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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어떡하지, 나는 작가선언보다 백수선언이 어울릴 것 같은데

어떡하지, 나는 작가선언보다 백수선언이 어울릴 것 같은데

- 6.9 작가선언이 나에게 가져다준 것

 

 

정말이지, 나는 이 원고의 청탁을 왜 덥석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처음 6.9 작가선언에 대한 짧은 에세이를 부탁한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잠시 망설이다가 쓰기로 한 것은 어떤 부채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면서 점점 확실해지는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하고 나는 사실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후회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대학로에서 첫 모임을 가졌을 때 참석하기는 했었다. 처음에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누구였더라? 아무튼 노무현 대통령이 강압적인 검찰 수사 끝에 투신하고 며칠 뒤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고, 우선 모이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는 전화를 받았다. 두 민주계 대통령의 집권 10년을 거치면서 우리는 정말 많은 끔찍한 경험을 재빨리 잊어갔음에 틀림없었다. 한겨울에 진압 작전을 펼쳐서 철거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지 않나, 논의 과정 따위 무시하고 광우병 논란이 한창이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강행하지 않나, 정적(政敵)이라면 서거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애통한 시민 감정의 공공연한 표현까지 광장을 폐쇄해가며 막지 않나,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서 강바닥을 파겠다지 않나, 맞아, 겨우 10여 년이 지났을 뿐인데,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거리에서 부정기적으로 최루탄 냄새를 맡던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니지, 어떻게 10년도 더 지났는데, 보수 정권의 행태는 본질적으로 그대로란 말인가? 이게 정말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란 말인가?

 

지금 생각하면 이 퇴행적인 정치적 상황은 그 이후로도 계속될 8년 지옥 심화과정의 분야별 맛보기에 불과했다. 이 같은 퇴행이 정권 인수와 함께 어찌나 전면적으로 이루어졌는지 2008년 무렵부터 나는 늘 화가 난 채 뉴스를 듣느라 그 좋아하던 음악을 특별한 기회가 아니면 거의 들을 수 없었다. 도대체 귀를 맘 편히 선율과 리듬에 적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첫 모임이 아마 5월 27일이었을 것이다. 황망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황망한 마음과 말을 주고받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그리고 또 며칠 뒤 좀 더 규모가 큰 두 번째 모임이 역시 대학로에서 열렸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낫다는 마음 말고는 별로 공통점이 없었는데, 훗날 여러 사람이 다른 지면에서 증언했던 것처럼, 이처럼 모두 다른 경험치와 기대와 생활 반경을 가지고 있었던 느슨한 연대였다는 점이 모임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리지 않는 자연스러운 여건이 되었다.

 

나는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당시 언론은 이 선언을 ‘젊은 작가’들의 것으로 특징지었던가 보다. 다음해 봄, <실천문학>에 실린 좌담에서 사회자가 “참여했던 문인들이 조직의 이념에 충실하기보다는 혼자 작품에 몰두하던 사람들이 더 많았죠. 그런 것들을 본다면, 문단의 역할 모델을 따라가기보다는 스스로의 충만감 때문에 작품을 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라고까지 쓴 것은 이제 막 발견했다. 그런가 하면, “젊은 작가들은 작가회의에 들어오는 게 부담스럽다고, 자유로운 개성으로서 남고 싶다고 합니다. 그 세대 특유의 자유로운 감성이고, 저는 안 들어오는 것도 좋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들끼리 모여 <눈먼 자들의 국가>도 내고 ‘304 낭독회’도 하고 강정 투쟁도 하고 ‘6.9 작가선언’을 합니다. 저는 이걸 작가회의의 외부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작가회의와 대립한다거나 전혀 관계가 없다거나 그런 게 아니지요.”라는 2014년 11월 5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작가회의 40주년 기념 대담에서의 이시영 시인의 말은 ‘투쟁’으로 다져진 한국현대문학사의 당사자들이 ‘조직’에 관한 견해에 있어 ‘젊은 작가들’과 가지는 정서적이고 실질적인 온도차를 보여준다. 등단 3년차였던 나는 학교 선배들 몇이나 알음알음으로 겨우 얼굴을 튼 몇을 제외하고는 글로만 봤던 사람들이었는데, 아마 많은 사람들의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누군가 카페를 개설했고, 누군가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했고, 누군가 한 줄 선언 형식을 제안했으며, 어지간한 사안들은 모두 카페 회원들의 투표에 부쳐졌다. 그렇게 해서 몇 사람의 손을 거친 일종의 집단창작을 통해 선언문이 작성되었고, 각 사람들은 자기 이름이 책임질 한 줄씩을 적었다. (‘누군가’라고 쓴 그 ‘일꾼들’의 이름을 카페에 드나드는 회원들은 알고 있었고, 마음에 빚을 졌지만, 처음에 결심했던 것처럼 대표성을 내세우지 않기 위해 그 이름들을 이 지면에 다시 거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둘씩 카페를 떠난 이후까지도 연대 활동을 계속 해나가고 있는 작가들의 이름에, 자격 없지만 미안한 마음으로 나는 입을 맞춘다.) 선언문 낭독 당일, 내 기억에는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한 차례 기자회견 겸 선언문 낭독이 있은 다음, 대한문 앞으로 옮겨 또 한 번 선언문 낭독이 있었던 것 같다. 기자들이 선언문 작성자가 누구인지, 이 모임의 리더가 누구인지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당시 경찰들이 상주하던 시청 광장 근처였는데도, 아무도 우리를 탄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이 말은 주목받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우리는 소소한 문화계 뉴스거리가 되었을 뿐, 아무도 가로막지 않는 대로를 건너 맥줏집으로 갔다.

