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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 마르타 바탈랴, 김정아 옮김, 『보이지 않는 삶』, 은행나무, 2019. 이 책의 띠지, 출판사 서평 등에서 가장 먼저 인용하곤 하는 것은 51쪽에 쓰여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이 책은 무언가가 됐을 수도 있는 여성, 에우리지시 구스망에 대한 이야기다. 이 문장을 읽고 나면 한 여성의 곡절 많은 인생 서사가 펼쳐질 것 같지만, 책은 우리의 기대와는 약간 다르다. 이 책의 태반은 에우리지시와 그녀를 둘러싼 모든 이들의 삶에 관한 브리핑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으며 떠올린 것은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과 4대에 걸친 모계 중심 대안 가족의 서사를 다룬 네덜란드 영화 이었다. 이 소설은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 주인공들에 투영된 자기 과시적이며 마초적인 나르시시즘과 마술성..

지난 글/review 2020.11.27

발효하는 황홀(일레인 스캐리, 『아름다움과 정의로움에 대하여』)

일레인 스캐리, 『아름다움과 정의로움에 대하여』,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2019 아름다운 소년이나 꽃이나 새가 현존하는 곳에 서 있는 순간 느껴지는 인지 경험은 무엇일까? 그것은 복제 행위를 부추기는, 심지어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눈이 아름다운 무언가를 볼 때, 손이 그리고 싶어 한다고.(11쪽)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대학 시절이었던 1996년, 리처드 로티의 대표작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에 간접적으로 인용된 『고통받는 신체』의 한 대목을 통해서였다. 로티에 의하면 스캐리는 그 책에서 “누군가에 대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은 그로 하여금 심한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고통이 지나간 다음에도 그가 자신을 추스릴 수 없게끔 그 고..

지난 글/review 2020.10.29

친애하는 바디우 할아버지께, XOXO, 정관사 없는 나라의 독자로부터

알랭 바디우, 『참된 삶』, 박성훈 옮김, 글항아리, 2018 이념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는 버림받고 길을 잃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될 수 있는 것을 향해, 여러분의 진정한 현실인 무언가를 향해 떠날 수 있음을 생각한다. 주체로서의 여러분은 결코 자기 집을 단단히 지어 올림으로써 실현되지 않으며, 따라서 주체는 그 자신을 향해 떠날 수 있어야 한다. 전통이란 그저 오래된 집일 뿐이며, 방황의 횡단은 그 집에 어떤 새로운 긍정(단언)을 만들어낸다. 그럴 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자리에 관한 하나의 새로운 상징화를 얻게 된다. 참된 집은 사유와 행위의 모험으로 여러분이 집을 떠나서 거의 잊어버릴 쯤에야 발견할 수 있는 무엇이다. (60쪽) 살아 있는 철학자 중에 알랭 바디우와 슬라보예 지젝만큼 책을 ..

지난 글/review 2020.08.01

당신 안에서 누군가 키득거릴 때

왕웨이롄, 김택규 옮김,『책물고기』, 글항아리, 2018. 중국 동시대 작가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에게는 어떤 편견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사실 동시대 작가의 글을 잘 읽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세대 작가들의 책을 부러 읽는 때가 별로 없다. 내가 그런 글을 읽을 때는 어쩌다 펼친 문학잡지를 우연히 계속 읽게 된 경우거나, 친구의 책이 나왔거나, 누군가 보내온 책을 계속 읽게 되었을 때나, 일 때문이다. 나의 작은 서재에는 아직도 내가 ‘정말로 읽고 싶어서’ 샀지만 차일피일 미루며 읽지 않아온 고전들이 가득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책을 일 때문에 읽었다. 왕웨이롄이라는 작가는 올가을에 열리기로 되어 있는 국제작가축제의 초대 작가 중 한 명인데, 어쩌다가 이..

지난 글/review 2020.07.03

‘보람 있다’는 게 어떤 느낌이더라?

* 오야마다 히로코, 한성례 옮김, 「공장」, 『구멍』(걷는사람, 2017) www.yes24.com/Product/Goods/50327309 일하고 싶은 마음이 실현되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물론 나는 일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일하고 싶지 않다. 삶의 보람이나 삶의 의미와 노동은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예전에 연결된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연결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다. 이런 생각을 이쓰미 씨에게 말하면 또 고기 먹으러 갔을 때처럼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한다는 말을 들을 것 같다. 그런 게 아니다. 일과 노동에 이르기 위한 지금까지의 과정은 싸움이라고도 말하지 못할 정체 모를 기묘한 일이다. 자신의 내면이 아닌 외부 즉, 다른 세계의 일이..

