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명의 개구리 소년들이 유골로 발견되기 전, 때때로 나는 개구리 소년들이 자라지 않고 계속 산 속에서 개구리를 잡으러 다니는 꿈을 꾸곤 했다. 개울을 따라 산을 오르고 마침내 발견한 웅덩이에서 우무질의 개구리 알들과 막 깨어나기 시작하는 올챙이들을 발견하고 웅덩이 속에 발을 들여놓으면 손 안에서 개구리는 미끄러지고 왁자한 웃음소리, 첨벙거리는 물소리, 떠들썩한 아이들의 말소리들이 귓속을 파고들다가 곧 나 자신의 유년과 연결되는 꿈. 어릴 적 혼자 올라가곤 하던,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선 증산동 뒷산 중턱에서 어느 겨울날 오후에 발견한 삽 한 자루, 빨간 하이힐 한 짝, 손바닥만 한 개발자국들과 듬성듬성 떨어져 있는 붉은 핏방울들. 철이 들면서 나는 그 핏자국이 누구의 것이었을지 내내 궁금했다. 삽 주인의 것이었을까, 하이힐 주인의 것이었을까, 개의 것이었을까. 그 이후로 나는 혼자 하던 비밀스런 산행을 그만 두었던 것인데, 아직 겨울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던 눈 쌓인 증산동 뒷산의 어울리지 않는 소도구들은 산이 아니라 산에 남은 사람의 흔적이 가장 무섭다는 것을 각인시켜 준 상징으로 내게 남아 있다. 개구리 소년들의 죽음을 접한 이후로 나는 다시는 그 꿈을 꿀 수 없었다. 어쩌면 평행 우주의 다른 현실 속에서 아이들은 여전히 다 자라버린 나 대신 산 속 개울가에서 개구리를 잡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 세계에서 개구리 소년들의 죽음을 적나라하게 삽질하고 파헤친 뉴스는 꿈속에 유폐된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들의 유년을 파괴해버렸다.
박상수의 시집 <후르츠 캔디 버스>를 읽고 있으면 개구리 소년들이 죽기 전의 나날들을 접하는 느낌이 든다. 내가 환상화해서 추체험하던 가공된 개구리 소년들의 영원한 유년은, 실은 삽자루와 하이힐과 개발자국과 핏방울들을 보기 전의 나 자신의 유년이었을 것이다. 실로 이 시집에 가득 차 있는 시인의 유년에 대한 기억은 간혹 독자 자신의 것인지 시인의 고유한 경험인지 헛갈릴 만큼 생생하게 감각적인 현실로 경험되기 때문에 나는 이 시집을 ‘분석’해야 한다는 이 글의 임무가 하염없이 무겁게 느껴지고 마는 것이다. 분석하기에는 가슴이 너무도 먹먹해서 읽을 때마다 보편적 감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고만 싶고, 그러니까 그저 읽어보면 왜 먹먹한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해주고 싶고, 해설이나 분석 따위는 집어치우겠다고, 내가 이 시집에서 느낀 것들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은 광화문 네거리 이순신 동상 위에 올라가 이 시집을 찌라시처럼 뿌리는 것이라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시인의 기억을 독자가 충실히 느끼고 공감하는 것을 넘어서 점유해버린다는 것도 역시 월권이 틀림없으니, 이 글을 읽을 독자들을 대리하고 있는 다만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나는 혼자 보글보글 끓어 넘치려는 피를 잠시 조용히 잠재워야 하리라.
이불의 안과 밖
그렇다. 끓어오르는 피는 잠재워두어야 한다. 이 시집에 대해서 이렇게 경망스럽게 열광해서는 안된다. 이 시집은 고요하고 달콤하기 때문에 혼곤한 상태의 몽환에 관해 좀 더 명상해야 한다.
