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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시인론

사후의 사후를 사는 냉담자의 멜랑콜리, 혹은 신성성의 재상상: 송승언의 시

돌의 감정

 

오래 전에 어떤 철학자의 윤리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문득, ‘나는 돌이 될 수도 있었다는 상상이야말로 가능한 상상과 불가능한 상상의 접점에 서는 첫 경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철학자는 근대 초기에 살았던 사람으로, 아직 매일 햇볕을 받으며 물속에 잠긴 돌 위를 흐르는 물을 보면서 강변을 산책하는 일에 익숙했고, 콘스탄틴주의와 유대교의 강력한 신 개념과 그 이름을 통한 현실적 지배 속에서 살았지만, 이상하게도 경전의 글자들에 얽매여 있지 않았던 듯 보이는 데다, 바로 그런 이유로 자기 민족 집단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자기의 국가 종교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그런데도 더욱 더 이상한 것은, 그가 지극히 종교적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는 범신론적이고도 유물론적으로 자연과 우리의 물리적 신체와 우리의 영혼, 혹은 정신이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물질과 정신이 일종의 데칼코마니처럼, (혹은 이 비유가 지나치게 동일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여겨진다면) 음화와 양화처럼 서로의 대응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일, 무엇인가가 신으로 불리운다면, 그것은 신체와 정신을 가진 인간을 포함한 자연 전체를 의미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의 함의는 초월적 신의 이미지에 대한 도전처럼 여겨졌다.


돌이 될 수도 있었다고 상상하는 것. 그것이 특별히 어떤 사람, 가령 나 같은 사람에게 감응을 일으켰다면 그것은 그가 불러일으키는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윤리학의 언어들이 지극히 물질적이고 실질적인 경험적 현실을 지속적으로 떠올리는 한편, 돌이나 물, 흙 같은 무기물이나 나아가 빛이나 색, 온도 같은, 몸이 없거나 희미한 실체들에 대응할 영혼이나 정신의 상태를 상상하도록 촉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돌이 될 수도 있었다’. 이 매력적인 상상은 또한, 유독 사회가 가르쳐주는 자동적인 인사말과 감정 표현에 일일이 의문을 표시하고픈 내향적인 영혼 속에서 급작스럽게 팽창하기도 한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애초에 배운 게 없으니 어떤 사물에도 레테르를 붙이지 않기로 오늘 식단에 대해 침묵하기로 음식이 어떠했더라도 그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므로

 

      옴짝달싹하지 않고 싶다 더는 네가 불러도 가지 않고 싶다 차갑더라도 여기 머물고 뜨겁더라도 여기 머물기로 한다 너에게 호명되지 않는 위치에서 너를 호명하지 않기로 한다 애초에 남이니까 남 아닌 것으로 위장하지 말기로

 

      내 속에 무슨 금속성이 있는지 알기나 하는지 내 배에 귀를 대면 알 것이다 내 속은 단단한 진공으로 되어 있다 가장 날카로운 금속이 될 가능성은 그 진공 속에서 울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차라리 예감에 가까운 것이지, 나의 감정은 아니다

 

네가 너인 까닭은 식탁에서 나와 마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의 의자에 같이 앉는다면 우리는 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와 다른 것을 주문하기로 한다 목소리와 표정에 감응하는 법 없기로 내가 어떤 것으로 불리는 법 없기로 없다고 한다면 없는 것으로

 

다만 있다고 한다면 추락하기로, 벼랑에서 떨어져 부서진 상태이기로, 더 부서질 수 없을 파편들로

 

너와 내가 아닌 모든 자리로 말이 되어 번개가 되어 일용할 만나가 되어

-돌의 감정전문.

 

