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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그가 아직 평론가가 아니었을 때

 

 

아, 이런 글을 내게 맡기다니 반칙이다. 시인의 커버스토리라면 시를 인용할 수 있었겠지. 시를 인용한다면 10-20매는 그냥 넘어간다. 하지만 평론가의 커버스토리라니. 게다가 강석이 형은 너무 친한 선배라 어디까지 써도 좋을지 감도 오지 않는다. 형의 책들을 죄다 읽어볼까, 하다가 며칠이 가고, 형의 논문들을 읽어볼까, 하다가 또 며칠이 가고, 원고청탁서에 쓰인 대로 어린 시절과 문청시절을 취재해볼까, 하다가 며칠이 가고, 그렇게 마감일을 두 번이나 넘기고서야 빈문서 앞에 앉는다. 아무래도 나는 평론가 조강석에 관해서는 쓸 자신이 없는 것 같다. 연구자 조강석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벌써 오랜 시간 평론과 논문에서 이미지론을 심화해온 터라 그 내용을 어설프게 해설해봤자 그의 평론 한 편을 지긋이 읽는 것이 나을 일이다. 나에게 조강석은 언제까지나 나와 세미나 같이 하던 강석이 형이고 신촌 <폴리스>나 <마리아>나 <도어스> 같은, 지금은 없어진 3음절짜리 맥주 집에서 취하면 가위바위보를 청하거나 뜬금없이 너 누구냐고 물어오거나 검지와 중지를 붙이고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붙인 뒤, 너 이거 할 수 있냐고 물어보던 강석이 형이라서, 강석이 형이, 말은 안 해도, 내 시보다 나를 더 좋아하는 것처럼(이것은 실례가 아니다), 나는 형의 논문이나 평론보다 형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이것은 실례가 아닐까?), 같이 책 읽고 술 마시고 놀던 시절 이야기를 소소하게 하는 것으로 이 부담을 덜어볼까 한다.

 

#1. 둘둘치킨

 

강석이 형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내가 석사 수료 후 출판사, 영화잡지사 등을 짧게 다니다 다 때려 치고 재즈 음반 작사를 하다가 음반 작업이 엎어지고 번역을 하다가 출판사가 망하고 드럼을 배우다 그만 두고 몇 번의 연애도 망하고 그러면서 세월만 흘러 에라, 모르겠다 등록금이 아까우니 학위라도 따야겠다고 석사 논문을 쓰다가 으음, 궁금한 게 자꾸 생겨 박사과정에 진학해야겠다고 충동적으로 결정하는 바람에 다시 학교에 발을 들인 후였다.

 

그러니까 그게 2004년 무렵이다. 박사과정에 진학한 후 나는 이전부터 해왔다는 철학세미나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강석이 형을 비롯한 선후배 동료 몇 명과 R. 샤하트가 쓴 『근대철학사』를 읽었다. 말하자면, 이 책은 이 세미나의 주교재였는데, 데카르트에서 칸트까지 다루고 있는 각 챕터와 함께 주요 원전을 꼼꼼하게 읽어나가는 것이 이 세미나의 목표였다. 내가 합류하기 이전에 멤버들은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를 끝낸 상태였고 나는 로크부터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나에게는 철학에 대한 미운 친정집에 대한 노스탤지어 같은 감정이 늘 있었기 때문에 이 세미나가 있는 것이 큰 행운이었다. 그 무렵의 나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아주 오래 전부터 플라톤이 이미 죽은 자기 스승의 입술을 빌려 2400년 전쯤에 이야기한 “문학과 철학 사이의 오랜 불화”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본 강석이 형은 조용한데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이건 좀 형용모순처럼 느껴질 수 있는데, 그가 결코 말수가 적은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말투가 조용하고 늘 예의바른 선비 느낌이 있었기 때문에 말끝마다 ‘재미’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도 등단 후에 한동안 ‘조목사’로 불리울 정도로 점잖은 인상을 주었다. ‘재미’는 지금까지도 우리가 나누는 인사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토록 틈만 나면 인생과 세계의 아이러니들의 일단을 찾아 재미의 태그를 달면서 인문주의적이고 교양에 찬 정중하고 예의바른 선배가 어딘가 몹시 내성적인 유년의 그림자를 배후로 삼고 있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았던 것 같다. 포스트시즌 무렵이었나, 세미나가 끝나고 뒤풀이를 하러 간 학교 앞 둘둘치킨에서 나는 그에게 정색하고 질문한 적이 있다. 형, 원래 이렇게 웃기는 사람 아니었죠?

