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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오인된 적자생존과 헐값의, 위험한 자유

외과 의사이자 생물학자였으며, 훗날 우리에게 『멋진 신세계』라는 서늘한 새타이어로 가득 찬 디스토피아 소설의 작가로 알려진 올더스 헉슬리의 할아버지인 토머스 헉슬리는 1888년, 「인간사회에서의 생존경쟁」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은 매끄러운 필치로 이제 유럽 세계의 상식이 되어가고 있는 다윈의 진화론을 인간사회에 적용하여 자연은 도덕적이기보다는 지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며, 우리가 이상사회로 가는 어떤 단계에 속해 있든 “모든 현존 가능한 세상을 놓고 볼 때 지금의 세상이 최고가 아니라 해도, 지금이 최악이라는 말은 그저 별난 사람의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자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제한 없이 증가하고 번식하는 한 평화와 산업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전쟁 체제와 다름없이 치열한 생존경쟁이 따르는 것은 물론이고 결국 이러한 생존경쟁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상냥하고 휴머니즘적인 가장이었고, 대학에서는 동화 <잭과 콩나무>와 생물학을 접목하여 도덕적 당위와 현실의 괴리를 강의하고 테니슨의 시 <율리시즈>로 마무리하는 ‘융복합적 인재’였던 것 같다. (르네상스식의 ‘전인’과 오늘날의 ‘융복합 인재상’을 비교하면, 후자에 첨단 과학기술 응용능력이 훨씬 강조된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자.) 「인간사회에서의 생존경쟁」역시 그의 인물 됨됨이처럼 시와 신화와 당대 최신 과학을 적절히 인용하고 문체에 교양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견해와는 달리 상당히 품위 있게 읽히지만, 골자는 명확하다. 인간 세계는 끝없는 무한경쟁이고, 우리는 능력에 따라 살아남아야 하며, “퇴보 역시 진보적 변형만큼 실용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다고?

 

헉슬리 글의 전체적인 맥락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을 온화한 보수주의자로 겸손하게 칭하는 사람들마저도 더러 세상이 능력에 따라 온당한 보상을 하도록 하는 것이 정부의 도리라며 남들보다 더 많은 투표용지를 요구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자기는 ‘빡센’ 경쟁에서 훌륭하게 살아남았으며, 모든 자연의 섭리와 마찬가지로 승자가 먹이를 더 많이 차지하는 것이 인간 세계에서도 역시 응당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촉망받는 지리학자였던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1914년, 12년 만에 개정판을 발간하면서 『만물은 서로 돕는다』 개정판 서문에 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이 사용하던 ‘생존경쟁struggle for existence’이라는 용어를 문제 삼으면서 너무 많이 유행하는 이 용어에 관해 누군가 <타임스Times>에 반박 편지를 보낸 사례를 쓰고 있다.

 

