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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벌레의 눈과 새의 눈

 

 

16세에 학교를 뛰쳐나와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대영박물관에서 다방면에 걸친 독서를 통해 독특한 사상을 펼친 콜린 윌슨은 제도화된 학문분과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이른바 ‘B급 관심사’들을 진지한 학문적 주제와 더불어 고찰하기로 유명한 작가이다. 그는 인류의 범죄사를 서술한 『잔혹』이라는 책에서 줄리언 제인스의 ‘분리 뇌’에 관해 논하고 있다. 내용은 이렇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현생 인류의 대뇌는 우반구와 좌반구로 분리되어 있으며 그 사이를 두툼한 뇌량이 연결하고 있다. 좌뇌는 언어와 논리적 사고를, 우뇌는 직감과 패턴의 인식을 담당한다. 간단히 말해 좌뇌는 과학자, 우뇌는 예술가이다. 문자가 발명되기 전의 오래된 우리의 선조는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이 지극히 작거나 없어서 두 개의 뇌가 동시에 가동되곤 하였다. 가령, 부족 간의 전투에서 위험에 처했을 때 좌뇌는 퇴로를 살피거나 적의 가슴팍에 명중시킬 화살촉을 찾는다면 우뇌는 “적의 심장에 피의 불벼락을 내리자!”라든가 “저 숲의 오솔길로 달아나라!”라고 환청을 통해 명령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자가 발명되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호모 사피엔스라는 ‘뇌량’이 발달한 인류가 나타나 보다 계산적이고 현실적이며 냉혹한 행위들을 가차없이—그리고 ‘내면의 목소리’ 없이— 저지를 수 있게 된다. 우뇌와 좌뇌는 서로 동조하는 대신, ‘역할 분담’에 들어가고, 말하자면, 금전출납을 정리하는 피곤한 시간에는 “돈 없이도 가능한 행복을 모색하라!” 같은 우뇌의 목소리 따위는 울리지 않게 되며,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정신의학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제인스는 오늘날의 분열증자, 시인, 영매가 대뇌의 양반구가 완전히 분리된 이전 인류의 후예들이라고 생각했다.) 이 ‘동조하지 않는’ 대뇌의 상태가 인간의식의 진화를 이끌어왔으며, ‘자의식’의 발생에 빚지고 있다는 것이 제인스의 주장이다. 콜린 윌슨은 좌뇌에 ‘벌레의 눈’이라는 별칭을, 우뇌에는 ‘새의 눈’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벌레는 끊임없이 땅을 들여다보며 생존을 모색하지만 새는 만사를 멀리서 조감한다. 이 같은 두 개의 시야가 동조하지 않고 ‘벌레의 눈’으로만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현대적 범죄에서 드러나는 공통적인 동기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반구의 뇌가 항상 동조하고 있던 먼 옛날이 좋았던 날들일까? 어쩌면 서정시의 전통적인 개념으로 서술되곤 하는 “세계의 자아화, 자아의 세계화”라든가 “자아와 세계의 일체감과 동일성” 같은 것은 그러한 향수를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양반구가 동조하여 평형을 이루게 되면 깊은 몰입에 빠진 요가 수행자처럼 현실의 모든 감각이 일깨워지는 동시에 ‘나’의 존재가 세계와 구분되지 않는 상태 속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니까 말이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좌뇌의 자의식과 우뇌의 직감이 번갈아 교호하며 씽크가 안 맞는다고 비난해대는 소리를 노상 듣고 있는(이 “듣고 있는”은 물론 비유다) 오늘날의 우리는 면벽 수행이나 참선을 주기적으로 수행하지 않고서는 영원히 분열적인 (적어도 두 개의) 나로 찢어져 고통 받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콜린 윌슨도 아마 비슷한 질문을 떠올렸던 것 같다. 그는 이런 의문에 대해 곧 스스로 이렇게 답해 놓았다. “틀림없이 인간의 역사에는 동조하지 않게 하는 능력이 결여된 단계가 있었다. 이것에는 술에 취한 것과 같은 이점이 있었을 것이다. 해방감, 귀속감, 세계와 함께 있는 일체감 등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현순간에서 자신을 분리하는 능력, 또는 본능을 물리칠 능력이 없다는 사실도 의미한다.” 종종 낭만주의적인 예술관에서 ‘자기를 잃어버리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되어’ ‘뜻 모를 신의 말을 받아쓰는’ 상태를 천재로 칭할 때, 우리는 그러한 상태에 대한 호기심과 향수를 느끼고 ‘양반구가 동조하는’ 하늘이 준 능력을 지속하고 싶어한다.

 

어쩌면 타락 이전의 에덴도 이 같은 향수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의 지속이란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 자의식 없는 아담과 이브의 사랑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을 것이다. ‘타인이 지옥’이라면, 자의식이 생긴 우리가 ‘내 안의 타자’ 같은 개념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지옥이 다름 아닌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말은 곧, 우리가 알게 된 사랑이 부끄러움을 아는 자의식의 죄로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역설이 우리로 하여금 현대 예술의 분열이 단지 골치 아픈 현란한 속임수가 아니라 죄 없이는 불가능했을 사랑과 모종의 연관을 맺고 있으리라는 짐작을 가능하게 해준다. 물론, 벌레의 눈은 종종 새의 눈으로 환기되어야 한다. 보다 자주 환기되어야 한다. 자기 안의 지옥에 골몰하느라 세계의 실감을 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진짜 지옥일 테니까 말이다.(끝)

-2018년 1월 <서울예대학보>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