사람들이 흔히 어떤 시를 두고 감각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대개 오감의 풍부하고 생생한 표현을 가리킨다. 그것은 피부로 느껴지는 것만 같군!’이나 정말 그 맛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라든가 내가 꿨던 어떤 꿈처럼 생생하다는 사회적이고 관습적인 경험적 자아의 감탄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 시는(이 시인의 다른 많은 시들처럼) 그 같은 감각적 동일시에 의한 찬탄을 금지한다. 송승언의 시는 통상적인 감각적 시의 범주와는 거의 관련이 없다(만일 있다면 육감(六感)의 범주에 가까울 것이다). 전통적인 시론에서 동일화 작용이라고 불리우는 서정시의 특징과 작용에 그는 거부 의사를 표시하고 있다. 꽃의 아름다움이라든가, 사랑과 이별의 감정 같은, 이미 가진 관습적인 경험을 시를 통해 되살리는 것은 자기 복기와 동일한 경험의 무한 복제에 불과하다. 그 모든 동일시 중에서 돌과 동일시되어 있는따라서 다른 모든 것과 감응하기를 거부하는-- 상태는 왜 무시되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므로 그것은 어쩌면 동일시 자체에 대한 거부라기보다는 관습화된 선택적 동일시에 대한 거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돌이 되어 있는 중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는 옛 시인의 태도와 너에게 호명되지 않는 위치에서 너를 호명하지 않기로 한다 애초에 남이니까 남 아닌 것으로 위장하지 말기로라는 이 시인의 태도는 명명을 통해 상호주관적인 존재성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지반위에 놓이기는 하지만 꽃과 돌이 다르듯 그 호명과 응답(가능성)에 대한 반응은 사뭇 다르다. (물론 저 꽃의 시인도 평범한 동일시를 의식적으로 거부하기는 했었다.) 그는 남이 알려준 많은 것을 주저 없이 배우고, 많은 요리의 이름이 지칭하는 각각의 냄새와 맛을 분별하여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나누고, 모든 사교적인 사람들이 그러듯 다른 이들과의 친분 속에서 포지션을 가지고, 그에 따라 동일성을 명분으로 한 관습적인 모든 호들갑스러운 반응들을 자동 인출할 의사가 없다. 마지막 연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돌연한 추락/전락에서 파쇄와 편재에 대한 연상떨어지고 부서져 마침내 흩날리고 누군가의 피와 살이 될 만나로 변용되는--에 닿기 전까지, 저 중립적인 단어들 속에서 독자는, 가령 자기의 AT필드를 한계까지 팽팽하게 확장 강화 중인 에반게리온 영호기와 마주앉아 있다고 상상하게 된다. 그것은 어떤 유형의 절제된 록(rock) 연주처럼(혹자는 심지어 Rolling Stones를 필두로, “Stone”을 이름 속에 갖고 있는 많은 밴드들의 곡을 연상할 수도 있다(그건 그렇고, 어째서 록밴드들의 이름에는 stone”이 그토록 많이 쓰이는 걸까?)) 내부에 금속성(metalic) 예감을 품고 있지만, (록이 메탈이 아닌 것처럼) 그 날카로움은 돌의 감정은 아니다. 돌은 호명에 즉각 부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꽃과 다르고, 던지면 부서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또한 금속과 다르다. 돌이 된 그는 묵묵한 분노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자기를 파괴할 만큼 강력한 내부 압력에 저항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돌의 감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 모든 뉘앙스들은 자기의 표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독백의 형식으로 시화(詩化)되고, 당신의 눈앞에 현현해 있는 것은 얼굴색/음색 하나 변하지 않는 돌이다. 그것은 사뭇 투시/경청을 요하고 있으며 보이는/들리는 것 너머의 내재된 강력한 파동, 혹은 무()의 높은 압력을 염두에 두라는 주문처럼 보인다. 단단한 진공은 높은 물질적 밀도의 다른 말이다. 귀먹을 듯한 적요. 무감한 표정을 한 격정.

 

의 죽음 이후

 

이런 연상 때문인지는 몰라도, (시집의 표제인 철과 오크가 일렉트릭과 어쿠스틱의 쌍으로 또한 연상되는 것을 포함해서) 나는 그의 시가 음악적인 뉘앙스를 표현하려 한다고 느낀다. 시의 시각성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시의 시각 이미지 전개와 회화의 그것 간의 유사성을, 시의 청각성/독음(讀音)을 염두에 둔 사람들은 대개 시의 운율과 음악의 그것 간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데 집중한다. 그러나 송승언의 시가 음악적 뉘앙스를 표현하려 할 때, 그의 시는 음악의 운율이나 리듬을 모사하거나 반영하기보다는 모종의 음악 정신이라고 할 만한 기질이나 세계관을 반향하는 것 같다.