정말이지, 이 시집의 시들은 오후 두 시에서 네 시 사이의 낮잠을 떠올린다. 오후에 오는 졸음을 쫓아내지 않고, 꿈을 꿀 수 있을 만큼 깊이, 그러나 꿈을 기억할 수 있을 만큼만 깊이, 그는 잔다. 그는 졸음과 싸우지 않는다. 시의 화자들은 잠과 싸울 만큼 갈등의 인간이 아니며, 불면증에 걸리는 신경증적인 인간은 더더욱 아니다. 그의 잠은 그의 증상을 꿈으로 외화함으로써 그의 정신 건강을 유지한다. 역설적으로, 그는 남들보다 더 자주 자고 많은 꿈을 꾸는데, 이것들이 그를 미치거나 폭력적이 되지 않도록 그 자신과 외부로부터 그를 보호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잠, 꿈, 이불 같은 어휘들은 이 시집에서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자주 출현하고 있다. 낮에 꾸는 꿈(daydream)이야말로 나뭇잎들 사이로 비추이는 햇빛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거의 신화적인 유년의 오후를 불러들이는 매개다. 종종 그의 시에서 잠은 외부세계로부터의 안전과 평온을 뜻하는데, 이때 자주 이불의 이미지는 수줍은 아이들이 들어가서 유희하고 꿈꾸는 장롱처럼 위협과 피곤한 현실로부터 보호막 역할을 한다. 시적 화자는 이 쾌적한 최소한의 안전가옥 안에서 나눈 타인과의 최초의 친밀한 접촉을 첫사랑으로 기억하기도 하고(“우린 이불을 뒤집어썼다 손전등을 켜놓고 열이 나는 뺨을 핥기도 했다”, 「첫사랑」), 폭설이 내리는 날 홀로 선 전화박스 안에서 공중전화에 귀를 댄 채 “이 밤 누가 수화기를 붙들고 하얀 이불 속에서 울고 있는 것일까”(「공중전화」) 알 듯 모를 듯한 타인의 닿을 수 없는 심정을 상상하기도 하며, 아프거나 우울한 날엔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고”(「편도선」), 안팎의 기후가 여의치 않을 때에는 “이틀 밤 사흘 낮을 내리는 비, 낮에도 커튼을 쳐 놓고 잠을 자”기도(「청동과 재의 나날」) 했던 것이다. 이불은 엄마의 대리인, 언제고 품어주고 재워 준다. 시인은 스스로 엄마의 대리인이 되기도 한다(“날개가 얼어버린 참새, 이불을 덮어주어도 참새는 눈을 뜨지 않았다”, 「다락방이 있던 풍경」)
유년을 생각할 때에 이토록 이불을 자주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낮에 이불을 덮고 있는 아이들은 아프거나 고독하다. 이 시집에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멜랑콜리는 신열을 앓고 있는 아이의 고독과 깊은 몽상이 발효한 결과처럼 보인다. 이 소년은 혹시 신병(神病)을 앓았던 것일까?
축대가 자주 무너지던 봄, 학교 가는 길에 보았던, 땅 밑 하수관 얼었던 물이 터져 새어나오던 이상한 구멍, 이끼 뒤덮인 바위, 검은 잠자리 따라 시내를 오르다 보면 젊어 사라졌다는 삼촌이 웅덩이 안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물살을 헤치고 손을 뻗으면 삼촌은 찬물에서 건진 물고기를 입 속에 흘려 넣어 주는 것이었다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살아서 지느러미 흔들던 물고기 내 안으로 스며들면 입술을 깨물어도 쏟아져 나오던 신음소리, 자꾸만 아득해지는 풍경 차가운 손, 나는 하나둘 옷을 벗고 눈감지 못한 영혼의 중얼거림을 따라 끝내 돌아오지 못할 길 속으로 오랫동안 흘러 들어갔다 누가 나를 부르는 것일까 그러나 누가 나를 부르는 것일까 눈을 뜨면 이마 짚던 어머니, 떨어져 나온 비늘들을 말없이 쓸어담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동네를 돌던 사진사를 불러 하얗게 입술이 마른 나를 무릎에 앉히고는 했지만 아무리 남자가 웃어라 소리쳐도 어머니 눈물만 흘리고 구름은 물 위를 흘러가고.