그런데 <타임스>에는 이런 설명 방식이 다윈의 용어를 남용하는 것이라고 반박하는 편지가 실렸다. 즉 그러한 설명은 “다윈 이론에 대한 조잡하고 통속적인 오해에서 비롯된(‘생존경쟁’을 ‘권력의지’와 연결짓고, ‘적자생존’을 ‘초인’과 연결짓는 식의) 관념들을 철학과 정치학에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과 더불어 편지에는 “생물학적이고 사회적인 진보를 야수적 폭력이나 교활함이 아니라 상호협동의 관점으로 해석한” 영어 저작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 “영어 저작”은 바로 그 서문이 실려 있는 『만물은 서로 돕는다』의 개정 전 초판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는 앞서 이야기한 토머스 헉슬리의 글을 비롯하여, 당대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던 허버트 스펜서 등의 적자생존론에 대한 반박으로 이 책을 6년간 집필했다. 아나키스트라는 명칭 때문에, 그리고 아나키즘이라는 어휘에 부당하게도 (아마도 폭력적 아나키스트였던 미하일 바쿠닌 탓에) ‘무질서’와 ‘폭력’이라는 인상이 덧붙여졌기 때문에, 오늘날 그의 책을 진지하게 자기 철학의 일부로 받아들이려 읽는 보통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가 이 책을 통해 곤충에서 인간의 사회사까지 아우르는 생물학적이고 역사적인 온갖 관찰 사례들을 인용하며 주장하고자 한 것은 전혀 파괴적이거나 ‘혼돈의 카오스’에 대한 편향이 아니었다. 그의 주장은, 유럽 사회가 니체와 다윈의 개념들을 마구 버무려 혼동한 ‘생존경쟁=권력의지’나 ‘적자생존=초인’이란, 개체 차원이 아니라 종 차원에서 생각되어야 했을 다윈의 용법에 대해, 범주의 오류를 범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즉, 우리는 ‘적자생존’이나 ‘생존경쟁’을 생각할 때 ‘친구의 머리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학교 교실’이나 ‘더러운 사내(社內) 정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홉스 식 투쟁 상태’를 생각하지만, 실제로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논하고 있는 것은 개체보다는 종 차원의 유리한 생존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실증하기 위해 크로포트킨은 협력적 특성을 가진 생물종이 어떻게 혹독한 기후, 포식자, 지형 등을 극복하며 번성했는지 서술한다. 그는 중세의 길드와 (우리로 치면 두레나 품앗이 같은) 촌락의 관습이 어떻게 공동체를 보호하고 결과적으로 인간이라는 종의 생존에 도움이 되었는지 상세한 예시들을 보여준다. 일정 금액을 정기적으로 부어 우연한 위험과 사고에 대비하는 보험이나 계, 같은 금액을 지불하고 각 개인의 필요에 따라 취식하는 뷔페의 메커니즘은 모두 이 상호부조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거나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이토록 길게 서술하고 있는 이유는 ‘적자생존’이나 ‘생존경쟁’ 따위의 관념이 여전히 우리를 포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쟁에는 유치원생의 영재지능검사부터 지방선거 공천 자격시험에 이르기까지지 예외를 두지 않는 시험과 평가제도, 미스트롯/미스터트롯부터 Physical 100까지 재능과 체력을 시험하는 콜로세움 식 오디션 엔터테인먼트, 요리 대결, 조회 수 대결, 재력 대결, 기타 ‘있어 보이는’ 대결에서 랭크가 결정되어야만 내일의 각오와 인생의 목표가 확정되는, 누구나 참여자이며 참관자인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의 먹이사슬을 이룬다. 크로포트킨에 의하면, 오해된 지 140년이 넘도록 이 ‘과학적’인 용어는 오해된 채로 사용되고 있는 중이다.

 

‘적자생존’이나 ‘생존경쟁’ 같은 단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어떤 부류는 ‘자유’ 같은 단어도 자기 식으로 전유해서 사용하기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크로포트킨 같은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도 관료주의로부터의 탈피를 주장하고 분업을 반대하며 개인의 자율성을 최대치로 발휘하는 상황으로 공동체가 성장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그래서 보다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볼셰비키에 의해 패퇴했지만) 그때의 자율성은 대체로 개인의 성향이나 창의성에 맞추어져 있지 ‘규제 없이 기업 할 자유’나 ‘합의 없는 유전자 가위 실험의 자유’나 ‘에잇, 우리도 핵무기 개발할 자유’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자유 좋아한다. 원고 마감으로부터의 자유, 오이디푸스 삼각형으로부터의 자유, 주택 중도금 대출 상환으로부터의 자유, 뉴스에서 보기 싫은 사람 거를 자유, 밤새 샘 스미스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솔리테어를 하고 다음 날 종일 뒹굴거릴 자유... (이 모든 자유를 단번에 실행하는 것은 나의 ‘자립’을 방해할 것이다.)

하지만 17분짜리 국가 원수 취임사에서 ‘자유’를 서른다섯 번이나 쓰고서 양극화를 기술혁신으로 해결하겠다는 알쏭달쏭한 요지를 파악하고 나면, 그 자유가 누구의 어떤 자유인지 몹시 궁금해진다. (이 요지는 같은 사람의 2022년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반복된다.)

