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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review

당신 안에서 누군가 키득거릴 때

 왕웨이롄, 김택규 옮김,『책물고기』, 글항아리, 2018.

 

 중국 동시대 작가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에게는 어떤 편견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사실 동시대 작가의 글을 잘 읽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세대 작가들의 책을 부러 읽는 때가 별로 없다. 내가 그런 글을 읽을 때는 어쩌다 펼친 문학잡지를 우연히 계속 읽게 된 경우거나, 친구의 책이 나왔거나, 누군가 보내온 책을 계속 읽게 되었을 때나, 일 때문이다. 나의 작은 서재에는 아직도 내가 ‘정말로 읽고 싶어서’ 샀지만 차일피일 미루며 읽지 않아온 고전들이 가득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책을 일 때문에 읽었다. 왕웨이롄이라는 작가는 올가을에 열리기로 되어 있는 국제작가축제의 초대 작가 중 한 명인데, 어쩌다가 이 축제의 기획위원의 한 명으로 참여하게 된 나는 주최 측에서 보내준 초대 작가들의 기 출간 번역서를 읽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1982년생, 대학에서 인류학과 중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중국 현대문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그리고, 현대 중국문학에 관해서는 과문한 내가 알 수 없는 상을 여러 개 받았다. “광둥성 작가협회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력의 마지막 줄은 영어권이나 유럽, 심지어 아시아라도 일본 소설의 작가 약력에는 소개되지 않을 법하지만, 이상하게도 한국 소설의 표지 날개에는 쓰여 있어도 별로 이상할 것 같지 않아 외사촌조카의 결혼식장에서 만난 먼 친척처럼 희한한 친근감을 준다.

 

 내게 남아 있는 동시대 중국 작가의 인상은 2011년 아시아 시 페스티벌에 참여했던 중국 시인들의, 기합이 빡 들어간 전투적인 자기소개와 실제 번역된 그들의 다채로운 현대적 시편들 사이의 어떤 모순 같은 것이었다. 여러 연령대가 섞여 있어 그랬겠지만, 나는 번역된 시만 읽고는 한국 시 잡지를 읽는 것과 구별이 안 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우리 시단의 어법으로 치면 서정시부터 미래파까지 모든 스펙트럼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설이기 때문에, 아직 사회주의 미학이 강력하게 살아 있다면 훨씬 반영론적으로 현실을 그리고 있지 않을까? 아직 해외여행을 하려면 엄중한 비자 심사를 거쳐야 하는 나라의 작가이기 때문에 비록 젊은 소설가의 작품일지라도 어떤 체제상의 거리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말하자면, 소설은 시인들의 시보다는 그들의 ‘전투적인 자기소개’와 더 비슷하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주 익숙한 느낌 때문에 그런 거리감은 전혀 느끼지 못 했을 뿐더러 오히려 지명이나 풍광 묘사만 바꾸면 한국 작가의 작품을 읽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광둥성 작가협회에서 일하고 있다”에서 느낀 희한한 친근감에 덧붙여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는 그의 독서의 흔적들이 증명하는 것처럼, 일종의 문학적 보편주의라고나 할 만한 것을 그가 지향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의 소설에는 동서 고전의 상호텍스트들이 남긴 흔적이 역력하고, 어떤 작품에서는 고전에 대한 일종의 문학사가적인 첨예성마저 느껴진다.

 