-「이상한 구멍을 보았다」 전문
아이는 학교 가는 길에 보았던 이상한 구멍과 이끼 뒤덮인 바위를 지나 시내를 따라 올라 웅덩이에 이르러 꿈인지 환각인지 모를 다른 현실과 접선한다. (그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은 잠자리인데, 이 시집에서 잠자리는 몇 편의 시에서 시인을 인도하는 일종의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다. 잠자리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살펴볼 것이다.) 웅덩이 안에서 발견한 것은 어쩌면 ‘나’의 물그림자였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젊어 사라졌다는 삼촌”과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이끌려가듯 “하나둘 옷을 벗고 눈감지 못한 영혼의 중얼거림을 따라 끝내 돌아오지 못할 길 속으로 오랫동안 흘러 들어갔다”. 잠자리에서 신의 음성을 듣고 엄마에게 달려갔던 사무엘처럼 소년은 누군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누가 나를 부르는 것일까 그러나 누가 나를 부르는 것일까”. 소년을 부르는 것이 신인지 어머니인지 알 수 없다. 신열에 들떠 가위에 눌린 소년의 꿈 바깥에서 아마도 어머니는 소년을 부르고 있었을 테지만 꿈속에서 소년을 부르고 있었던 것은 “젊어 사라졌다는 삼촌”의 “눈감지 못한 영혼”이었으리라. 열에 들뜬 그의 가수면 상태는 가사상태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의 정신은 입신(入神)한 영매처럼 영계를 헤맨다. 이런 일이 잦았던 듯 시인은 “그럴 때마다”라는 부사어구를 삽입한다. 그는 자주 죽다 살아나고(이승과 저승 사이의 중간 지대를 다녀오고), 그럴 때마다 비늘을 떨어뜨렸다. ‘비늘’은 선행된 이미지 “물고기”로부터 연상된 것일 테지만, “떨어져 나온 비늘들”은 파충류의 탈피를 떠올린다. 영안(靈眼)을 가진 소년은 신병을 앓으며 자라났던 것이다.
이 시에서 화자의 현실과 환각의 경계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까무러친 곳이 “이상한 구멍”인지 “이끼 뒤덮인 바위”인지 “웅덩이”인지 심지어 물 속에서였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소년의 신병은 어쩌면 몽유병의 징후를 내비치고 있다. 그러니까, 그는 눈을 뜨고 꿈꾸며 전령을 따라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골목엔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여자, 대문 앞에 버려진 세발자전거를 보았다 손잡이에 매달린 바람개비 찌그러진 채 돌아가고, 주인 잃은 빨간 에나멜 구두 한 짝, 바람이 잠시 여자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심부름 갔다오는 꼬마에게 소식 물었으나 그는 놀지 않았다 자주 갔던 구멍가게 주인남자가 TV를 보고 있었지만 아무 소리 듣지 못했다 대문 앞을 쓸던 노파가 가리킨 곳, 꺾여진 맨드라미 해거름 붉은 언덕이었다 머리끈이 풀어진지도 모른 채 달리던 여자, 달리다 숨이 막혀 무릎이 꺾였을 때 발견했다 그때 나는 막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단다 바람에 섞인 희미한 재잘거림, 누군가를 한없이 부르고 있는 소리, 귀를 막고 쓰러져, 여자, 한동안 눈을 뜰 수 없었다 세상은 잠시 깜깜해졌는데 분명한 건 내가 여자를 원망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는 것이다 언덕을 뛰어올라가 어디 가느냐고 악을 썼던 여자, 그때 내가 “잠자리 무덤에요”라고 말했다는데 지금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손을 이끌었을 때 나의 손바닥은 잠자리 날개처럼 무수한 실금들로 가득한 채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잠자리 무덤」 전문
이 시는 마치 「이상한 구멍을 보았다」와 같은 사건을 두고 달리 쓰였거나, 비슷한 다른 경험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람에 섞인 희미한 재잘거림, 누군가를 한없이 부르고 있는 소리”의 주체는 분명하지 않다. 희미하게 재잘거리고 누군가를 한없이 부르고 있는 것은 소년일까, 앞의 시에서 보았던 그 “눈감지 못한 영혼”일까. 그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은 여자일까, ‘나’일까. 소년 자신은 기억할 수 없는 “여자를 원망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는” 장면에는 어떤 맥락이 있는 것일까. 그는 그때, “젊어 사라졌다는 삼촌”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나’의 이처럼 홀린 듯한 발걸음은 현실세계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몽유병 환자의 그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신내림은 모계유전이다. ‘나’는 ‘소리’에 홀리고 ‘여자’는 ‘나’에 홀린 것처럼 보인다. 이 홀림의 선분 끝, 가닿지 못한 종착지에 “잠자리 무덤”이 있다.