그는 대답 대신 헛, 하고 헛기침을 한번 한 다음 닭튀김 따위는 손도 안 대고 맥주를 마셨더랬다. 이렇게 맛있는 치킨을 두고 어떻게 술만 마실 수가 있을까? 그는 어렸을 때 닭 잡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목을 쳤는데, 목 없는 닭이 손아귀에서 벗어나 마당을 뛰어다녔다고. 그냥 내 추측이지만 형은 닭띠라서 닭고기를 먹는다는 게 어딘가 카니발리즘적인 느낌도 좀 드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목 없는 닭 마이크*를 떠올리고 마이크가 어쩌면 자기의식=뇌라는 현대적인 상식의 반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우습고 슬픈 마이크와 그의 일생에 관해 떠올리고 있었지만, 만일 내가 이 이야기를 했더라면, 여러 번 그랬던 것처럼 강석이 형은 또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나는 적잖이 이런 이야기들을 즐기는 악취미가 있기 때문에 이미지에 민감한 강석이 형과 이야기할 때에는 종종 이런 브레이크를 걸곤 한다. 내 나름대로 일종의 배려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봤자 선배들 놀리기 좋아하는 내 ‘재미’의 아주 적은 부분을 희생할 따름이다. (그리고 한번쯤은 마이크 이야기를 했던 것도 같다. 그런데도 각주에 마이크 이야기를 자세히 남기는 것은 또 한번쯤은 강석이 형에게 이 이야기의 우습고 끔찍하고 슬픈 뉘앙스를 충실히 전달해보고픈 열망이 있었달까.)

 

아무튼 알고 보니 내가 석사 시절에 그를 몰랐던 데에는 또 그 나름의 방황의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아마도 한때 극작에 뜻을 두었나 보았다. 국문과 대학원에 진학해놓고도 한동안 연극원에 다니며 외유를 했고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몇 년 후에 되돌아왔다. 그는 나처럼 친해진다고 사적인 이야기를 마구 털어놓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여전히 몹시 내성적인 사람이라 느꼈지만 세미나에 관한 것이라거나 대학 시절 이야기, 금성출판사 간 30권짜리 소년소녀컬러세계문학전집에 대한 추억 따위에 관해서는 어지간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내가 <메트로폴리스>나 북유럽 신화, 초기 르 클레지오나 카뮈 같은 으스스하고 차갑고 섬세하면서 의외로 휴머니즘적인 것들을 좋아했다면 그가 단연 좋아한 것은 <서유기>와 에밀 시오랑과 루쉰이었다. 그것은 람슈타인과 조용필만큼 달랐는데 그런 차이 정도는 우리의 즐거운 세미나와 최소 3차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는 알고 보니 전국에 한 줌밖에 없었던,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겠다며 90년대 후반인가 2천 년대 초반인가에 스스로 해체한 같은 정치조직 출신이었다. 21세기에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을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그 무렵 강석이 형이 했던 말처럼 어쩌면 정치노선도 결국엔 취향의 문제였는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정해진 유니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옷차림만 봐도 정치 노선을 짐작할 수 있었던 20세기 후반을 생각하면 그걸 부인할 수도 없는 노릇인 듯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람슈타인과 조용필도 NL과 PD만큼 커다란 차이를 가진 건 아니었나 보다.

 

#2. 송아저씨네 빈대떡

 

2차로 갔던 곳은 주로 신촌 <우드스탁> 옆의 막걸리 집이었는데, 강석이 형이 1차가 끝날 때쯤 되면 약간 취하기 시작하고 늘 막걸리를 한 잔 하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형은 막걸리를 진짜 좋아했다. 그 빈대떡집을 생각하면 나는 이 무렵부터 때때로 나누었던 어떤 예감에 관한 이야기들이 자주 떠오른다. 몇 년 후에 그런 얘기들이 모종의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양성을 강조하다가 가치의 위계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 이러다 보편성이 이상한 방식으로 회귀할 것 같다는 이야기.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보면 술을 잘 못 먹는 나는 조금 먹고 아직 말짱한데 역시나 술을 그다지 잘 마시지 못 하는 강석이 형이 많이 마시고 점점 취해서 문득 이런 질문을 하곤 했던 것이다. 한아야, 아이들은 왜 아프냐? 아이들은 왜 아프지?

