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무한 변주 중인 후렴구
*그때, 우리가 앉아있었던 그 광장의 이름을 기억할 수 없다. 아니, 우리는 처음부터 그 광장의 이름을 알았던 적이 없다. 그러나 그날, 우리가 파리에서 열차를 타고 아비뇽에 도착해서 차를 빌리고 처음 야외 식탁에 앉아 파란 하늘 아래 노란 햇빛 속에서 양고기 꾸스꾸스를 먹었던 날, 우리는 우리가 떠나온 곳에서 여객선이 침몰하고, 수학여행을 떠났던 소년 소녀들이 물속으로 영원히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비뇽에서, 파란 하늘 아래 노란 햇빛 속에서, 끊어진 아비뇽 다리 위에서, 끊어진 아비뇽 다리의 절단면 앞에서 하염없이 강물을, 하늘보다 더 파란 강물을 바라보고 있던 비둘기며, 떠내려가다가 다리 기둥에 걸려 반쯤 잠겨 있던 커다란 나뭇가지, 하늘보다 더 파란 강물 위에 검푸른 그림자를 드..
천년왕국에서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그러니까, 1991년 늦가을, 아직 종로에 종로서적이 있었을 때였다. 나는 막 고교 2학년 진학을 앞두고 본격적인 문청 행세를 시작하고 있었고, 그에 걸맞은 허세를 완성해줄 책 한 권을 사게 되었다. 한 영문학자가 엮은 『포스트모더니즘과 한국문학: 후기산업사회의 문학적 대응』이라는 이 한 권의 책은, 정말이지 알 듯 모를 듯한 소리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등하교 시간의 버스 속에서 여드름투성이 안경잡이 고등학생의 자긍심을 키워주기에는 그만인 제목을 달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저 옛날 고교 비평준화 시절,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1급 문예지였다는 지라든지, 선배들이 교류했던 내로라하는 공립 고등학교 문예반들에서 오랜 세월 보내온 교지들, 70-80년대 문학잡지와 시, 소설 등으로 가득 차 있었던 문예반실 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