잠자리 무덤
「이상한 구멍을 보았다」에서 “검은 잠자리”가 소년을 안내하는 전령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상기해 보자. 서양 민담에서 잠자리는 통상 악마가 타던 말이라느니, 악마의 바늘, 눈 찌르개라는 등의 사악한 소문들과 관련된다. 스웨덴 민담에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악마가 죽은 사람 영혼의 무게를 달 때 잠자리를 썼다고 한다. 그 같은 소문들은 잠자리가 곤충치고는 꽤 큰 데다 불길한 이름을 지닌 탓도 있으리라. 그것의 영문 이름은 ‘용파리’가 아닌가. ‘용’의 서구에서의 악명 탓에 잠자리는 억울하게도 악마의 진용에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잠자리는 유년 시절에 우리더러 잡으라고 가만히 앉아 미동도 없이 유혹하던 친숙한 동무다. 살금살금 다가가 날개를 휙 낚아채 두 쌍의 길고 잘생긴 바스락거리는 투명 날개를 검지와 중지로 잡고, 정면으로 해를 보이면 눈이 먼다든지, 사마귀가 난 곳에 대면 뜯어먹는다든지 하는 소문을 재잘거리며 손가락 사이에서 흐른 땀이 날개를 구길 때까지 데리고 놀곤 했던 것이다. 마침내 차라리 그 나는 모양이 보고 싶어 담벼락 위에 놓아주기라도 하면 잠자리는 안타깝게도 거기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날개를 말리고 있었던가.
이 친숙함도 친숙함이거니와, 물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잠자리는 우리를 고양시킨다. 우리말에서 잠자리는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 우리가 이것을 발음하기 전에 문자로 접하게 되면 마치 미래형 시제로 죽음이라는 숙명을 예고하는 것 같기도 하고(‘언젠가 너는 잠들고 말 것이다’) 죽어서 잠들 자리, 무덤을 은유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후자로 해석할 때 “잠자리 무덤”은 ‘잠자리의 무덤’일 뿐 아니라, ‘잠자리([잠짜리], 누울 자리)=무덤’으로 읽힌다. 잠자리를 따라 잠자리로 달려가는 이 소년의 잠 속의 꿈처럼 잠 자체도 영원한 잠을 향해 있다. 소년은 열병을 앓으며 혼곤한 잠 속을 가로질러 눈 크고 절도 있는 곤충의 비행을 따라 자꾸만 ‘저쪽’으로 넘어가려 한다. 그 경계에서 돌아올 때마다 소년은 비늘을 벗고 탈피하거나, 잠자리 날개의 실금처럼 반짝이는, 땀으로 빛나는 자신의 손금을 보며 잠자리와 동화되었던 흔적을 발견한다. 어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잠자리를 맑은 물, 혹은 시련 후의 재생이라 부른다.