 

지나친 비장함이 없었던 게 마음에 든다. 소소한 목표 달성이 마음에 든다. 늘 골방에 있던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그래도 모여서 뭔가 했다니 대견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씁쓸하고 쓸쓸한 기미가 없지 않았다. 훗날 블랙리스트 작성에 이 선언문의 명단이 참조되었다고는 하지만 웬만한 작가들은 정치적 유불리에 크게 좌우되지 않을 정도로 거의 늘 불리한 삶을 살고 있었으니 그렇다 치고, 선언하는 작가들을 즉각 탄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지나는 사람들도 멀거니 바라보는 현실은 문학 자체의 지위가 얼마나 왜소해졌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문학의 지위의 왜소화’는 사실 나(우리)에게는 작가/시인에 대한 지난 시절의 낭만주의적인 환상화에 대한 나 자신의 반감과 동시적인 것이었고 어쩌면 동일근원적일지도 몰랐기 때문에 두 번 꼬인 자괴감을 자아냈다. 나를 비롯해 이 선언의 명칭을 두고 고민했던 (아마도) 여러 사람들에게는 ‘작가’와 ‘시민’이 과연 분리되는 것인가 하는 괴로운 고민거리가 문학의 본질과 분업과 노동 개념에 대한 숙고로 이어지는 꾀까다로운 문제의 정서적 고통으로 확장 심화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 심난함은 이런 생각의 연쇄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중에 ‘맑고 순정한 시의 영혼’으로 정치적 퇴행에 맞서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어! 시가 순결하다고 믿는 미학적 분리주의자가!--어떡하지, 나는 차라리 작가선언보다는 백수선언이 어울릴 것 같은데—작가선언이라는 명칭은 무엇을 표상하는 것일까? 그것은 모름지기 ‘작가 선생님들의 선언’이라는, 다시 말해 지식인들의 선언이라는 것을 은근히 암시하지 않을까?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까?--그 사안이 왜 그렇게 불편하게 여겨지는 거지? 작가선언이 특별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우리의 목표를 위해서는 큰 일이 아닌가?--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작가들에게 오랫동안 씌워져 왔던 세간의 환상이 강화되는 것을 은근히 간과하고 그로 인해 암시하게 될 어떤 특별함,

 

자기의 특별함에 취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 같아. 그런 사태를 생각만 해도 오글거리고 속이 메슥거리는 불쾌한 느낌이.

 

단 한 줄을 쓰기 위해 그토록 고심해서 퇴고하여 세련되고 미학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이려고 공을 들였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그 선언으로 당시 정부가 내세운 ‘중도실용주의’를 분쇄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 선언으로 용산 참사에 대한 사과를 이끌어내지도 못했다. 광장의 차벽도 철거하지 못했고 문예위나 한예종 사태 해결에 힘을 보태지도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뼛속부터 문학의 문학성과 시민의 정치성 사이로 찢어졌고, 따라서

 

더 이상 환상에 기댈 수 없다는 부끄러움이, 옷도 살도 발라내고 뼈만 남은 수줍음이, 그래서 오랫동안 우리를 사로잡을 문학과 우리 자신에 대한 영원한 질문들이, 우리가 꾹꾹 밤새 한 방울씩 쥐어짜서 모은 갈등의 즙이, 그날의 느슨한 연대가 나에게 준 진짜 선물이었다. (끝)

 

#6.9작가선언 #시와정치 #아무도탄압하지않았다 #느슨한연대 #작가선언보다백수선언

 

정한아/ 시인. 공부 노동자. 작가선언의 최초 모임과 그 다음 모임에 참여했지만 열심히 하지 않고 한 줄 적으면서 벌벌 떨었던 사람. 사실 미학과 정치보다는 신학과 범죄학에 관심이 더 치우쳐 있다. 마음속에서 수도사와 짐승이 거의 항상 싸우고 있다. 마음은 동물인데 몸은 거의 식물적. 계속 읽고 배워야 하는데 쓰고 가르치는 일로 벌어야 해서 괴로운 사람. 우리 고양이가 그만 자러 가자고 자꾸 물어서 약력은 그만 씁니다.

 

-<웹진비유> 2019년 12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