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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육 ‘혁신’ 유감 Budi Satria Kwan, 그러니까, 내가 철학과에 가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가 재떨이를 던지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예반 때문에 떨어진 성적을 만회하겠다고 고2 겨울방학에 수학 문제집을 들고 남산도서관에 간 것이 화근이었다. 거기에는 많고 많은 책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처음 보는 낯선 단어들로 세계를 다시 설명하려는 사람들의 책만 모아놓은 방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한적하고 나른한 그곳에서 수학문제도, 풀기는 풀었지만, 중간 중간 집어든 이상한 책들에 씌어 있는 이상한 낱말들로 된 답 없는 이상한 문제들은,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창가 자리에 나를 붙들어두곤 했었다. 지금도 ‘공부’라는 낱말을 들으면 그 고즈넉한 겨울 저녁의 햇살이 혼곤히 비쳐들어오던 창가 자리를 떠올린다. 나는 아직도 공..
훌륭한 보통 사람 일전에 시인이신 은사님과 함께 했던 식사 모임에서 의정부 화재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더랬다. 맨몸으로 시민들을 구조한 간판 시공업자의 일화는 확실히 세월호 참사 이후 재난에 대해 한층 예민해진 사람들에게 일말의 위안을 주었다. 어쩌면 초자연적인 영웅들을 그린 만화들은 저런 숨어있던 익명의 능력자를 목격한 창작자들에 의해 태어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우리가 무엇에 의지해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훨씬 더 깊은 불안과 걱정에 마주치기도 한다. 만일 우리 사회가 상시적인 안전 체계보다 보통 이상의 헌신도와 선의를 가진 익명의 훌륭한 보통 사람, 평소에는 뿔테 안경을 끼고 다니다가 위험 상황에서는 슈퍼맨으로 변신하는 클라크 같은 사람에게 기대를 걸어야 하는 사회라면, 우리는 잠재적인 우리 중 누..
자라의 짓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을 오늘 문득 떠올리다가 이 속담의 주인공에게 자라가 무슨 짓을 했는지 종일 궁금했던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사전을 찾아보니 “고슴도치에게 혼난 범이 밤송이 보고도 놀란다”는 속담이 북한에서 이와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필시 이 속담은 경험을 통한 학습 효과라는 보편성을 전해주는 동시에 큰 범이 자신의 위용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가시 뭉치에 심리적으로 고착되어 있는 상황을 풍자적으로 전하고 있다. 하지만 자연 상태의 자라를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목을 움츠렸다 폈다 하는 것 말고는 자라가 할 수 있는 무슨 놀라운 일을 떠올리기 난감한 것이다. 남편은 자라가 분명 손가락을 물었을 거라고 했지만, 속담은 아무런 단서도 주지 않는다. 실로..
얼마나 더 사랑을 송나라의 문장가 구양수가 이야기했다는 삼다 원칙은 너무나 유명하지만 여전히 변치 않는 글쓰기의 기본이다. 과연 많이 읽다 보면 생각이 많아지고 공감하거나 비평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며 곧이어 스스로 쓰게 된다. 그러고 보면 저 삼다 원칙은 각각의 개별적인 행위를 분류하여 원칙으로 정한 것이 아니라 글 잘 쓰는 사람의 연속된 행위를 묘사해놓은 것 같다. 읽고 쓰고 생각하는 일도 경험일진대, 많은 글을 읽는다면 그만큼 많은 삶을 자진하여 추경험하게 되는 셈이고,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그러니까, 읽고 쓰고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는 일이리라. 나갔다 돌아오면 이전과는 무언가 아주 조금이라도 깊어지거나 넓어지거나 달라져 있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나가보는 책이라는 ‘바깥’은, 그것이 새로운 세..
크리스마스트리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나뭇가지에 쌓인 눈을 형상화하려고 미메시스 정신에 입각하여 꾸며낸 것. 반짝 반짝 빛나는 것. 수은주는 깊이 내려가도 당신의 체감온도는 아름다움에 의해 상기(上氣)될 수 있습니다,라고 속삭이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이것저것 매달아 의외의 완성도를 달성하는 것. 너무 무거운 장식물은 떨어뜨리고 마는 것. 진짜와 가짜에 별다른 구별이 없는 것. 어둠 속에서 혼자 깜, 빡, 깜, 빡, 중얼거리는 것. 해체와 조립이 가능한 것. 해체는 조립의 역순. 그러나 조립할 때마다 무언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 한파가 찾아온 한밤에 불 다 끄고 거실에 앉아 보고 있으면 술이 당기는 것. 술에 취해 보고 있으면 너무 예쁜 척 해서 넘어뜨리고 싶은 것. 넘어뜨리고 나서 밟고 싶은 것. 그러다 다시 복구해내..
공부와 학점 사이 picture from "Study Test Score Gains Don't Mean Cognitive Gains" 강사들의 방학은 성적 처리와 함께 시작된다. 학생들이 모두 골몰하며 보고서를 채우고 나면, 세상에서는 한낱 시급 노동자에 불과한 인문예술학부의 강사들도, 시급과는 무관하게 학생들의 여러 모로 고뇌에 찬 보고서를 마주하면서 인류의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심정으로 마지막 채점에 들어간다. 어떤 보고서는 있는 끼를 다 부려 스스로 사유하는 훈련을 상상력과 더불고, 또 어떤 보고서는 가장 모범적인 교과서들을 요약 정리하면서 기본적인 사실에 충실하며, 또 어떤 보고서는 자기 앞에 던져진 여전히 낯선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모든 것들이 특정 문제와 마주선 현재..
양심의 즙: 이념을 요청한다 1. 이 글은 애초에 세월호 참사 국면에서 대중 감정의 장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기획된 것이다. 이 감정 장에는 일종의 거대한 싱크홀이 생겼는데, 그것을 우리는 무저갱, 즉, 바닥없음(발 디딜 토대, 즉 실존의 근거 없음, 발이 닿지 않음)의 압도적인 추체험으로부터 기인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직간접적인 체험의 이미지(가라앉는 대규모의 여객선 내부에 있는 자기를 상상하는 일)가 초래한 정신적 외상은 긴급한 구호와 치료를 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방치된 저혈성 쇼크 환자처럼 제 몸 안에 늘어나는 부재를 스스로 가까스로 견디고 있는 주체들로 가득 차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이다. 직접적인 피해자들은 입법적 조치를 요구하는 상징적 제스처를 통해 현실적인 정치 행동으로 이 구..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김수영문학관 개관 기념 학술 세미나 발표문) 어떤 이야기가, 그것이 너무 많이 이야기된 것이므로, 거의 일종의 죄악이라면, 그것은 어떤 시대인가? - 파울 첼란, 「나무 없는 나뭇잎 하나-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위하여.」 「‘김일성만세’」의 당혹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1960.10.6.) - 「‘김일성만세’」 전문 이 발표의 첫머리에 이 시를 인용하자고 생각하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