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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더하는 친절

 

궁금해

사람들이 자신의 끔찍함을

어떻게 견디는지

 

자기만 알고 있는 죄의 목록을

어떻게 지우는지

 

하루의 절반을 자고 일어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흰색에 흰색을 덧칠

누가 더 두꺼운 흰색을 갖게 될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은

어떻게 울까

 

나는 멈춰서 나쁜 꿈만 꾼다

 

어제 만난 사람을 그대로 만나고

어제 했던 말을 그대로 다시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징그럽고

다정한 인사

 

희고 희다

우리가 주고받은 것은 대체 무엇일까

-캔들전문.

 

안미옥의 시는 여러 번 꼼꼼한 퇴고를 거친 듯한 간결한 언어로 쓰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종의 애매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 시의 전반적인 정서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대부분의 진술들은 명확하고 화자는 자신의 끔찍함을 견디는 사람들, 자기만 알고 있는 죄의 목록을 지우는 사람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한 인간의 위선에 관해 생각한다. 아니, 사람들이 자신의 (견딜 수 없는) 끔찍함을 견딘다는 생각, 자기만 알고 있는 죄의 목록을 지우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 아무튼 울 것이라는 생각은 실은 화자의 것이다. C. S. 루이스의 말마따나 지옥은 지옥의 관점에서 볼 때 지옥이 아니라 천국의 관점에서 볼 때 지옥일 것이며 오직 저주받은 자들만이 자기 운명을 그렇게 못 견딜 상태는 아닌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일 것이므로, ‘그들이 자신의 끔찍함을 정말로 어떻게든 견디고 있는지, ‘그들이 정말로 자기의 죄의 목록을 인식하고 지우려 하고 있기는 한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 정말 아무러했어야 하는지를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궁금증은 궁극적으로 도덕적 주체의 것이다.


도덕이라는 말에 소스라칠 필요는 없다. 이 시의 화자가 도덕적 주체라는 말은 그가 수치심과 죄책감에 물들어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고, 수치심과 죄책감이 특정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됨을 구성하는 문명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임을 각인하고 있는 자라는 뜻이다. 그는 첫 연 첫 행에 던진 궁금증의 표명으로 이 시를 이끌어가고 있는데, 이 궁금증이 내포하고 있는 의혹사람들은 사실 자신의 끔찍함, 죄의 목록, 참회의 울음을 외면하고 있을 것이라는은 그의 지속적인 악몽의 내용을 이룬다. “나는 멈춰서 나쁜 꿈만 꾼다”.


하루의 절반을 자고 일어나도/사라지지 않는것이 타인들의 끔찍함과 죄의 목록인지, 그에 대한 화자의 궁금증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실은 이 분명하지 않은 지점들은 그들 모두를 지칭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장치일 것처럼 여겨진다. “사람들이라고 인간 일반을 지칭하고 있지만, 그들은 의 거울상처럼 여겨진다. 이 악몽 속에서 정지한 채 혼자 타오르는 촛불이 자기를 깎아먹으면서 촛농을 쌓아가는 일은, 주위를 밝힘, enlighten-ment(따라서 계몽)이나 드러냄-詩作(따라서 계시), 혹은 자기를 태우는 희생 따위의, 촛불에 대한 우리의 관습적인 연상(그러한 관습적인 의미들은 결과적으로 타인에 의해 주어질 수는 있겠으나 자기 자신에 의해 부여될 수는 없다) 대신 무용한 발화(發火/發話, 그것도 모놀로그에 그칠지 모를), 타인의 무도덕에 대한 지속적이고 강박적인 의혹과 참아진 분노를 통해 역설적이게도 자기 죄를 은폐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더욱 더 강력해지는 수치심과 죄책감의 더께라는, 시인 고유의 개인적 상징으로 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희고 흰 촛농의 더께는 이처럼 알 수 없는 타인과 표면적으로는 지리멸렬하고 평온한 반복적 의례(“징그럽고/다정한 인사”)로서의 텅 빈 소통을 통해 우리가 주고받은 것의 결과인데, 이것은 한편으로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한 현상유지의 방편이기도 하다. 한 행으로 처리된 징그럽고는 앞과 뒤에 모두 걸려 있다. 반복 재생하듯 되풀이되는 동일한 타인과 나누는 동일한 말들많은 사람들이 평온한 일상이라고 부를다정한 인사로 압축되는데, 따라서 이 반복이 징그러운 것은 소통이 동일성으로 고박되고 친절이 사랑을 대체했기 때문은 아닐까.


이 시를 안미옥의 첫 시집에 대한 전체적인 감상을 제시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이 시인의 시가 짓고 있는 다정한 표정과 그 속에서 불가피하게 늘 비칠 수밖에 없는 순간적인 불편한 감정이야말로 그의 시가 가장 감추고 싶은 것이자 그 속에서 가장 발견되기를 열망하는 어떤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조용히 진행되는 부패가 온화한 낯짝을 하고 있다는 직관이 이 시인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집의 몸을 아우르는 제목으로 선택된 이 내게 주는 인상은 따뜻하고 감성적인 찬찬한 통찰이라는 세간의 평판보다 이미 것들로 가득 찬 세계의 어지러운 부패의 냄새 속에서 자기의 마음을 지키려는 안간힘에 가깝게 느껴진다.

