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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그저 인간이 되는 것만도: 알베르 카뮈,『페스트』

* 참고한 판본은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페스트』(책세상, 1992(1947))이다.

 

 

“그런데, 타루.” 그가 말했다. “뭣 때문에 이런 일에 발벗고 나서지요?”

“나도 모르죠. 아마 나의 윤리관 때문인가봐요.”

“어떤 윤리관이지요?”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초년에 『이방인』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유망주로 관심을 한 몸에 받던 알베르 카뮈는 흔히 장 폴 사르트르와 함께 대표적인 실존주의 작가로 불리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자신을 포함한 세상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방인』의 심드렁한 주인공 뫼르소는 세계에서 자기 존재의 근거와, 욕망과 동경과 활기를 잃어버린, 오직 우연한 세계에서 방황하고 있는 방랑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19세기 내내 유럽은 신이 죽어버렸거나, 혹 존재한다손 치더라도 인간에게 무관심하다는 생각에 점점 설득되어갔다. 실존주의는 갑자기 세상을 등진 아버지로부터 갑작스럽게 버림받은 자식처럼 기댈 곳도, 반항할 대상도 없는 ‘자유’라는 형벌을 받고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의 처지를 대변하는 사조로 생각되었다. 20세기가 되자 이 생각은 하나의 상식이자 변경 불가능한 세계의 조건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시체 더미를 짊어진 유럽은 이제 남은 것은 우연한 인간의 보잘것없는 삶이라는 작은 사건과 그 사건의 끝장뿐이라는 것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뮈는 자신이 실존주의 작가라는 세간의 호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카뮈는 자신이 허무한 인간의 우연뿐인 삶의 파편들을 열심히 묘사해서 보여주는 작가는 아니라고, 오히려 그것에 반대한다고 이야기하려 했던 것 같다. 『이방인』의 세계가 다가 아니라는 것, 우리는 아마 살다가 각자 고독한 죽음을 맞겠지만, 그것이 멍 때리며 아무 생각 없이 허무한 정신 상태로 단지 ‘사라져가는’ 과정으로서 삶의 시간을 때울 변명거리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실존주의 이후를 말이다. 하지만 『이방인』은 너무 많은 호응을 얻은 터였다. 어쩌면 카뮈는 『이방인』의 센세이션에 대해 어떤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 부채를 갚기 위해 『페스트』를 썼는지도 모른다.

 

첫머리에 인용한 부분은 카뮈의 분신인 주인공, 의사 리유가 작가의 또 다른 분신인 타루와 나누는 대화의 일부다. 도시는 흑사병으로 봉쇄되어 있고, 리유는 다른 도시에서 요양 중인 아내와 헤어진 채 할 수 있는 일이 진료뿐이어서 밤낮없이 환자를 돌보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이웃인 타루와 거의 친구가 되었지만, 교유를 나눌 여유가 없어 아직 친밀한 우정을 쌓지는 못하고 있다. 타루는 본래 이 도시에 잠깐 머물러 왔으나 흑사병 창궐 이후 보건대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런 타루에게 리유는 그가 보건대 일에 헌신하는 이유를 묻는다. 타루에게 확실한 신념 같은 것은 없다. ‘아마’ 어떤 윤리관 때문이며,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종교적인 명령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이해하자”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 타루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결국.” 하고 솔직한 어조로 타루가 말했다. “내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성인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안 믿으시면서?”

“바로 그렇기 때문이죠. 오늘날 내가 아는 단 하나의 구체적인 문제는 사람은 신이 없이 성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중략)...

“나는 성인들보다는 패배자들에게 더 연대의식을 느낍니다. 아마 나는 영웅주의라든가 성자 같은 것에는 취미가 없는 것 같아요.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그저 인간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럼요, 우리는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어요. 다만 내가 야심이 덜할 뿐이죠.”

