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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어차피즘 연구를 위한 메모

1. 어차피 씨는 누구인가

어차피 씨가 언제부터 어차피 씨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일주일에 서너 번씩 만취하고 나머지 3, 4일은 숙취를 벗어나느라 바빴던 젊은 시절에 그는 소위 X세대라는 그룹에 속해 있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비슷한 시기 신세대나 오렌지족도 있었지만 신세대는 뭔가 뒤쳐진 낱말 같았고 오렌지족은 계급적으로 한정되어 위화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X세대라 불리는 편을 선호했던 것 같다. 어차피 세대에 대한 명명은 윗세대 사람들의 일이니까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었겠지만, 나이 들고 보니 그나마 X세대가 가장 중립적인 명칭으로 여겨졌던 듯 싶다. 7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졸업할 때쯤 IMF 사태를 맞닥뜨린 사람. 친구들 중에는 선배들이 차린 IT 벤처 기업에서 일하다 거품이 꺼지면서 직종을 바꾼 사람들이 여럿 있었고, 말 잘하고 학생회에 발 담근 적 있는 사람들은, 역시 선배들이 차린 학원에서 논술 강사로 제법 돈을 벌기도 했다. (그런 신생 업체들의 인사고과 항목에는 으레 ‘진정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21세기 들어선 다음의 일이고, 나라가 파산했던 당시 그와 그의 친구들은 대개 이런 생각을 했다고 전해진다. 내가 망한 게 아니라 나라가 파산한 거다. 나라가 파산해서 경로가 사라졌으니 계획했던 인생행로라는 것이 있을 리 없다. 어쩐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싫은 일을 피해서라도 사는 수밖에.

 

2. 세대론적 문화사적 해석은 가능한가?

그는 이게 경제적으로 나라가 망한 결과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전세계적인 추세였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런 국가적인 외환위기가 들이닥치기 전부터 그랬다. 그가 좋아하던 노래는 벡의 “Loser”와 라디오헤드의 “Creep”이었고, 이 곡들은 영미권에서도 차트를 석권하고 있었다. 그가 딱히 막 개성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90년대 말에 이런 노래들은 그 세대의 만가(挽歌)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홍대 클럽에서는 하룻밤에도 대여섯 번씩 저 노래들이 흘러나왔고, 그러면 RATM을 들으며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짐짓 전의를 불태우는 제스처를 취하다가도, 심장을 찌르며 흐르는 핏물 같은 서늘하고 우울한 노랫소리 속에서 다들 제 가슴에 제 얼굴을 파묻고 팔다리를 흔들었던 것이다. 그의 친구들은 모두 이런 노래들을 좋아했다. 좀 하드하거나 유치하고 명랑한 노래를 좋아하는 친구들도 오프스프링의 “Self-esteem” 같은 노래나 그린데이의 “Basket Case” 같은 것을 들었다. 이 노래들을 오늘날 자주 쓰이는 말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차피 난 쓰레긴걸, 뭐, 어차피 난 아싸인걸, 뭐, 어차피 난 찌질인걸, 뭐, 어차피 난 찡찡인걸, 뭐(여기서 ‘찡찡이’는 현 정부의 퍼스트캣을 일컫는 것이 아님). 그러니까, 인구분포도에서 그 세대의 인구가 차지하는 면적이 적지 않았는데도, 2차 베이비부머의 끝자리를 차지하고서도, 어차피 씨와 그의 친구들은 단체로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 같다. 일찌감치 그의 세대가 열광했던 밴드 너바나의 리드보컬 커트 코베인이 갑작스러운 인기에 괴로워하며 엽총으로 힘들게 자살했을 때, 그가 아내 커트니 러브에게 남긴 유서의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어차피 난 물고기자린걸, 뭐.” 영문학을 전공했던 어차피 씨의 친구는 비평가로 알려진 매슈 아널드가 사실 소설도 썼다며 그가 쓴 단편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자살하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주었다. “어차피 난 염소자린걸, 뭐.”

 

3. 어차피즘의 계보학은 가능한가?