 


다친 것과 상한 것

 


상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성장에 바쳐지는 대가이기도 하다. 불현듯 뭉개지면서, 우리는 자라고 있다”(매일의 양파)는 깨달음, 이 깨달음이 연을 바꾸어 생각을 많이 할수록 우리는 없어져갔다는 진술로 대체되는 것은, 근대 이후 코기토가 몹시 의심스러워진 오늘날, 우리의 자아가 문화의 코일”(리처드 로티)에 불과하다는 탈근대적인 반정초주의의 일반화가 비로소 얻은 시적 표현인가, 혹은 생각이 유일한 주업인 근대적 주체가 극한까지 이 일을 밀어붙였을 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사라져간다.’는 역설과 마주치는 초근대적인 자살에 대한 진실의 발견인가. 어느 쪽이든 끊임없는 생각과 함께 진행되는 부패는 우리의 즙 많은 부분을 뭉개고 팔다리만 자라게 하면서 냄새나는 텅 빈 덩어리를 상한 마음의 모양으로 남긴다. 이 시를 비롯해 많은 다른 시편들에서 반복되고 있는 부패의 이미지들은

 

도마 위에 방치된 생선이나

상온에 오래 놔둔 두부처럼

상한 것은 따듯하고

상한 것은 부드럽게 부서진다

-톱니부분.

 

는 짐짓 중립적인 관찰자의 시선에서 보이듯 지독한 냄새를 제거해야만 가능한 긍정을 그가 감내하고 있음을 다양하게 표시한다. 쉽게 상하는 것들은 연하고 부드러우며 방치된 것들, 그리고 이미 한 번 상한(다친) 것들이다. 상한 것들은 촉각만으로는 다만 부드럽고 따뜻할 따름이다. 악취는 기록되지 않는다. 그것은 고통당하는 무력한 주체가 자신의 고통에서 부패를 연상할 수밖에 없는 어떤 사정과,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하기 위해 고통의 주관적 표현들 대신 중립적 묘사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곤혹을 지시한다. 톱니에 의하면 이 고통은 아주 오래 전에 시작되었고(“어린 나는/무너지는 마음 안에 있었다”, “한번 상하고 나면 다음은 쉬웠다”), 부패의 징후를 곧잘 알아채는 곳은 집안에서다(“집에선 화분 썩는 냄새가 났다”, 물컵부분.)


상한 마음의 주체는 고통에 대한 주관적 묘사를 스스로에게 금지했기 때문에 관찰자의 시선을 고수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일까? 간혹 튀어나오는 우리는 자라서 시체가 될까/제대로 말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파고) 같은 나지막하고 외삽적인 독백들만이, 상처-부패의 연상으로 이루어진 기이한 일체성으로부터 발원하는 압도적인 불안을 짐작하게 한다.


방치된 상한 마음의 주체는 방치되어 맛이 간 식재료를 삼킬 수 있게 변용시켜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 감내의 숙련 과정을 영원히 거치고 있다.

 

부드러운 우유와 설탕이 녹을 수 있는 온도

한순간을 태워버리지 않는 용기로

굳은 식빵을 끓여 먹는 요리법

 

나는 매일 연습하고 있다

어제와 다른 맛이 난다

-굳은 식빵을 끓여 먹는 요리법부분.

 

이 숙련 과정은 너무 끓어오르지 않음으로써 적당한 온도를 유지한다는 중용의 기술을 연마하는 과정이다. 끓어 넘치지 않도록 조절하는 일에 용기가 필요하다는 그의 통찰은, 자기 절제를 연습하는 일이 이미 내적으로는 끓는점을 자주 예감하는 자의 상시적인 수련 과정임을 숙지하고 있는 데서 비롯한다. 다친-상한 자의 내부에 축적된 공격성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삭힌분노는 어떻게 온화한 장식을 얻게 되는가. 심지어 부패의 진행을 늦추고 모습을 온전히 유지하기 위해 초절임을 선택하는 다음과 같은 시는 어떤가?

 

풀숲에서

나는 피클병을 들고 서 있다 이제 막 궁금함을 가진 사람이 되어 투명한 잎을 찾고 있다

 

집에서는 한사람씩 투명을 흉내 내고 있었다 둥글게 떠오르기 위해 쏟아내는 말들

썩은 나무토막을 들추면 연한 살갗의 애벌레들을 볼 수 있다

 

나는 풀숲 안으로 들어가 앉는다

 

가장 좋은 장소에 숨은 물고기처럼

뒤집힌 비행기처럼

 

이곳이 마지막 장소야

펄펄 끓는 식초 냄새

 

주머니 속엔 작은 핀셋이 들어 있다 흙은 맨발을 벗겨낸다

가만히 알 수 있었다

 

식물의 끝에는 하얗고 부드러운 뿌리가 있다

-식물표본집전문.