그는 사소한 실수와 우연으로 오랫동안 크게 아픈 적이 있다. 그 이야기를 딱 한 번 지나치듯 들은 적이 있는데 그는 좀처럼 그 이야기를 꺼내기 싫어했다.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고통은 도대체가 타인으로서는 아무리 짐작하려 해도 그럴 수 없는 것이니 오롯이 견뎌야만 하는 형언불가에 공유 불가인 자기만의 것. 어린 시절 오래 크게 앓았던 경험은 그를 혼자 있게 하고, 고독하게 하고, 나눌 수 없는 끔찍한 실감이 오로지 자기의 존재를 보증해주는 역설 속에 있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 이야기를 써도 좋겠냐고 했더니 그는 망설이다가 다음의 글을 내게 보내주었다.

 

아이 적에는 오후 수업이란 걸 받아본 적이 없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한두 달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 흔한 소풍도 매년 겪는 소외의 일환일 뿐이었다. 친구들과의 시간이 아니라 친구들로부터의 시간을 건사하는 것이 온 힘을 기울여 마땅한 일이던 날들이었다. 아마도 소리로서 문학이 움트던 곳이 있다면 텅 빈 벽에 공을 튕기며 흘려보던 시간 속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공이 벽에 부딪치는 소리, 튕겨져 나오며 바닥을 퉁기던 소리가 저 질문의 공간적 버전이었다. 그러니 “사랑의 하느님/세상엔 왜 악이 존재합니까?”(화이트헤드)를 “아이들은 왜 아픈가?”로 고쳐 묻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악과 고통에 대한 이신론적 이해도, 그것이 보다 높은 곳의 원리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라는 합리주의자들의 대범한 자구책도 구체적인 고통에 대해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종교 없이 저 질문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조금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 계간 <대산문화>

 

“내 문학의 스승”을 밝히는 글에서 “언제나 내게 문학은 ‘아이들은 왜 아픈가?’ 하는 질문과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의 간극을 지켜보는 것에서부터 발생한다. 질문과 매혹의 이율배반이 내 조그만 사유의 스승이다”라고 쓰고 있으니, 빈대떡 집에서의 저 질문은 필경 연원이 아주 오래되었던 것이다.

 

#3. 도어즈

 

신촌 도어즈는 내가 학부시절 가끔 드나들던 명륜동 도어즈보다 훨씬 크지만 분위기는 정말 똑같은 곳이다. 간판도 똑같고 문도 똑같이 생겨서 비밀 프랜차이즈가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심지어 학부 때 명륜동 도어즈에서 어울리던 친구와 선배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왔을 때 세미나 끝나고 강석이 형과 뒤풀이 중이었던 나는 신촌 도어즈로 그들을 불러 같이 술을 마시기도 했다. 오래되고 묵은 맥주냄새가 나는 마룻바닥, 가득 꽂혀 있는 LP와 CD, 낮은 조도, 엄청난 볼륨의 록음악. 거기쯤 오면 강석이 형은 이미 몹시 취해 있지만 아직 한 잔 더 마시고 싶어 집에 가기 싫은 상태다. 음악 소리가 너무 크기 때문에 대화 따위는 포기해야 한다. 나는 곡 신청하느라 여념이 없고, 강석이 형은 어차피 여기서부터는 잘 기억을 못 하고, 실제로 한두 잔 더 마신 다음 다른 사람들을 남겨놓고 혼자 말도 없이 집으로 사라져 군자의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실천한 적이 많았다. 항상 이런 식이었기 때문에 도어즈는 여러 모로 자기 이름값을 했다. 한때 니체에 미친 철학과 학생이었던 짐 모리슨이, 향정신성 약물의 효과를 맹신했던 올더스 헉슬리의 책 <지각의 문The Doors of Perception>에서 차용해 만든 밴드 이름을 따랐던 도어즈는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사람을 몽롱하게 만들어 내일이면 잊어버릴 새로운 지각 속으로 우리를 재빨리 밀어넣곤 했던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상대방이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떠들었던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알아들은 척 했던가. 어쩌면 그곳은 입을 닥치고 텔레파시를 연습하도록 만들어진 공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음날이면 전날 집에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면서 귀신처럼 정확하게 귀가할 줄 알았던 형이,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한겨울 집에서 늦게까지 형을 기다리던 언니가 밖을 내다보니 강석이 형이 눈 쌓인 소나무를 붙들고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너 누구냐,고 했겠지? 아직 괜찮노, 했겠지? 검지와 중지를 붙이고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붙인 다음, 너 이거 되냐,고 했을까? 혹은 가위바위보를? 그도 아니라면 형은 또 얼마나 진지하게 형언불가의 의중을 전하고 있었을까. 애먼 소나무는 또 얼마나 뻘쭘했으리.

