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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시인론

奇亨度.◨奇形圖.

 

 

그것은 아무래도 추상어일 것이다. 짧은 생애를 가졌던 어떤 정신과 감각의 덩어리를 추상화하여 명사로 만든 것. 그것은 아무래도 예술사의 어느 시점에 새로 생긴 어떤 사조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그 사조에 스스로 속했다고 생각한 내성적인 사람들은 오랜 우울로 인한 무감각을 묘사하기 위해 주로 겨울날을 흑백의 배경 속에서 다루었으며 채도보다는 명암을 통해 음화를 그렸다. 따라서, 의도치 않게 대담한 그림을 생산해내는 경우가 있었다. 도시의 암울한 고독과 아직 중간관리자가 되지 못한 젊은 사무노동자의 실존적 불안, 가로수처럼 도시에 아주 약간 남은 자연물들의 위압적이거나 계시적인 침묵과, 주기가 긴 변용 속에서 불길한 징조를 자주 발견했으며, 오래 전에 자기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죽은 자신을 애도하는 데에 청춘을 바쳤고, 언젠가 살아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애써 회상해낸 시점은 언제나 슬픈 유년의 섬약한 꿈에서 멈추었다.

 

세차게 흐르는 개천의 수면이나 쏟아지는 폭우 속 빌딩 유리창 같은 거친 영사판 속으로 빠져들면서, 너무 많이 돌려 훼손된 추억의 필름이 상영하는 스크래치 가득한 자기의 일생을 거듭 관람하면서, 이 사조는 탄생한다. 그것은 묵시적인 명상의 결과인데, 기이하게도 종말적 미래라기보다 이미 끝난 현재의 연속에 관한 것. 그러므로 이 사조에 속한 그림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 사조를 만들어낸 사람이 우회적이고 간접적으로만 표현할 수 있었던 어떤 비전에 우리는 도달하게 된다.

 

이번 생애가 악몽이라는 것. 소리쳐도 깨어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표면적으로 갑작스럽게 우리의 삶이 끝난다 해도 그 무슨 놀랄 일이 아니라는 것.

 

그 죽음의 기형적인 도상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우리는 신비 없는, 그렇고 그런 세계의 어른이 된다. 그 사조는 내향적이고 예술적인 영혼이 반드시 한 번은 죽었다 깨어나는 개체발생의 필연적인 어떤 국면—임사체험을 이른다.(끝)

-<보그> 2019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