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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매다 꽂기

 

첫 시집을 냈을 때 내가 전해들은 내 시에 대한 한 선배 시인의 반응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정한아 시는 이름을 가리고 읽으면 마치 남자 시인의 시를 읽는 것 같아.

남자 시인과 여자 시인의 시가 따로 있다는 말인가? 나는 크게 놀랐지만 가벼운 자리였기 때문에 그저 농담을 하는 것으로 화제를 전환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 마음속에 아저씨가 한 명 살고 있나 봐요.

심각하게 이야기하면 내 마음속에 살고 있는 그 아저씨는 이제까지 내가 사랑하며 읽어온 고전들의 저자가 주로 백인 중년 남성들이었다는 점에서 비롯될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햄릿>이나 <몽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고전적인 복수극도, 셜록 홈즈 시리즈나 <기암성> 같은 추리소설도, 10대 시절에 푹 빠져 지냈던 실존주의 작품이나 누보 로망도 대부분 백인 아저씨들이 쓴 것이었다. 그뿐인가. 엄마의 강요로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읽어야 했던 성서의 어떤 페이지도 아마 여자가 쓴 것은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가설은 내가 언제나 나의 ‘성’을 의식하지 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보존하고 싶어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여덟 살 때 내 장래희망은 미래소년 코난이었고 매일 질질 짜서 코난을 난감하게 만드는 라나만큼 이 만화에서 짜증나는 인물은 없었다. 나는 코난처럼 달리기도 잘하고 발가락 힘도 센데, 라나처럼 늘 울어서 구해주지 않고는 미안해서 견딜 수 없는 인물이 있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짜증이 날까? 코난은 어째서 포비와의 우정으로 만족할 수 없는 거지? 망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만도 힘든데 우정도 지키고 질질 짜는 라나도 무시할 수 없다니, 코난의 어깨는 얼마나 무거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 반에는 ‘유도하는 백신양(물론 실명이 아니다)’이라 불리는 아이가 있었다. 여덟 살짜리에게 이런 성격 묘사가 너무 가혹하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백신양은 천성이 냉혹하고 잔인한 데다 자기가 체육관에서 배운 매치기 기술을 사소한 시비를 걸어 아이들에게 매일같이 써먹고 있었다. <햄릿>이며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좋아했다는 앞선 고백에서 예상할 수 있겠지만(원치 않은 독서였으나 구약 성서도 한몫 했을지 모른다), 나는 복수에 동반되는 정의로운 분노와 승리의 감정을 희구하는 어린이였기 때문에 특히나 백신양의 반복적인 악행을 늘 눈여겨보고 있었다. 어느 날 나에게 복수의 빌미가 찾아왔다. 1982년 12월 초순의 어느 날, 첫눈임에도 눈이 꽤나 많이 내려 운동장이 하얗게 덮이자, 담임 선생은 수업 대신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눈싸움을 하고 놀도록 허락했다.

 

여러분은 눈싸움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별로 외향적이지 않은 나는 예나 지금이나 좀 바보 같은 놀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를 올려다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하얗게 덮인 운동장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뽀드득거리는 소리를 듣거나 눈사람을 만드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굳이 그걸 뭉쳐서 누구한테 던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남자아이들이 눈싸움을 시작했고 점점 거칠어지더니 가만히 서 있는 여자아이들에게도 던지기 시작했다. 몇몇 여자아이들은 교실로 들어가고 싶어 했고, 너무 단단하게 뭉친 눈에 맞아 우는 아이가 생겼다. 아, 저 라나들을 어떻게 하면 좋지. 짜증이 나려던 찰나, ‘유도하는 백신양’이 던진 눈뭉치가 내 눈두덩을 때렸는데, 아, 글쎄, 피가 나는 것이 아닌가.

 

다른 방법으로 복수해서는 안되었다. 녀석이 두 학기 동안 다른 아이들을 괴롭힐 때 항용 쓰던 바로 그 방법을 써야만 한다. 눈뭉치 속에 든 돌멩이를 본 순간 나는 복수심에 눈이 멀어 ‘유도하는 백신양’에게로 곧장 달려가 녀석을 눈 쌓인 운동장 위에 매다 꽂았다.

 

매다 꽂았는데, 녀석은 분명 윽, 하고 얼굴을 찌그러뜨리고 신음소리를 냈는데, 다음날 등교하며 복도에서 마주친 녀석의 낯빛은 뻔뻔했다. 낙법을 충실히 배운 것일까? 녀석은 기가 죽거나 고의로 눈빛을 피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직 기뻐하기는 이르다며 내게 승부욕을 불태우지도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아니, 녀석은 그렇게 가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무반응으로부터 온 충격의 의미를 나는 10여 년이 지나서야 깨닫게 된다.

 

나는 녀석의 위계질서 안에 카운트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녀석을 세 번쯤 더 운동장에 매다 꽂았더라도 녀석은 내게 눈을 깔지 않았을 것이다. 녀석이 다른 남자아이들에게 매다 꽂혔을 때도 그렇게 반응했는지는 알 수 없거나 기억나지 않는다.

 

이후로도 나는 줄곧 ‘유도하는 백신양’을 매다 꽂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녀석이 남자아이고 내가 여자아이였기 때문이 아니다. ‘유도하는 백신양’은 나에게 인간성의 자기도취적이고 냉혹하고 기만적이고 조악한 부분의 상징이 되었다.

 

이 글의 첫머리에 썼던 내 시에 대한 선배 시인의 반응이 다음과 같았더라면 약간 더 나았을 것이다.

-정한아 시는 이름을 가리고 읽으면 남자 시인이 쓴 시인지 여자 시인이 쓴 시인지 알 수가 없어.

실로 나는 마음속에 소녀가 사는 좋은 남자 시인들과 마음속에 소년이나 아저씨, 할아버지가 사는 좋은 여자 시인과 소설가를 여럿 알고 있다.

 

미래소년 코난은 라나를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남장여자였을 수도 있고 실은 포비를 사랑하는 게이였을 수도 있다. 혹은 포비를 사랑하는 남장여자였을 수도. 그걸 확정짓는 것이 그렇게나 중요한가?

 

그리고 나는, 괜찮은 인간이라면, 우리가 사회적으로 여성적이라든가 남성적이라든가 동성애적이라든가 이성애적이라고, 혹은 양성애적이거나 범성애적이라고 불러온 차이들을 가로질러서 그 모든 복합적인 이질성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조악한 자기애와 냉혹하고 기만적인 폭력성을 문제 삼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끝)

-2019 서울국제작가축제 기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