 

#4. FUBAR

 

푸바는 음악이 끝내주던 또 다른 맥주 집이다. 군대 속어인 FUBAR는 “Fucked up beyond all recognition”, 즉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X 되었다는 말의 약자라고, 언젠가 강석이 형과 나와 함께 갔던 거의 80년대 한국 남자 같은 스티븐 형이 알려주었다. 스티븐 형은 우리 과 선배고, 스티븐 형은 한국에 오래 살았고, 가끔 후배들을 데리고 자기가 아는 끝내주는 술집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다른 많은 술집처럼 여기도 곧 없어졌다. 다만, 내 기억에 따르면 우리는 이 집이 없어지기 전에, 그러니까 강석이 형이 평론가가 되고 내가 시인이 된 다음에 장석원 형과 추운 겨울날 함께 간 적이 있었다. 누구 책이 출간되어서 갔었나? 석원이 형의 <역진화의 시작>이었나?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마 우리는 이미 등단한 지 5,6년 쯤 지났을 때고 각자 친한 문단 친구들이 좀 생겼을 때일 거라. 칸트가 다 끝나고 나서였나, 칸트를 아직 들어가기 전이었나, 키르케고어도 같이 읽고 내가 한 권 더 있는 로티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도 형한테 한 권 주고 흄은 지난 지 한참 후였으니까 대략 2010년 전후였을 것이다. 석원이 형도 끝내주는 록 팬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없이 음악을 신청해서 들었는데, 연말인데도 그 집엔 손님이 별로 없었던 걸 보면 평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커다란 통유리창 밖으로 불이 하나둘 꺼지고 발길이 끊긴 추운 밤, 두텁게 쌓인 눈을 보면서 우리는 정치를, 미학을, 시를 이야기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음악 얘기였을 거라. 석원이 형은 또 툴tool을 신청했겠지. 여러 곡 신청했겠지. 어우, 풀 미 언더 하나면 됐잖아요, 뭘 더 들어요,라고 나는 말렸을 수도 있다. 제발 형도 뭐라도 신청해보라고, 내가 종용해서 강석이 형은 조용필을 신청했을 수도. 그 겨울의 찻집이나 꿈, 같은 것을 말이다.

 

이상한 일이지. 나는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인적이 끊기기 시작한 새벽의 눈 쌓인 신촌 골목에서 다 큰 사람들끼리 눈싸움을 했던 기억이 신나게 남아 있다. 어설프게 눈을 뭉쳐서 어설프게 던지고 어설프게 미끄러졌던 일들이. 숨이 찰 때까지 깔깔거리면서 그랬던 기억이 남아 있다. 형이 평론가가 되고, 내가 시인이 되고, 그런 다음 우리는 시 이야기도 간혹 했던 것 같긴 한데 토론을 해본 기억은 없다. 토론을 하기에는, 우리는 개별성과 고유성에 대한 존중이 좀 지나치게 컸는지도 모른다.

