즈, 정동이란 무엇인가?, 비물질노동과 다중, 갈무리, 2005, p.57-58) 그리고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라면, 그런 사람은 자유인이라고 불릴 수 없다. 그는 외부로부터 슬픈 수동을 받아들일 따름이며, 그런 한에서, 그는 정념의 노예이니까. 이 같은 언명은 얼마나 건강한가? 웰빙족의 사고방식처럼 건강하다. 이미 비참해진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 비참으로부터 빠져나올 것인지 알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옆으로 제쳐둔다면 말이다. 11년 전의 나는, 세계무역센터에 단도직입적으로 날아온 여객기가 건물을 끝장내는 일련의 이미지들이 전해주는 정동을 어떻게 이론적으로 정위할 것인지, (‘되기는 또한, 다중의 모종의 목표와 어쨌든 어긋나는 방향으로 키가 잡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무엇으로 되어갈 것인지, 어떻게 되어가야 할 것인지, 들뢰즈의 스피노자를 통해 다중적 주체의 힘을 낙관하고 있었던 제국론자들에게 묻고 싶었다. 그보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윤리 전통에 따른 습관-관습-윤리의 성립에 기댄 되기에 이 같은 당위성이 따라붙는 이론적 필요성이 우선 모순적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작년에 번역되어 뒤늦게 내게 도착한 마수미의 글은 9.11 이후 벌어진 미국의 보수적 군사 정책미래의 가능한 위협의 확신 속에서 성립하는이 정동을 다루는 방식을 통해 위협의 정치적 존재론을 펼쳐보여주었다. 그의 글은, 매력적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정동에 대한 권력의 정치적 작동이 너무나 압도적이라는 점을 실증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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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비참해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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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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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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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 안개 낀 호숫가를 걷고 있었다. 안개가 짙어 호숫가의 가시거리는 몇 미터에 불과했다. 나는 찰랑거리는 물결에 발을 스치며 걷다가 호숫가에 떠밀려온 망가진 장난감 배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을 고치려 한다. 배를 분리하고, 다시 조립하고, 무언가로 붙이고... 이제 이 배는 가라앉지 않을 거야, 이제 이 배는 가라앉지 않을 거야, 중얼거리면서. 배를 다시 물 위에 띄워놓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을 때, 나는 놀라운 광경과 마주친다. 이제 막 안개가 걷히고 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호수는 세계의 모든 해안에서 잃어버린 모든 장난감들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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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아름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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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이 모든 걸 잃어버린 아이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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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분리하고, 다시 조립하고, 무언가로 붙이고 있는 것은 장난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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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제 그만 중지해야 합니다. 무슨 일인가가 벌어졌다면, 그것은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일입니다. 이 점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실제로는 평온한 일상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망원경으로 남의 불행을 굳이 찾아내서 보려고 하지 않는 한은요. 적당한 거리에서 보고 있으면, 먼 곳에 피어오르는 연기는 단지 공장의 생산성을 의미할 따름입니다. 불필요하게 부풀려진 불행한 느낌은 당신의 활력을 떨어뜨릴 것입니다. 일어난 일의 불행한 파장과 그것이 예감케 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은 그 무엇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당신 자신에게. 그것은 지적으로도 우둔한 일입니다. 뉴스는 그만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차라리 시를 쓰십시오. 미묘한 분위기에 관한, 유행에 맞는 시를요. 그렇게,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십시오. 당신의 분수에 맞는 고민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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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이 목소리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저 모순적인 요구들에 대해 대답을 해야만 한다고 느낀다. 이 돌무더기에 모래를 한 알씩 던지는 심정으로. ‘다양성에 의해 모든 것에 관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정동 이론의 장에, 또 다른 정동 연구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겨놓기도 했던 것이다. “애정의 변화나 감각의 변화, 상호주관성, 미래를 약속하는 대상으로의 전이가 그 자체로 더 좋은 삶을 생성해 내지 못할뿐더러 커플이나 형제 또는 교육의 협력으로도 그렇게 할 수 없다. 규범적 낙관주의의 모호한 미래성은 구조적 불평등을 지닌 유토피아로서 자잘한 자기-단절들self-interuption을 생산한다. (...) 정동적 분위기의 전환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에 상응하지 못한다.”(로렌 벌렌트, 잔혹한 낙관주의, 같은 책,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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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가 앉아 있던 광장의 이름이 무엇이었나. 즐거웠던 여행, 분명 즐거웠던 여행이 모르는 사람들의 슬프디 슬픈 여행과 붙어버렸다,는 이 사적이고 상호적인 사실 속에서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시간을 기억하려 애쓰고 있다. 그 광장의 이름, 우리가 애초에 모르고 있었던 광장의 이름. 상쾌한 대기와 쏟아지는 햇빛과 길거리 연주자들의 한가로운 피리소리를 팔던 광장의 이름. 이름 따위는 몰라도 상관없었는데, 왜 이제 와서 그것을 기억하려 하고 있나? 슬프디 슬픈 여행과 붙어버리기 전의 즐거웠던 시간을. 마치 언젠가의 자기 자신을 필사적으로 애도하려는 듯이.()

(월간 <현대시학> 2016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