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tender 38

왼손의 투쟁

시에 관해 생각하고 있으면 시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오르가즘에 대해 생각하느라 전혀 감흥을 느낄 수 없는 애정 행위와 비슷할 것이다. 시는 아마도 반쯤 무의식적이고 집중된 행동의 일환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처음 무엇인가 자기 속엣말을 순전히 자발적으로 백지에 적기 시작한 시점을 떠올려보면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다. 속엣말은 흔히 (기억과 상상을 포함한) 생각이거나 느낌이거나 이 둘의 혼합일 터이고, 양 끝에 생각과 느낌이 있는 선분 위의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 그 스펙트럼의 어디쯤이 좋은지에 관해 쓴다는 것은 매우 곤란하고 불쾌한 일이다. 게다가 ‘좋음’이란 얼마나 애매한 말인가. 그것은 개인의 취향에만 국한되는 ‘좋아하다’의 명사형(‘좋아함’)이 아니라 객관적인 훌륭한 상태의 진선미가 통..

지난 글/tender 2013.07.24

무덤 속에서 자라는 머리카락

#1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아,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든 사상 가운데 가장 축복 받은 이 사상을 취하여 그처럼 허송세월하고 있는 이 비참, 인간은 각기 다른 일에 종사하고 있다거나 군중에 관해서 얘기한다면, 인생의 연극에 있어서는 군중을 힘으로 사용하면서 다른 일에 종사하고 있으나 결코 이 축복만은 기억나게 하지 못하는 이 비참, 즉 군중이 개개인으로 분리되고, 그것에 의하여 각 개인이 최고이고 또 유일한 것을 획득하게 된다면 그로 인하여 인생이 가치 있는 것이 되며 그 안에서 사는 것은 영원도 결코 길 수는 없는데, 그와 반대로 인간이 기계처럼 사용되기 위하여 군중으로서 긁어모이고 있는 이 비참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울어도 충분하지 않다. -키르케고르(1849), 죽음에 이르는 병 ..

지난 글/tender 2013.06.29

퇴고는 많이 할수록 좋은가; 악마와 함께 하는 항해

처음에 그것은 글이 아니었다. 글이 아닐뿐더러, 말조차도 아니었다. 처음 당신이,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펜을 쥐고 백지 위에 첫 음절을 적어나가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어떤 식으로도 손에 잡힐 수 없는, 파악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의 가슴 한가운데를 툭 치고 지나간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붙잡기 위해, 그 말로는 할 수 없는 어떤 감정과 정서, 생각의 모호한 덩어리의 뒷덜미를 낚아채 당신 곁에 잠시 머물게 하려고 당신이 당신도 모르게 결심했을 때, 당신의 존재가 좀 더 현실적으로 그럴 듯하고 꽤 쓸모 있는 사람 구실을 하도록 하는 여러 유용한 제안들을 뿌리치고 용처와 가치를 알 수 없는 불면의 수고를 자처했을 때, 당신은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어떤 항해에 자기의 존재를 맡긴 셈이다. ..

지난 글/tender 2013.02.04

부피에 비해 가볍고 따뜻하고 날개가 달린 것. 대개는 날 수 있지만 날지 못하거나 날지 않거나 날기를 의도적으로 중지할 수 있다. ‘나비’가 나풀거리는 영혼의 이름이라면 ‘새’는 힘과 방향이 배가된 형태의 영혼을 이른다. 아무리 작은 새라도 가장 큰 나비보다 훨씬 빠르고 강인한데, 그것은 유약한 아름다움보다 추진력 있는 상승을 선호하는 가볍고 단단한 정신의 뼈 때문이다. ‘V’자 형태의 가슴 뼈는 공교롭게도 새총의 기본 골격과 동일하다. 충분히 단단하다면 죽은 새의 가슴 뼈는 다른 새를 잡는 데 쓰일 수 있다. 혹은, 틈만 나면 날아오르려고 하는 모든 고집스러운 것. ‘어느새’ 같은 것은 너무 빨라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막 배달된 편지의 봉투를 뜯어 편지지를 펼치면 접혀 있던 부분이 가벼운 뼈의 관절처..