 

#5. 외솔관 217호

 

지금 문과대 2층에서 국문과 BK사업단 사무실이 되어 나의 주2일 근무 공간이 되어 있는 이곳은 15년 전에는 국문과 합동연구실들 중 하나였다. 책상이 7개쯤 있었고 강석이 형은 창가 자리를 썼다. 나는 주말에 혼자 있는 연구실을 좋아했는데, 문학도란 모름지기 휴식과 작업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집에 얹혀살고 있는 나는 더더욱 그랬다. 나는 아무도 없을 때 남의 책꽂이에 꽂힌 재밌어 보이는 책들을 집어다 읽고 꽂아두기를 반복했고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랬겠지(라고 나는 부채감을 상쇄하려 하는데, 만일 안 그랬다면 미안, 친구들). 그러다 어느 날엔 강석이 형 책상에서 초등학교 공책 같은 것을 발견하기도 했는데, 거기에는 시처럼 보이는 게, 아마도 시가, 설마 시가? 아무래도 시가! 몇 편 들어 있는 거라. 몹시 압축적이고 추상적인 수상한 단어들이 많았던 기억은 있지만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건 형이 별로 달필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일 누군가에게 들키더라도 진짜 들키지는 않고 싶어서 너무 꽁꽁 숨긴 마음이었을까.

 

형은 시를 쓰고 있었구나. 형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시를 쓰고 있었구나. 아마 나처럼 연구실에 혼자 있는 날 썼겠지.

 

형은 혼자 시인이었고 남들에게 쉽게 들키지 않을 방식으로 아름다운 이미지와 이해할 수 없는 아이의 고통 사이에서 오랫동안 찢어졌다 기우기를 반복해왔나 보다.

 

토요일이라 스팀이 안 나오는 연구실에는 개인 난로를 틀어도 여전히 한기가 흘렀고, 그렇지만 유리창 너머 하늘은 쨍- 깨질 듯이 파랬는데,

 

어째서 추억에 관해 쓰는 일은 어쩐지 슬픈 것일까. 아마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어서 그런가보다. 머리 없는 마이크가 부리로 날개를 다듬으려 하거나 홰를 치며 울려는 것과 같아서 그런가 보다.

 

형에 대한 나의 가장 애틋한 추억은, 형이 없는 바로 이 장면이다.

 

2004년 겨울이었다.

 

얼마 후 형은 신춘문예에 평론으로 당선했고 조강석 평론가가 되었다.**


*) 머리 없는 닭 마이크: 머리 없는 닭 마이크(1945.4.20.~1947.3.17.)는 머리가 잘리고도 18개월을 살았던 와이언도트 품종의 수탉이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마이크는 횃대에서 균형을 잡고 앉아 있기도 했고, 머리가 없는 것도 모르는 듯이 부리로 날개를 다듬으려 하거나 홰를 치며 울려고 하기도 해서 주인인 로이드 올슨은 죄의식을 느껴 마이크를 계속 보살펴주었다. 그는 잘린 목으로 스포이트를 이용해 음식물을 넣어주거나 기도의 가래를 뽑아주었으며 덕분에 마이크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다 흥행사였던 호프 웨이드가 순회 공연을 제안하여 1인당 25센트씩 받고 구경을 시켰는데, 한창 잘 나갈 때는 한 달에 4,500달러를 벌어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마이크는 주인인 올슨이 스포이트를 행사장에 놓고 오는 바람에 순회 공연을 끝내고 집으로 오다가 피닉스에서 묵던 중 한밤중에 숨이 막혀 죽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올슨은 마이크를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렸다고 거짓말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올슨처럼 흥행으로 한몫 잡아보려고 자기 닭의 머리를 쳤지만 모두 죽어버렸다. 콜로라도주 프루이타에서는 여전히 매년 머리 없는 닭 마이크를 기리는 축제를 열고 있다. 사람들은 머리 없는 닭 코스튬을 입고 달리기를 하거나 원반 던지기 토너먼트를 한다.

 

**) 물론 그 후에도 세미나와 뒤풀이는 계속되었다. 오래 전 갈무리해둔 옛날 블로그에 이런 게 있었다. “제목 : 물증, 보낸 날짜 : 2005.04.16., 내용 : 3XXX 저거 자네 차지? 지금 와 보니 니 차랑 내 차랑 딱 둘이 여 넓은 디서 해장하고 있다 딱한 것들!”

(끝)

 

 

-<현대시> 2019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