 

그렇다고 어휘 용례의 변화를 전부 훼손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언어는 커다란 강과 같아서, 우리가 발 담그고 있는 강물이 30년 전의 것과 같을 것이라 생각하는 건 착각일 것이다.

가령, ‘자유’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생각난다. 양심에 따라 자유를 실행했을 뿐이라는 그의 반성 없는 범죄 행각은, 뉴스를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사형을 선고하는 나의 속사람이 가진 은밀한 환상과 많이 닮아 있다. 그 생각은 ‘환상적인 자유의 실행’과 ‘행복’이 필연적인 연관성을 가지지 않을지 모른다는 가설에 힘을 준다. 또는, 로버트 노직의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라는 책이 “자유주의 국가의 철학적 기초”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던 사실과, 그 책이 얼마나 미국 중심적인 비현실적 사고실험으로 국가 구성 과정을 신화화했는지 떠올린다. 구한말 지식인들과 독립 운동가들이 ‘자유’를 ‘자주’로 대신했던 사례를 접하면서, 나는 1980-90년대 대학가를 점령했던 ‘자주’와 짝패였던 ‘해방’을 함께 떠올렸지만, 분명 나의 아버지 세대는 ‘자유’와 대립어로 ‘북한’을, 이른바 86세대인 이종사촌은 연관어로 ‘4.19’와 ‘민주화’를, 그러나 밀레니엄 키드인 나의 동생은 ‘어쩌라고?’ 반문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생활에서라면, 어느 날 친한 친구가 내게 다가와 “난 이제 자유야” 하고 말한다면, 나는 걱정하는 마음으로 친구가 광신도집단에 가입한 것은 아닌지, 이혼을 하거나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동안 주시할 것이다. 단어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경험의 총체로서의 인상들을 거느리고 자기 표정을 바꾼다.

개념어들이 시대적 경험에 따라 표정이 바뀐다면 또래집단의 입말은 일시적으로 실제 대체되기도 한다. ‘웬열’은 ‘레알’로, ‘왕짜증’은 ‘킹받네’로, ‘당근이지’가 ‘쌉가능’으로 대체되고 애인에게 ‘여보야’라고 부르는 일이 공공연해지는 동안 2천 년대 이전까지는 대개 미혼의 남자들이 애증을 담아 자신의 아버지를 지칭하던, 거의 사장되다시피 했던 ‘꼰대’ 같은 단어가 갑자기 외연이 확장되기도 한다. ‘중2병’은 연령에 상관없이 공통감각에 스며든다. (중2 때 즈음 다들 살짝 미쳐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자연스러운’ 언어의 변화 자체에는 아무 잘못도 없다. 말은 매뉴얼(가령 사전)에 명시된 원본과 잘/잘못 사용되는 용례가 있는 게 아니라 거꾸로 귀납적인 방식에 의해서, 많이 사용하는 용례를 ‘따라서’ 기록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말은 발굴되기도 하고 재해석되기도 한다. 사용자들의 문식력과 교양수준에 따라 더 풍부해지기도 하고, 빈곤해지기도 하고, 신경질적이 되기도 하고, 싱겁거나 짜지기도 한다.

 

어쩌면 19세기 말의 유럽의 오인된 어휘가 과학과 철학과 정치적인 주요 개념들의 오독과 혼동이 판세가 유리한 사람들의 의식적/무의식적 욕망과 결합한 결과였다면, 오늘날의 문제는 오인과 오용보다는 말 전체의 주가 폭락과 더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짧은 연설에서 어떤 단어가 너무 많이 사용되었다면, 가령 그것이 ‘자유’라면, 그가 수감자가 아닌 이상, ‘자유’의 가치가 당분간 폭락한 나머지 휴지조각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 폭락한 가치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자기가 하는 말도 믿지 않는 것 같다. 전자문화 이전이었으면 구술 형태로 날아가 버렸을 무수한 추임새(‘ㅋㅋ’와 기타 초성 중심의 유사 의성어 변형들), 예의상 하는 빈말(‘우와, 굉장하네요’, ‘최고’, ‘잘 지내고 계시죠? 다름이 아니라..’), 술에 취해 남긴, 내일 아침이면 후회할 속엣말(‘자니?’)이 전부 박제되어 다대다(多對多) 공유 메커니즘 속으로 빨려 들어가 혼합된다. 시가 조각조각 잘려 맥락이 제거된 채 순간적인 감정 거래에 사용되고 뉴스 포털에는 이렇다 할 논평도 없는 하나마나한 말들이 “알고 보니 헉...”, “잘 나가던 아무개, 결국...” 같은 미끼 제목을 달고 저수지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갈등의 공정을 거치지 않은 글자들이 말 값을 계속 깎아먹는다.