 

이 소설의 특이성은 아주 자세히 읽어야 찾아진다. 어떤 이들은 이 소설이 ‘보이스카웃’소설이라고 폄훼했다. 재난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용기와 헌신, 인류에 대한 우애는 너무나 당연하고 교훈적인 주제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인물들은 겉보기처럼 선의와 인류애로 가득 차 있지 않다. 밤낮없이 왕진과 병원 진료에 지쳐빠질 지경인 리유나, 파수꾼을 매수하고 도시 밖으로 나갈 수 있었는데도 남아서 보건대 활동에 참여하는 신문기자 랑베르, 평범하고 왜소한 관리에 불과했으나 보건대를 훌륭하게 이끄는 그랑, 신에 운명을 맡긴 사제로서 의사의 진료는 거부하겠다며 죽어갔지만 보건대 합류를 약속했던 파늘루 신부 등은 오늘날이라면 인터넷 미담 기사에 기획으로 연재되었을 이들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건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을 때조차 수사와 형용사들을 모두 지웠을 때 벌거벗은 문장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을지 종종 잊어버린다. 그들은 거창한 이웃 사랑과 인류애, 봉사 정신, 종교적 숭고성 때문에 그토록 열심이었던 것이 아니다. 이유가 조금씩은 다 달랐지만, 이 소설의 인물들, 모두 한 조각씩 카뮈를 반영하고 있었던, 약간씩 흔들리면서도 ‘자기 할 일을 하기로 했던’ 이 인물들은 그저 남도 자기 자신도 속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결과적으로는 인간의 근본적인 선의를 유추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영웅주의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실상,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The Economist> 2017년 4월 21일자

 

사실을 말하자면, 이 소설은 매우 지루하다. 실제 감염병 사태만큼이나 지루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점이 이 소설의 현실 반영적인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루하루 급박한 것이 사실이지만, 지리멸렬이 공기 속을 떠돌고 있다. 날마다 라디오에서 발표되는 사망자 수의 진폭을 가늠하는 시민들과, 한 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자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비상 상황이 일상이 되어버려 일종의 나른한 느낌을 풍기는 불명확성 속의‘시간의 지속’ 자체에 대한 카뮈의 서술은 일종의 지긋지긋함, 그리고 이것이 언젠가 반드시 죽을 운명인 우리의 삶 자체와 다르지 않음을 암시한다. 이것을 리유는 이렇게 표현한다.

 

재앙만큼이나 보잘것없는 구경거리는 없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불행은 오래 끌기 때문에 오히려 단조로운 것이다. 그런 나날을 겪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페스트를 겪는 그 무시무시한 나날들이 끝없이 타오르는 잔혹하고 커다란 불길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발바닥 밑에 놓이는 모든 것을 짓이겨버리는 끝날 줄 모르는 답보 상태 같아 보이는 것이었다...페스트는 무엇보다도 용의주도하고 빈틈 없으며 그 기능이 순조로운 하나의 행정 사무였다.

 

그리고 이 너무 많은 삶과 죽음이라는 관념과 사건들 속에서 지쳐버린 전쟁 이후의 유럽은 인간의 삶을 폭력적으로 압축시켜 엄청난 속도의 순환 주기로 갈아넣어버린 전쟁의 기억을 이 소설에서 떠올렸을 것이다. 실제로 카뮈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그 경험을 이 소설에 의식적으로 녹여 넣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의 상징에 관한 이야기이다. 일종의 우화처럼, 페스트는 전쟁의 거의 모든 참상을 표현하면서 총소리와 포성을 지워놓았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은 하나의 추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페스트균이나 코로나 바이러스는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감염병을 ‘눈으로 보지 못한다’. 그런 한에서 짐작되고 예상되고 감소가 기대되고 완전히 방역되기를 희망하는 하나의 추상이지만, 이 추상은 고열의 죽어가는 신체라는 구체적 대응물을 가지고 있다. 역병이 돈다는 소문이 돌자 그 소식은 우리 삶의 음울한 배경음악이 되고, 한낮의 먹구름처럼 암울하고 스산한 날씨가 되고, 우리들의 정서와 기분이 된다. 그래서 리유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리기도 한다. “그렇다, 추상이 끝나게 되면 새출발을 하리라. 그리고 운이 좋다면...”

이 모종의 기단 같은 컴컴한 시간의 덩어리는 언젠가는 풀어질 것이다. 봉쇄는 끝나고 다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배와 비행기가 오가면 우리는 맨얼굴로 거리를 질리도록 쏘다니겠지. 하지만 그토록 기다리던 감염 사태의 퇴각조차 이 소설에서는 아주 소박하고 솔직하게 기술될 뿐이다.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유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고 있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 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 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가지고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지막 문단)

 

그리고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페스트의 백신이 여전히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끝)

 

- 2020년 4월, 웹진 <독서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