 표제작인 「책물고기」는 그 배경에 카프카의 「변신」을 거느리고 있다. 소설 안에서 화자가 직접 이야기하기도 하거니와, “만약 카프카가 사람을 개, 돼지, 소, 양 따위로 변하게 했다면 그것은 확실히 적절치 못했을 것이다. 너무 익살맞거나 아니면 너무 온순했을 것이다. 혹시 고양이로 변하게 했다면 나쓰메 소세키의 이야기처럼 색다른 재미가 있기는 했겠지만 역시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힘은 덜했을 것이다.” 오래 전 대학원에서 들었던 한 수업에서 카프카의 「변신」을 다루면서 이와 동일한 질문을 던진 교수가 있었다. 헤겔을 전공했던 그는 왕웨이롄의 저 대답을 헤겔식으로 했더랬다. 인간은 자기와 닮지 않은 것일수록 낯설게 느낀다고. 벌레는 생명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인간으로부터 그 유사성을 거의 다 떼어낸 생물이다. 우리는 이미 현대에 살고 있고, 현대가 탈현대가 되도록 현대를 물고 뜯었기 때문에 너무 익숙해져서 감각이 무디어졌지만(이제 벌레는 <에일리언> 전편과 <슈퍼쉽 트루퍼스> 전편을 거쳐 <맨인블랙> 전편에 이르기까지 외계인-타자에 대한 문화적 클리셰가 되었다), 사실 낯선 시대에 갑자기 던져진 인간이 자신의 낯섦을 전달하기 위해 낯선 것으로 변신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뜻밖에도, 그는 이 도입부를 통해 자신이 이 소설을 쓴 계기와 목적 같은 것을 두괄식으로 밝혀놓고 있다. “책물고기(書魚)”라는 단어가 중국어에는 진즉 있었던 모양이다. (한국어 사전에는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데, 신기하게도 한글 프로그램에서 한자 변환키를 누르면 저 단어가 출현한다.) 출판사에 근무하는 화자는 어느 날 책을 읽다가 우리가 흔히 ‘책 벼룩’이라고 부르는 벌레(아마 이건 집 먼지 진드기의 일족이 아닐까?)를 발견하고 뚫어지게 쳐다보다 이 벌레가 앉아있던 책장의 앙코르와트 사원 사진이 3D로 변하여 책벌레가 이 사원의 넝쿨 사이로 기어 다니는 착시를 보게 된다. 그리고는 다음날부터 자신이 하는 말이 메아리처럼 울리는 이상한 증상을 겪게 된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가 처음 변신한 날 아침, 자기 방문을 사이에 두고 대화할 때 식구들이 그의 목소리가 이상해진 것을 연이어 지적했던 것을 기억하면, ‘나’의 변화에 관해 남들이 우선 알아채는 것이 목소리의 변화라는 것은, 설사 소설의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더라도 의미심장한 일이다. 목소리는 본래 고막을 때리는 진동이라, 시신경으로 들어와 뇌를 거쳐 해석되는 글자와 달리 훨씬 물리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레고르가 곧 자기 목소리를 잃고 벌레 우는 소리로 완전히 바뀐 것과 달리 「책물고기」의 화자는 양방에서 치료법을 찾지 못하고 찾아간 한의원에서 자기 목소리의 ‘메아리’가 실은 ‘책물고기’라고도 불리는 신비로운 벌레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화타처럼 신통한 한의사는 『본초강목』을 인용하여 “큰 소리로 각종 약초 이름을 읽다가 어떤 약초에 이르면 벌레가 무서워서 따라하지 않을 것”이며, “바로 그 약을 복용하면 병이 제거될 거”라고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약초 이름을 읽다가 ‘서어(書魚)’, 즉 약으로도 쓰는 그 책벌레의 이름을 읽자, “몸속에서 조그만 웃음소리가 나는 것을” 듣는다. “메아리가 자기 소리를 낸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다른 생명에게 내 몸을 침탈당해 통째로 빼앗길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은 카프카의 「변신」이 한 실존적 개인이 처한 현대적 상황의 부조리를 보여주었던 것과 달리, 20세기의 위대한 작품에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책 읽는 행위가 타인을 내 몸에 들이는 것과 같다고 느끼는 ‘즐거운 독자’의 직업병을 유머러스하게 은유한 환상적인 희극이었던 것이다. 책을 보다 책 병에 걸린 화자가 오래된 책에서 발견한 치료법으로 책을 읽다 책 병을 고친다니. 그리고 운이 좋으면 그는 그러다가 신선이 될 것이다. 읽고 쓰는 업을 가진 사람 중에 책 싫어하는 이 별로 없겠지만, 이쯤 되면 이 작가의 책 사랑은 몹시 사랑스럽다.

 

 맨 앞에 실려 있는 단편 「소금이 자라는 소리를 듣다」도 역시 환상적이기는 하지만 넓은 소금 호수가 펼쳐진 황막한 배경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을 해결하지 못하고 병들어가던 주인공과 그의 친밀한 관계들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책물고기」의 유머는 꽤 의외이면서도 돋보였다. 특히, 많은 진지한 ‘순문학’ 작품들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라는 문학 본연의 목적을 좇다가 때때로 암울하고 심각한 내적 외적 갈등에 빠지고 그런 고통을 향유하는 데 골몰하거나, 반대로 그런 심각성이 싫어 자칫 피상적인 소재주의로 빠지곤 하는데, 이 젊은 소설가가 시치미를 떼면서 이런 멋들어진 농담을 하다니! 그가 가지고 있는 이런 너그러운 인문주의는 가령, 이 책에 실린 다른 단편 「걸림돌」의 마지막에서 화자 샤오콴이 “이 세상은 조금이라도 매끄럽지 못한 것을 못 참아서 너무 평평해져버렸어요. 저도 너무 평평해져버렸죠. 너무 많은 것에 의해 쉽게 매끄러워지고 말았어요.”라고 말할 때 여실히 드러난다. ‘중학생들이 아이패드를 보면서 수업을 듣는 세상’(「책물고기」)에서, 계속 오래된 책을 읽겠다는 결심 같은 것은, 매끄러워지고 싶지 않다는 결심이고 걸려 넘어지고 싶다는 결심이다.

 

 이 책의 뒷부분에 실린 작가 후기에서 그는 이런 ‘평평하고 매끄러운 시대’를 ‘신비한 이야기가 사라진 시대’라고 바꾸어 말하고, 그래서 “우리는 모두 이야기가 없는 사람이 돼버렸다”고 쓴다. 이야기가 없는 사람은, “이야기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효율로 공장에서 찍어내듯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이것이 “오늘날의 소설이 직면한 전대미문의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나는 이 지면에 칼럼을 쓸 때마다 매번 아주 다른 책을 다루겠다고 결심하는데도 처음 썼던 칼럼 주변을 계속 배회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의 후기는 다음과 같은 카뮈의 말로 끝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물음들의 답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카뮈의 어떤 말이 오랫동안 나를 뒤흔들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이십 년에 걸친 황당한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나는 망연자실했고 수많은 내 동년배처럼 격렬한 시대적 혼란 속에서 그저 어떤 감정에 의지해 불안하게 스스로를 지탱했다. 그것은 글쓰기의 영광이었다. 글쓰기가 영광스러운 것은 그것이 어느 정도 뭔가를 감당하고 있으며 그것이 감당하는 것이 단지 글쓰기 그 자체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그것은 내가 내 방식으로, 내 힘에 의지해, 이 시대의 모든 사람과 함께 우리가 공유하는 불행과 희망을 감당하게 만든다.”

-<독서In> 2020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