그것은 그가 듣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을 길으라 하시니 물을 길었습니다로 시작해서 물을 길으라 하시니 내 목소리인 줄 알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우리 뜻대로 나는 더 많은 물을 길어올리시고//당신의 얼굴을 볼까 두려웠습니다 전에 없이 그랬습니다로 끝나는 증기의 방은 시인, 영매, 분열증자가 좌우 대뇌가 완벽히 분리되어 있던 전사(前史) 시대 조상의 생리학적 흔적을 지니고 있으며 이들이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현생 인류에 의해 폭력적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겪어왔다는 줄리언 제인스의 주장을 떠올린다. 서구 정신에서라면 그리스적인 사유방식과 대조되어 교호하며 두 정신적 조류의 하나를 담당해온 히브리적 사유방식의 비유로 설명될 수도 있겠다. 그가 풍기는 종교적 뉘앙스는 분명 실용적이고 근대적인 방향으로 개혁 수정한 이후의 것이라기보다는 신의 음성을 들어본 적 있으나어느날 갑자기 계시가 끊긴 구약 시대 전통에 익숙한 유대교의 것이거나 적어도 신성성을 느끼도록만들어진 전례음악이 단지 메시지의 배경으로 후퇴하기 이전의 영지주의적 보편 교회의 관습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그의 시가 음악적 뉘앙스, 음악 정신의 문자적 표현과 모종의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면, 앞서 이야기했듯, 음악을 기원으로 두고 있는 서정시의 관습적이고 선택적인 동일화 이념에 그가 저항하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나는 송승언 시의 음악 지향성이 세속화 이전의 신비에 대한 재상상(re-imagining)(어쩌면 무의식적인) 노력과 상동 관계에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나는 이 말이, 종교의 가장 (근본적이라는 의미에서) 급진적인(radical) 형태가 의심을 믿음의 바탕으로 삼고 신 개념을 세심하게 수정하고 재정의하려는 것처럼, 음악/서정의 가장 급진적인 형태가 가장 궁극적인 의미에서 침묵과 소음과 불협화음(따라서 무와 불일치)을 바탕으로 음악성/서정성의 개념을 재정의하려는 노력이라는 의미로 읽히기를 바란다.

 

안개 짙은 날에는 걷기만 했지

죽는 날 듣게 될 음악을 생각하며

 

웃었어 친구들도 웃었지 맞닿은 어깨들이

빛나 보였어 먼 곳의 도시가 능히 그러듯이

 

피어오르는 빛을 따라서

안개는 몸을 지우며 길을 펼쳤다

 

친구들, 안개 속에서 크고 환하여

안개 걷히면 보이지 않는

 

친구가 없는 내 친구들

 

사과와 크레용, 장미나 의자 따위

저마다 대수롭지 않은 사물들을 손에 쥐고

그것을 신앙이라 밝히길 두려워 않았던

 

친구들이 울었어 어두운 도시로 걸었지

지울 몸이 없어 도시로 가는 길도 없는

흑암 속을 걷는 친구들

그곳이 도시인줄 모르던

 

친구들, 내가 죽은 뒤에도 내 친구들이었던 친구들

신실했고, 저마다 아껴 듣는 음악이 있었던

내 친구들

-밝은 성전문.

 

내 책상이 있던 교실과 함께 첫 시집에서 가장 서정적이며 송승언의 독특성을 잘 보여주는 이 시는 , 또는 유령 친구의 모티프를 통해 서정성-신성성의 낡고 박제된 개념의 재상상을 촉발한다. ‘오래된 나의 죽음이라는 자주 반복되는 그의 시적 주제가 종종 종교적이면서 동시에 신성성에 대한 회의적인 희구에 뻗어있음은 하나님, 그래도 나는 안 죽으면 안 될까?/나는 안 될까?/짝꿍 옆에서 제발 토하지 않게 해달라고 덧붙이면서”(비실감, <문장웹진> 20156월호)라는 유년의 회상에서 가정적으로 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비실감에서 화자는 일곱 살 때 소풍 가는 버스 안에서 도로변의 흔들리는 꽃을 보면서 시든 꽃을 선취하고 매스꺼움을 동시에 느낀다. 나무 둥치를 보고 그 있음의 아찔한 현전에 사로잡혀 구토하던 사르트르의 로캉탱을 떠올리는 이 실존주의적인 어린이는 자기의 무화(無化)-죽음의 상상을 내용으로 하는 기도를 그 후로도 그칠 수 없었던 것 같다.


의 죽음에 대한 상상의 연습은 사회화--‘신의 죽음에 대한 상식을 터득하는 일를 통과하면서 그 세부가 더 풍부해지고 수정된다. 19세기 서구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와 니체를 통과하면서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나 망상’, ‘원한으로 간주하고 교회 제도에 대한 회의를 신 개념 자체의 폐기로 몰아갔던 것처럼, 우리는 우주가 빅뱅에서 탄생했으며 삶이라는 사건과 그 사건의 끝장만이 확실하다는 것, ‘죽음은 단지 의 전면적인 무화를 의미하고, ‘사랑과 같은 낭만적인 이상은 호르몬의 부기우기’(헨리 밀러)에 불과하다는 과학적인 믿음을 견지하도록 훈련된다. 그뿐인가. 죽음에 대한 상상은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유한자 의식과 영원에 대한 희구와 성스러운 것에 대한 갈구라는 과정과 진지함을 잃고 정교한 웃음을 짓는 탁상 위의 유리 해골’(유리 해골)과 같은 힙한 소재가 된다.