 

이 시는 풀숲에서 식물표본 만들기와 집안에서 피클 만들기를 겹쳐놓고 있다. 아마도 풀숲에서 식물표본을 만드는 상상은 부엌에서 피클을 만드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채집될 식물을 액침할 용액으로 실제 사용되는 알콜이나 포르말린이 아니라 끓는 식초를 선택한 데서 드러난다. 화자는 쉽게 무르고 마는 연약한 식물들의 부패를 늦추는 초절임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연한 식물들처럼 상처받기 쉬운 집안 구성원들이 절여지는 과정을 관찰하고, 자기의 액침-초절임의 장소(“이곳이 마지막 장소야”)로 풀숲-집안에 들어가 앉는다”. 부패하든 절여지든 그것은 분명 살아있는 상태는 아닐 것이라서, 마지막으로 식물의 끝에서 발견하는 하얗고 부드러운 뿌리는 종말을 앞두고 있다. 이 차가운 시선에 입혀진 온화한 어조는 삭힌분노의 맛이 아닐까?

 


잔인성에 대항하는 냉정함


 

처음도 없고 끝도 없다

멀어지는 것에서 멀어지면서

 

너는 작고 분명한 나사를 찾고 있다

나는 크고 뭉툭한 해머를 들고 있다

 

울고 있는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는 눈

 

그것은 빛나고

그것은 무서운 눈

 

울음 안에 있는 것을 보지 않는다

 

네가 먼저 잠들고, 내가 잠들지 못할 때

불 꺼진 자리에 내가 앉아 있어야 할 때

 

나는 어둠속에서

감은 눈을 보고 있다

태어난 이후 어느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너의 물건으로 둘러싸여 있는 너는

나의 물건으로 둘러싸여 있는 나는

 

계속해서 반대쪽을 향해 말하고

우리는 점점 더 다른 사람이 되겠지

 

안에서 잠가도 잠기지 않는 말

마음을 정하는 것과 상관없이

어떤 문장은 남는다

 

네가 울더라도 나는 네 옆에서 잘 수 있어

네가 하는 말이 간혹 들릴 때

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감 꼭지를 자른다

 

하얀 접시 위에

잘 잘린 감을 내어놓는다

-비정전문

 

다치게 하는, 가학적인 눈에 관해서였다면, 그리고 그것이 가하는 고통에 관해서라면, 이 시는 전반부에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시의 중반부, “나는 어둠속에서/감은 눈을 보고 있다감은 눈으로부터 후반부의 조용한 복수는 시작된다. 돌연 감은 눈에 대한 분노는 =이라는 연상을 거쳐 감(꼭지)으로 전이된다. “네가 울더라도 나는 네 옆에서 잘 수 있어라는 말은 분노의 도화선에 불을 붙일 만하지만 만일 끓어오른다면이제까지의 수련은 모두 헛일이 될 것이다. 굳은 식빵을 먹을 만하게 만들 줄 아는 자라면 응당 한순간을 태워버리지 않는 용기를 발휘할 때가 이때이다. 우는 사람의 옆에서 잘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 울고 있는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는 눈의 소유자는 결코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찌를 수 없는 사람이다.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참회가 불가능한 것이라면, 바로 그 때문에 고통당하는 자의 분노는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는가?


그는 감은 눈=의 연상에 따라 여러가지 방법으로 감 꼭지를 자른다//하얀 접시 위에/잘 잘린 감을 내어놓는다”. 감은 눈의 주인이 이 연상의 과정을 모른 채 하얀 접시 위에 놓인 잘 잘린 감을 무심하게 집어먹을 다음 장면을 상상하는 독자에게, 이 절제된 시어들은 그 자체로 잘 잘려 놓인 감처럼 정돈된 분노임이 분명해진다. 재현의 표면에서 이 장면은 밀접한 타자와의 다툼상처표면적 화해일상으로의 회귀라는 소소한 일화의 기승전결을 그리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은 고통당한 자의 세심하게 계산된 상징적 복수라는 함의를 지닌다. 과일을 깎아먹는 단란한 의례는 상징적인 카니발리즘의 현장이 된다. 박해한 자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제 살을 먹게 하는 카니발리즘. 이때 비정한 쪽은 어느 쪽인가?


잔인성은 박해받는 자로 하여금 무서운 생각을 하게 만든다. 무서운 생각이 언제나 곧장 무서운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세계 전체를 위해서는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하지만 무서운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 무서운 생각은 곧잘 상징적인 수수께끼 속에 벼려진 시어들을 긴장 속에 직조하기도 한다. 하얀 접시 위에 놓인 잘 잘린 감처럼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다. 우리가 그의 시어들을 취해 맛볼 때 간혹 섬뜩한 느낌에 빠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부드럽고 따뜻하게 혀 위에서 녹는 것이 그의 상한 마음과 우리 자신의 감은 눈이라면, 씹을 새도 없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게 요리한 그의 눈물겨운 오랜 수련이 남기는 이 뒷맛을 어떻게 그저 소비해버릴 수 있겠는가. (끝)

-계간 <파란> 2017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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