지난 글/tender 2012.08.30

엘비스의 찹쌀 도나쓰

* 이 모든 것은 팩트이며 전혀 허구가 아니다. 1982년 봄, 엄마와 아빠와 나, 세 식구가 구반포 아파트에 셋방을 들어 살 때였다. 프로야구가 막 창단되고 MBC 역사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에서 엄마를 닮은 이미숙이 여우 짓을 하면서 강석우 손가락을 물던 시절이다. 어린 엄마는 나를 데리고 밖에 나갈 때면 이모라고 부르라 했다. - 왜? - 재밌잖아. 내가 이모, 이모, 부르면 시장 아줌마들이 어머, 조카가 귀엽네요, 하면서 사심 없이 뺨을 꼬집어주었다. 그래서 엄마는 상가에 가면 이국적인 물건들이 잔뜩 쌓인 수입품점 구경하기를 즐기는 발랄한 이모가 되었다. 기분이 좋아진 이모는 길 건너 에서 소보루나 팥빵을, 그보다 기분이 더 좋으면 찹쌀 도나쓰를 사주었다. 겉은 바삭하고 씹으면 쫀득쫀득한 찹쌀 ..

지난 글/tender 2012.01.20

무(無)의 두드러기에 대한 명상

처음 시를 썼던 때를 나는 결코 잊지 못한다. 그것은 1987년 6월의 어느 날이었고, 학교에서 돌아와 아무도 없는 집에서 작은 치자 화분에 깔린 이끼 위를 기어다니던 민달팽이를 꼼짝없이 한 시간쯤 들여다본 후였다.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이 단순한 생물은 그토록 느린 속도로 젖은 이끼 위를 돌아다니며 화분을 빠져나갈 생각 같은 것은 하고 있지 않았다. 집이 없구나, 너도. 이렇게 혼자인데 말이지. 연무가 깔린 뿌연 대기는 온화하고, 오후 네 시의 햇빛은 알맞게 익어 평온이랄지 나른함이랄지 느리게 유동하는 어떤 집중된 정서가 나를 일종의 명상 상태로 몰아넣었다. 어린아이들이 종종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이때를 생각한다. 그럴 때 아이들은 온몸으로 명상 중이다. 살갗에 열려 있는 ..

지난 글/tender 2011.12.15

저 가늘게 뜬 눈의 황홀

잘 익은 살구 알처럼 눈높이에 떠 있었던 저물녘의 태양은, 터뜨리면 흘러나올 듯한 무게감을 늘어뜨리며 천천히 마천루 뒤로 사라져갔다. 그 광경을 함께 보면서,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석양을 본 지 만 33년 하고도 절반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내 눈꺼풀 속에서 보고 있는 이것은, 2년 하고도 절반이 지난, 마지막 석양의 꿈. 오래된 어제의 석양이지만, 어제의 석양도, 내일의 석양도, 내게는 매양 오늘의 석양만 같다. 해가 나지 않는 흐린 날이나 지난여름처럼 내내 비가 퍼붓던 계절에도, 어제의 석양이나, 내일의 석양이나, 내게는 매양 오늘의 석양만 같아서, 두 눈 속 저녁의 노을빛은 어떤 떠남을 암시한다. 떠남의 가장 떠남다운, 모든 떠남의 궁극적인 떠남을. 처음 석양..

지난 글/tender 2011.10.12

김영승 선배님,

공개된 지면에 편지를 쓰라는 분부를 받고 이 편지를 쓰기까지 저는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남들이 볼 걸 뻔히 알면서 쓰는 편지에는 도대체 무슨 내용을 담아야 할까요. 그래서 마감 기한 최후통첩을 받고도 한참을 지나 선배님 단 한 분만 읽는다 치자 결심하고서야 겨우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선배님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선배님을 20년 전부터 압니다.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들어간 문예반 반실에 놓여있던 날적이에 추상같은 2학년 선배가 어여쁜 글씨로 적어놓았던 「반성641」을 읽고 나서, 저는 반실 책장에 꽂힌 선배님 시집을 들고 학교와 집을 오가며 참 불온한 말들을 낄낄거리며 열심히 읽었더랬습니다. 굴헝같이 습하고 어둡고 서늘해서 이상하게 아늑한 문예반실에서, 동기들과 겨울이면 곱은 손가락을 호호 불며 갱지..

지난 글/tender 2011.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