죽음-‘전능한 신에 대한 유년의 관습적인 연상은 사과와 크레용, 장미나 의자 따위/저마다 대수롭지 않은 사물들을 손에 쥐고/그것을 신앙이라 밝히길 두려워 않았던//친구들이나 내가 죽은 뒤에도 내 친구들이었던 친구들/신실했고, 저마다 아껴 듣는 음악이 있었던//내 친구들과 같은 시구에서 보듯이 이생과 사후를 엮고 사과와 크레용, 장미나 의자, 아껴 듣는 음악 같은 사소하고 친밀한 사물과 예술에의 애정을 신앙에 버금가는 것으로 연장하며, 함께 살아/죽어가는 유한자로서의 친구들을 이미 죽은 자의 시선에서 애도할 만큼 시간을 초월한 지속적인 연민으로 확장한다. ‘의 부재가 초래할 이 세계의 부재는 선취된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령이 된 나는 여전히 그 흔적을 환지통처럼 유지한다. 내 책상이 있던 교실처럼 밝은 성에서도, 과거를 기술하는 현재의 목소리가 대과거 속으로 편입되고, ‘우리, 삶과 죽음을, 이생과 사후를 겹쳐놓는다.


한편, 이 시에서 익숙한 종교적 메타포들을 발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영혼불멸에 관해 논하는 플라톤의 국가10권도 그렇지만, 무수한 입신 체험에서와 마찬가지로 죽음 이후의 세계는 물질적인 경계가 희미해지고 안개와 어둠 속의 빛만이 영혼을 안내하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이것이 기독교 서사의 발달과 함께 더욱 많아진 것은 그 원형적인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가령 성서 이후 가장 많이 팔린 기독교 서적이라 일컬어지는 한 소설 작품 역시 이 같은 상징과 알레고리를 순례자의 삶으로 묘사하였다.


한때 땜장이였던 존 번연을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든 17세기의 소설 천로역정멸망의 도시를 떠나 천성으로 가는 주인공 크리스천의 험난한 모험 이야기다. 주인공은 우리가 오늘날 접하는 숱한 RPG 게임이나 판타지 모험 서사들의 캐릭터처럼 여러 단계의 다양한 상황에 놓여 고난을 이겨내고 점점 레벨업되어 드디어 마지막으로 마음먹기에 따라 수위가 달라지는 강을 건너 만렙에 도달하자 빛나는 성에 들어가게 된다. 각성한 그의 처자식이 같은 모험 경로를 지나게 되는 2부에서도 그렇지만, 언제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동행하는 친구들이다. ‘담대 씨같은 수호자가 동행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는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굉장하다. 오히려 주저 씨심약 씨’, 또는 낙심 씨질겁 양같은 예민하고 세심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야말로 연민과 공감을 나눌 친구가 된다.


송승언의 밝은 성이 주는 묘한 미래적 향수는 이 같은 명백히 영혼 불멸을 암시하는 종교적인 알레고리에 부정신학적인 회의와 실존주의적인 유한자의 섬세한 감각, 그리고 미학적인 애정을 지닌 친구들에 대한 끈질긴 연민을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 기독교적 사유와 동행하지 않는다. 밝은 성의 수수께끼는, 시의 화자인 친구들이 분명 안개와 길과 멀리서 빛나는 도시라는 천로역정과 같은 오래된 상징적 구도 속에 있으면서도 그 맵을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 아니, 어쩌면 맵 자체가 끊임없이 변경되고 희미해진다는 사실이다. ‘만렙을 보장하는 모험의 사명도, 가야할 빛의 도시의 존재도 모호하고, 자기의 경계를 명확히 해주는 몸조차 안개와 어둠과 빛의 관계 속에서 희미한 빛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사후의 사후이기 때문에. 에덴에서 죽은 자의 시이기 때문에. “천국에서도 그는 죽고 천국에는 천국이 없어서//그 영혼은 굽이치는 천국의 만곡을 따라 떠내려간다”(에덴).