그나 그의 친구들은 이런 일화들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다.물고기자리라서 죽고 염소자리라서 죽은 사람들의 어록을 찾아내고  “찌질이니까 죽여줘”라든가 “자존심 따윈 없으니까 날 무시해도 널 사랑해” 같은 가사의 펑크음악을 들으면서 어차피 씨와 그의 친구들은 세계의 고통을 자기혐오로 감싸 안는 대안적인(얼터너티브한) 예술적 감상에 물들어 있었던 것 같다. 어차피 씨의 짐짓 패배주의적인 인생관은 그러니까, IMF 때문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전지구적으로 유행했던 찌질이 신드롬 때문만도 아닌 것 같다. 만일 그렇다면 매슈 아널드의 100년도 더 된 어차피즘은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차피즘은 고래로부터 늘 있어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길바닥에 사는 주제에 알렉산더 대왕에게 햇빛 가린다고 머리 치우라 했던 디오게네스나 쓸데없이 너무 많이 웃어서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던 데모크리토스 같은 고대의 희랍인들도 약간 어차피스트 냄새가 나니까 말이다. (데모크리토스는 거의 다 망실되기는 했지만 엄청나게 많은 책을 썼다는 기록이 있어서 지나치게 성실한 수정주의적 어차피스트였을 거라는 추측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그는 세상만사는 어차피 다 결정되어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사실 20세기 말에는, 너무 열심히 사는 것이 문화적으로 좀 깨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약간 조롱거리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약간 귀족주의적인 거만함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 거만함이 싹 가시고 ‘찐 어차피즘’(어쩌면 ‘네오 어차피즘’)이 수면 위에 드러난 것은 21세기가 시작되고 첫 10년이 지나기 전이었다.

 

4. 21세기 네오 어차피즘

돌이켜보면 그와 그의 친구들 중에서 이런 정신을 끝까지 고수한 사람이 아주 많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어차피 씨는 어차피즘을 고수했고, 그런 그에게 극도로 정신적인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었던 것은 약 7년 간 홍대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다 사라진 타바코 쥬스라는 밴드의 리드 보컬 권기욱의 2009년 무렵의 인터뷰였다. 그는 무덤덤한 어조로 말한다. “내가 요즘에...나루토를 보고 있는데, 느낀 게.. .존나 열심히 안 하면 안 될 거 같애. 근데 우린 열심히 안 하잖아.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이 인터뷰는 인디 밴드를 주제로 한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한 부분인데, 영화 전체를 본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깨달은 자의 인터뷰의 일단은 엄청난 밈이 되어 월드와이드넷을 방랑했다. (점령하지는 않았다. 점령은 어차피즘과 거리가 먼 단어다.) 어차피 씨는 ‘열심히’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우린 안 될 거야’로 급선회하는 이 무심한 어조의 인터뷰 밈으로 인해 언제건 지구에 열혈 어차피스트 동지가 있다는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뭔가 약간의 반전이지만, 이 인터뷰의 영향이었는지 권기욱은 투니버스판 나루토의 오프닝곡을 불렀지만 말이다.

하지만 상상할 수 있다시피, 어차피즘은 연대가 매우 곤란한 사상이다. 어차피스트들의 욕망은 좋은 차, 넓은 집, 멋진 배우자와 토끼 같은 자식들에 있지 않고 오히려 미니멀하고 명랑한 니힐리즘적 소망—‘남들이 원하는 걸 무리해서 얻고 싶지 않아’—에 있기 때문이다. 무리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연대는 매우 드물다.

 

5. 어차피즘은 당신의 영혼을 잠식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질문할지도 모른다. 어째서 그런 재미없는 사상 따위에 누군가 관심을 보이겠느냐고.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자기 자신에 관해 생각해본다면,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떠올려본다면, 당신 역시 어차피 씨를 순수하게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가령, 당신은 이유 없이 잠 못 이루는 깊은 밤, 고양이가 등장하는 유투브를 한없이 들여다본 적이 없는가? 고양이는 현존하는 극렬 어차피스트들이다. 그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밥은 먹지 않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품에는 안기지 않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집에서는 기회를 엿보아 탈출해버린다. 그리고 차라리 길에서 사는 삶을 택한다. 무슨 더 위대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를 사랑해주기를 원하는 노예근성에 물든 인간과 밀당을 하기 위해서도, 더 좋은 밥을 협상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단지 싫은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며, 무리해서 남의 욕망에 맞추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21세기가 되고 첫 10년이 지나자 어차피 씨처럼 고양이를 정신적 동지로 삼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진정한 어차피스트들은 고양이를 무리해서 안으려 하지 않는다. 그의 동지가 가끔 변덕스럽게 무릎에 올라와 잠들었을 때 부러 깨우지 않을 뿐이다. 그들의 존중은 무리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다. 그리고 어차피즘의 긴 역사에서 예외적이게도, 인터넷 세계를 점령했다.

잃을 것은 어차피 피로와 지루함뿐, 어차피 씨는 오늘도 자기계발서 제목이 농담인 줄 알고 자기의 소소한 삶을 소소하게 산다. 그리고 미래의 어차피즘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어차피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끝)

  -(20210713 yeon_doo blog Prism)

어차피즘의 거봉 타바코 쥬스 권기욱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