 

나는 지금 휴지가 된 ‘자유’를 자꾸 생각하고 있다. 자유는 사랑과 정의 같은 말과 마찬가지로, 무슨 뜻인지 본래 알 수 없는 말이다. 진짜 자유, 진짜 사랑, 진짜 정의를 가정하고, 그 중 진짜 원조 자유, 여기가 진짜 원조 사랑, 찐 진짜 원조 정의를 ‘발견’하려던 과거가 있기는 했었다. 아직 교양이라는 것이 통용되던 20세기에 ‘자유’는 아이자이어 벌린에서 퀜틴 스키너를 거쳐 ‘자유의지’나 ‘자율성’, ‘자유주의’ 등과 연접되어 자주 메인 요리 재료로 쓰였다. 이 정초주의적이고 본질주의적인 시도는 고된 노력 끝에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는데, 자유, 사랑, 정의, 행복, 윤리, 우정 같은, 우리가 ‘감은 잡아도 확실히 알 수 없는’ 좋은 단어들은, 정의하고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충실을 다해 실행하고 그때그때 발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한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 자체가 거의 멸칭이었다가 특정한 용기를 지닌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그 뉘앙스가 서서히 변해갔다) 이 말들은 데리다가 ‘윤리’에 대해서 이야기했듯이, ‘보험에 들어 있지 않다’. 이 말들은 실로 생생한 체험을 이르는 실행 프로세스 전체의 이름이지 인내심을 가지고 오래 앉아 있으면 낚아 올릴 수 있는 물고기의 이름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말들이므로, 깊이 체험할수록 당신을 미쳐버리고 싶게 만들 수도 있다. 위험하니까.

 

그 위험을, 무언가 쓸 때마다 감수하려고 작정한 사람들이 아직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쉽게 쓸 수 없어서 아직 눌변인 사람들, 글말의 변비를 앓고 있는 사람들, 삶에서 실행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우리는 이 말들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여기에 대해 물음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확정된 본질이 아닌, 결정론적인 내용이 아닌, 불가능한, 도래하는 것으로서, 그러나 실제로 실행되고 있는 그것에 대한 당신의 충실에 입맞춤을.

 

그리고, ‘누가 이 피로를 끝장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불가지론자이거나 무신론자, 혹은 포스트모던 신학에 공감하는 당신의 입술에서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올 때, 그 모든 결정 가능한 것과 결정 불가능한 것 ‘사이’의 흔들림이 끝장나고, 그 흔들림이 초래하는 피로가 끝장나기를 소망할 때, 당신은 기억할 것이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기도가 시의 수원(水源)이라는 것을. 원고지 4만 매 분량의 『토지』의 작가가, 사이사이 시를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그리하여 나는 30년 전의 시를 존중과 함께 되새기고,

 

(전략)

오 내 팔뚝에 뱀의 살 무늬가 새겨지는 것을 지켜보는 이 슬픔,

새들도 자본 자본 하며 울 날이 오리라.

 

(나에게 뽀스또 모단의 방식을 가르쳐다오,

나는 왜 이렇게 정통적으로밖에 얘기할 수가 없는지.)

-최승자, "자본족" 부분, <내 무덤, 푸르고>(문학과지성사, 1993)

 

 

괄호 속에 놓인 마지막 말을 재서술할 다른 말들을 궁리한다. 위험하다. 아니다. 아직-이미 ‘자본’에 관해서는, 이 글의 배경에 속속들이 배어있는데도 말할 준비가 안 됐다.(끝)

-<문학과사회> 2023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