천국에서 죽은 사람의 사후세계


사후세계에서마저 죽은 자의 사후는 근대적인 신 개념의 영향권을 벗어난다. 근대적인 신 개념은 포스트-삶까지만 관장하기 때문이다. 포스트-포스트-삶은 처음의 삶과 동의어가 아니다. 사후의 죽음을 상상하는 자는, 산 채로 자기가 일요일마다 거듭난다고 강조하는 자와는 다르다. 그는 러닝머신 위에서 뛰고 있으면서도 천로역정에서 레벨업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일요일의 신자와 달리, 피안의 피안으로 건너가버린다. 그런데도 여전히 무()가 아니다. 어쩌면 실존주의자들은 존재/비존재‘1/0’으로 단순화시켜온 것은 아닐까? ‘0’ 속에는 ‘1-1’, ‘-1+1’, ‘0x23’ 같은 무수한 비실체적 가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0=안에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의 엄청난 공리계들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도, 그는 지워지지 않은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천국조차 없는 영원한 헤매임 속에서 그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이 만일 지금-여기의 삶이라면?

 

정원으로 이어지는 여러 갈래의 길에는

신도들이 늘어서 있고 신앙심을 시험하려는 듯이

줄줄이 대기열을 만들고 혀를 내밀고 있다

혀끝에서 신속히 흩어지는 것

없었던 듯 새겨지는 것

그것을 위해 나는 항상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낯가죽을 새롭게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혀를 내밀며 드는 생각은 이것

나는 대체 어떤 종류의 인간인가?

 

여러 갈래의 길로 이어지는 정원에 서서

향나무의 뒤틀림에 경탄했다

저렇게 뒤틀릴 수만 있다면

개발 중인 신도 두렵지 않을 텐데

비늘조각이 육질화 된 향나무를 보며

향나무 좋지...나도 좋아해

말씀하시던 신부님은 맥주 마시러 갔고

 

나는 이제 내 팔다리의 멀쩡함을 입증하기 위해

뇌에 대 타격을 입은 사람의 말을 빌려 쓴다

탁구 하던 사람

술집 하다가 망한 그 사람

 

종이 울리면 슬프지는 않았다

신앙을 잃은 사내아이의 몸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마지막으로 만지고

또 냄새 맡았던 전도서의 겉표지 냄새

-사람 그리는 노래전문(<시와 세계> 2016년 봄호).

 

저렇게 뒤틀릴 수만 있다면/개발 중인 신도 두렵지 않을 텐데라고 읊조리는 이 시의 화자에 대면, T. S. 엘리엇이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에 썼던 다시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더라도/희망하지 않더라도/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더라도//얻음과 잃음 사이에서 흔들리느니/꿈이 교차하는 이 짧은 전이 속에서/탄생과 죽음 사이를 꿈처럼 교차하는 황혼은 같은 시구는 여전히 01 사이의 동요에 머물러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신앙을 잃은 사내아이의 몸에서 나는 좋은 냄새마지막으로 만지고 또 냄새 맡았던 전도서의 겉표지 냄새를 병치시킨 이 시의 화자는 표면적으로는 배교자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데리다의 종교 없는 종교에 관해 존 카푸토가 썼던 다음과 같은 말들을 환기시킨다; “데리다는 우리가 라고 명명하는 것은 일종의 갈등과 서로를 지치게 만드는 경쟁의 목소리에 연루되어 있어, 마치 나의 불신앙고백에 대항하는 내 안에 신자가 항상 있는 것처럼 나의 신앙고백에 대항하는 무신론자가 항상 내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시인, 영매, 분열증자가 듣는 목소리와 신비가 역사적이고 제도적인 종교로 환원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처 입은 모든 말은 기도’, 기도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 기도라는, 기도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신성성의 개념 재규정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의 가장 치열하고 정제된 형태가 시라면, 송승언의 시는 어떻게 신앙을 잃은 사내아이의 몸에서나는 좋은 냄새전도서의 겉표지 냄새가 겹쳐질 수 있는지, ‘종이 울려도 슬프지 않을수 있는지 비밀을 알려준다. 신적인 것은, 실은, 근대 초기의 철학자가 파문을 당하고도 지극히 종교적일 수 있었던 것처럼, 혹은 무신론자인 데리다가 문자 그대로 특이하고 유별난 방식으로 신학을 반복했던’” 것처럼, 천국에서 죽은 사람의 천국 없는 사후 세계처럼, 우리의 끝없는 흔들림과 불가능을 향한 마음, 곧 시적인 것과 거의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 계간 <파란> 2017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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