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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미감과 포만감

 

 

다른 많은 수도권의 아파트 단지처럼 우리 동네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장이 선다. 아파트 단지에 서는 장은 먹거리를 사러 갈 곳이 없어서 서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입구며 후문 쪽에 벌써 서너 개의 슈퍼마켓과 가게가 있고 어지간한 채소며 생선, 정육 등을 10분 거리 내에서 살 수 있으니, 아파트에 서는 장은 그보다는 무언가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만족시켜주는 일종의 문화적인 것에 가까운 듯하다. 게다가 공산품이나 냉동식품이라면 몰라도 신선식품을 주말에 대형 할인마트에서 대량 구매하는 것은 별로 현명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수고를 덜어주는 효과도 있다.

 

오늘이 마침 장날이라 저녁에는 오징어무국이나 끓여볼까 하고 홍고추를 사러 나갔다. 전날 가게에서 다른 재료는 사놓았지만, 이상하게도 단골 가게에서는 상태가 별로인 홍고추가 너무 비싸 장에서 사려고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 아무래도 분홍색 맑은 오징어무국에는 홍고추가 필요해. 소고기무국이나 오징어찌개에는 홍고추가 없어도 되지만, 맑은 오징어무국에는 홍고추가 없으면 미학적으로 실패다. 뭐랄까, 오징어무국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그릇에 홍고추 두어 조각이 얹히지 않으면 그림이 그려지질 않는다. 그런데 매주 오는 채소 장수의 진열대에는 청량고추, 오이고추에 풋고추, 꽈리고추도 있는데 홍고추만 없는 것이었다. 유채나물이나 봄 냉이, 참나물도 있는데, 요컨대 홍고추만 빼고 모든 것이 다 있는데 그 흔하디흔한 홍고추가 없다니!

 

의아한 표정으로 왜 홍고추가 없냐고 묻자 채소 장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홍고추......, 그게 뭐라고...... 너무 비싸서 도저히 안 팔리겠어서 안 가지고 왔어요. 얼마나 비싼데요? 그까짓 게......, 개당 천 원입니다.

 

개당 2천 원이었더라도 있어주기만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징어무국을 끓이려는 여자가 홍고추를 찾으러 돌아다닐 때는 홍고추, 그까짓 것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설마하니, 홍고추를 전량 매수해서 세수 부족을 메울 작정은 아닐 테고. 어쩔 수 없이 오늘은 홍고추 없는 오징어무국을 끓일 수밖에.

 

매콤한 맛은 청량고추로도 낼 수 있지만, 홍고추의 앙큼한 장식적 효과가 없으니 영 흥이 나질 않는다. 불어터진 국수라도 다행이고 안 불어터진 국수라도 배만 부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말이다. ()

-<매일경제> 매경춘추 2015-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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