May We Rest in Peace
‘잠자리 무덤’은 마치 초현실주의자 온라인 정모 공지 같은 시 「초대」에서도 방문 예정지로 나타난다. 소년의 ‘잠자리 무덤 사건’에 대한 기억이 사실이라면, ‘잠자리 무덤’은 오랫동안 그의 무의식 지대 깊은 곳을 건드리는 키워드였던 듯하다. 「잠자리 무덤」이 고열 상태의 상기(想起)처럼 보이는 반면 「초대」는 이미 몽환이 삶의 일부가 된 이후의 시 같다. 이불, 이부자리-꿈-잠자리([잠자리], [잠짜리])로 이어지는 박상수의 몽환의 연결고리들은 자궁-요람-무덤처럼 생의 처음과 끝을 잇고 있는데, 꿈은 여기 어디쯤에서 시작되어 또 어디쯤에서 끝난다. 아니, 요람과 무덤 사이는 실상 꿈-몽상을 바탕으로 구조화된 현실이다. 마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우리의 기억들이 우리 자신을 구조화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현실은 이부자리 바깥에 있지만, 어느 틈엔가 그가 경험한 현실은 이부자리 안으로 들어와 오븐 속의 빵 반죽처럼 서서히, 몽상적으로 부풀어 오른다. 그리고 이 열병과 환각은 삶과 함께 다시 짜여진다. 그리하여 여러 번 경험한 그의 잠-죽음은 불길한 함의가 휘발되어, 그가 시에 쓰고 있는 ‘죽음처럼 고요한 잠-꿈’에 대한 이미지들은 적막하지만 매우 평화롭기까지 하다.
땅속에 잠자는 애벌레처럼 우린 싸여 있어요 단풍잎은 따뜻하구요 손에 쥐면 손톱이 물들죠, 혹 너무 멀리 온 걸까요? 연기도 보이지 않고 발자국 소리도 없어요 당신이 이끄는 대로 좇아왔지요 단풍나무 구멍 속에는 딸기 잼을 넣어두었구요 우린 맨발을 낙엽에 파묻고 책을 읽어요 머리칼은 이마를 가리고 바람이 잘 익은 냄새를 풍기거든요 마을 쪽에서는 아무도 모르겠지요? 우린 계절이 다 가도록 바스락거리는 소릴 들을 거예요 배가 고프면 잼을 꺼내먹죠 단풍향이 도는 나무 딸기 잼.
-「나무 딸기 잼」, 전문
이 시는 이부자리-꿈-잠자리의 완벽한 일치를 보여준다. 이 시를 여러 번 읽고 있으면 살갗에 와닿는 서늘한 가을 공기, 낙엽과 단풍나무 즙 향이 감도는 (맡아본 적도 없는) 나무 딸기 잼의 달콤한 향기, 귀먹은 듯 적막한 숲 속에서 간혹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등 가을 특유의 쓸쓸한 감각적 이미지들과 화자의 도저한 초현실적 목소리 때문에 아름다운 슬픔에 휩싸이게 된다. 계속해서 읽고 있으면 이 가을 숲 요정의 것 같은 목소리가 아무래도 ‘마을 쪽’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자의 것이라는 게 점점 확실해지고, 적막함이 자꾸만 자라나는 것이다. 이 시에 서려 있는 향기롭고 달콤하면서 서늘한 아름다움은 ‘우리’가 “땅속에 잠자는 애벌레처럼” “싸여 있”기 때문에, 잠자리와도 같이 평화롭고 깊이 잠들어야만 가능한 꿈속에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는 아무래도 영혼들만의 세계. 여기는 아무래도 불가능해서 아름답고, 불가능해서 아름답다는 걸 알자마자 슬퍼지는 세계.
그러나 꿈은 요람과 무덤 사이, 걸어다니는 현실 속에도 스며 있다.
아무래도 나는 6월이 좋아 나무들이 수맥을 고르는 저녁을 기다리네 또옥또옥 문을 두드려도 오토바이 머플러 소리에도 움직이지 않네 세상은 좀 더 익은 복숭아처럼 연해졌을 때 계단을 뛰어 백열등 구멍가게 들러 남아프리카 공화국 통조림을 고르네 보르네오, 아라비아 반도를 지나 푸른 심해의 범선을 타고 가는 여행, 부푼 돛폭도 좋아 하얗게 나는 부풀다가 통조림 속살거림을 들었는데 아주 먼 곳에 있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그곳에 한 번도 가보진 못했지만 6월의 난간에 매달려 소리도 지르네 아직은 달려가는 꿈, 열대 사바나의 숫누우처럼 허벅지를 부풀리며, 그곳은 어디일까 분쟁이 사라졌다는데, 평화란 부드럽고 따스한 신뢰 같은 것 단물에 둘러싸인 조용한 잠 같은 것, 초여름 풀물이 발자국을 만들고 있지 나는 남아프리카 대지 위를 흥얼거리며 걷다가 통조림을 안고 어스름 동네를 돌아오네 이제는 정말 행복이 시작될거야 투명한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포옹을 나누네 됐어, 내 꿈은 먼 곳에서 왔지만 언젠가 유효할 믿음, 경이로운 꿈 같은 것 세상은 온기가 감도는 작은 달걀처럼 내 품에서 숨을 쉬네 나는 통조림을 가슴에 품고 돌아와 창문을 열고, 묵은 공기가 어울리기를 기다려 먼 땅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떠올리며 통조림을 먹는다네.