지난 글/review 2020.06.08

그저 인간이 되는 것만도: 알베르 카뮈,『페스트』

* 참고한 판본은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페스트』(책세상, 1992(1947))이다. “그런데, 타루.” 그가 말했다. “뭣 때문에 이런 일에 발벗고 나서지요?” “나도 모르죠. 아마 나의 윤리관 때문인가봐요.” “어떤 윤리관이지요?”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초년에 『이방인』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유망주로 관심을 한 몸에 받던 알베르 카뮈는 흔히 장 폴 사르트르와 함께 대표적인 실존주의 작가로 불리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자신을 포함한 세상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방인』의 심드렁한 주인공 뫼르소는 세계에서 자기 존재의 근거와, 욕망과 동경과 활기를 잃어버린, 오직 우연한 세계에서 방황하고 있는 방랑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19세기 내내 유럽은 신이 죽어버렸거나, 혹 존재한다손..

지난 글/tender 2020.05.29

한재범, 교환일기

교환일기 한재범 모두가 이 이야기를 안다 이른 새벽마다 매일 교실 문을 열던 선배가 겪은 일 평소처럼 커튼을 열었는데 창가에서 유령이 나왔다는 이야기 유령의 발처럼 가벼운 이야기를 아이들은 좋아하지 그 선배 같은 아이는 해마다 반에 한 명씩 있으니까 커튼을 열면 유령이 나올까 그런 기대감에 매일 새벽 등교를 했는데 어느 날은 네가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어두운 교실에 들어와 커튼을 연 후에야 너를 발견했다 맨 뒷자리에 앉아 엎드려 있던 너를 무슨 일이냐고 물을 수는 없어 네 옆에 놓인 작은 노트를 펼쳤다 “아래층 할머니 잘 살아있을까 언젠가부터 아무리 뛰어다녀도 시끄럽다고 올라오질 않았지 이젠 뛸 사람도 없을 텐데 엄마는 아직도 베란다에서 나무를 기를까 동생은 여전히 몰래 베란다에서 담배를 필까 모두 다..

text & context 2020.02.26

어떡하지, 나는 작가선언보다 백수선언이 어울릴 것 같은데

어떡하지, 나는 작가선언보다 백수선언이 어울릴 것 같은데 - 6.9 작가선언이 나에게 가져다준 것 정말이지, 나는 이 원고의 청탁을 왜 덥석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처음 6.9 작가선언에 대한 짧은 에세이를 부탁한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잠시 망설이다가 쓰기로 한 것은 어떤 부채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면서 점점 확실해지는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하고 나는 사실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후회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대학로에서 첫 모임을 가졌을 때 참석하기는 했었다. 처음에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누구였더라? 아무튼 노무현 대통령이 강압적인 검찰 수사 끝에 투신하고 며칠 뒤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고, 우선 모이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는 전화를 받았다. 두 민주계 대통령의 집권 10년을 거치면..

지난 글/tender 2020.02.16

일어권 독자를 만나는 마음

오래 전 캐나다에서의 일입니다. 유키와 저는 짧은 영어로 대화하면서 친구가 되었습니다. 저는 일본어를, 유키는 한국어를 못했지요. 영어 학교의 짧은 학기가 끝나고 그녀는 미국으로 가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횡단여행을 떠났습니다. 가는 도시마다 그곳 엽서를 저에게 보내주었는데 워싱턴 시에서 보낸 엽서에는 빌과 힐러리 클린턴 부부의 사진에 “Buy 1 & Get 1 Free!”라는 재미있는 문구가 쓰여 있었어요. 그녀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답장을 쓸 수 없었습니다. 저는 가끔 시가, 우리 사이에 오가던 비문투성이 영어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네, 그것은 문법이 엉망이지만 거의 텔레파시에 가까웠을 거예요. 우리가 설령 서로의 말을 오해하고 있었다고 해도요. 오래 전 엽서들에 뒤늦게 답장하는 ..

지난 글/tender 2020.01.17

동경외대 번역 워크샵 강연문

초청해주신 정기인 선생님과 제 시집을 선택하고 읽어주신 동경외대 조선어학과 학생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질문을 전해 받고 생각한 바를 적어보았습니다. 1. 시, 시인, 시 쓰기, 시와 사회 최초로 쓴 시가 어떤 시인지, 그 시를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어릴 적 장래희망은 사립탐정이었습니다. 여덟 살 때 모리스 르블랑의 을 읽은 후부터였지요. 저는 늘 비밀에 관심이 많았고, 수수께끼에 매료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사립탐정이라는 직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몹시 실망했습니다. 열한 살 때 처음 숙제로 시를 썼습니다만, 그것은 학교에서 배운 ‘시라고 생각되는 것’을 의식하고 쓴 것이었을 따름입니다. 자발적인 내적 욕망으로 처음 시를 썼던 것은 열두 살 무렵이었습니다. 사춘기가 막 시..

지난 글/tender 2020.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