-「남아프리카 공화국 통조림」 전문
몽상은 소년이 사내가 된 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유년의 몽상과 달리 통조림을 사러 다녀오는 사내의 몽상은 이제 평화, 행복, 믿음 같은 이상(理想)의 어휘들을 거느린다. 이 귀엽고 진지하고 선한 시는 이 같은 이상의 어휘들이 남아프리카 산(産) 황도 통조림의 빛깔과 질감과 향기와 완벽하게 조응하면서 완성된다. “그곳은 어디일까 분쟁이 사라졌다는데, 평화란 부드럽고 따스한 신뢰 같은 것”, 이불 같은 “단물에 둘러싸인 조용한 잠 같은 것”, 황도 빛으로 물든 6월의 해질녘, 분쟁이 사라졌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평화를 기원하면서, “이제는 정말 행복이 시작될거야”라고 중얼거리면서, 그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내 꿈은 먼 곳에서 왔지만 언젠가 유효할 믿음, 경이로운 꿈 같은 것 세상은 온기가 감도는 작은 달걀처럼 내 품에서 숨을 쉬네”. 그러니까, 그는 이불 속에서 부푸는 꿈으로 자기를 만들고, 그 스스로 이불처럼 세상을 품기도 하는 것이다. 그의 시가 많은 이미지들로 직조되어 있을지라도 거짓이 없다는 것, 제스처나 포즈가 없다는 것은 그가 ‘잘 산다는 것’을 ‘잘 잔다는 것’, ‘잘 죽는다는 것’과 동일하게 여기기 때문일 터이다. 그가 더 잘 꿈꾸기 위해, 더 잘 깨어나기 위해, 오늘도 남들보다 혼곤한 잠을 걱정 없이 두 시간쯤은 더 잤으면 좋겠다.
후르츠 캔디 버스
<후르츠 캔디 버스>는 조용히 달려왔다. 버스에는 내가 아는 것도 같고 모르는 것도 같은 어떤 소년과, 이 소년이 아는 것도 같고 모르는 것도 같은 다른 어떤 사람, 그리고 피곤에 지쳐 졸음과 싸우는 사람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 소년이 아는 것도 같고 모르는 것도 같은 다른 어떤 사람은 당신 같기도 하고 나 같기도 했다. 그는 후르츠 캔디 상자 뚜껑을 열고 사탕을 집어 소년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빨갛고 노란 향기가 흘러나왔다. 소년의 집은 숲 근처라고도 하고 언덕 근처라고도, 호수 근처라고도 했다. 소년의 집은 어쩌면 수도원일지도 몰라.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수도원 근처엔 숲도, 언덕도, 호수도 있을 것만 같으니까. 그리고 저런 소년도. 소년은 꿈꾸는 듯했지만, 눈빛이 밝고 진지했다. 소년은 이 버스의 종착역, 잠자리 무덤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잠자리들도 무덤이 있니?” “그걸, 정말, 모른단 말인가요? “거긴 죽은 산호가 파도를 막아주고 상어를 막아주고 막 빛나는 곳”(「트링클 스타」).” 소년은 이미 여러 정류장에 내렸었지만, 앞으로도 이 버스의 모든 정류장에 내려볼 셈이라 한다. 소년은 어쩌면 다른 버스를 갈아탈지도 모르지만, 종착지를 잊어버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