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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review

마음의 육체와 공석(空席)인 하느님

 김기택의 시집과 황인찬의 시집을 연달아 읽고 있으면 처음에는 육식 동물이었다가 그 다음에 갑자기 초식 동물이 되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에 빠지게 된다. 이 두 시집은 마치 카인과 아벨의 전혀 다른 유일신 숭배 스타일처럼(농부인 카인은 신에게 곡물을, 목동인 아벨은 짐승의 살과 피를 바쳤다) 전혀 다른 존재감의 농후한 냄새를 풍긴다. 이런 비유를 곧장 떠올리는 것은 두 시인 모두 어떤 유형의 신(보편자)적인 것을 암시하거나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음의 유물론: 김기택, 갈라진다 갈라진다(문학과지성사, 2012)


갈라진다 갈라진다

저자
김기택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2-10-1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진 우리의 현실에서 진정한 삶이 희망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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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의 시는 줄곧 생명-폭력이라 할, 마음 밑바닥의 무차별적인 기계적 욕구와 그에 의해 벌어지는 파괴, 탐식 및 그 양상들의 잔인한 면면들을 가장 충격적인 장면들만 핵심적으로 선별하여 전시하는 대담함을 특징으로 해왔다. 이때 폭력적이고 냉정한 기술(description)의 주체이자 대상은 종종 원초적인 생명 본능의 자리인 그것(Id)’이 떠맡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욕구로 충만하고(아니, 차라리 욕구 자체를 종종 지칭하고), 두려움과 연민을 모르며(그래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과 연민을 자아내며), 때때로 독자 자신의 상징적 자아 아래 숨어 있는 그것의 존재를 가시화하여 자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마치 원생생물처럼 입이 곧 항문이고, 고대의 신처럼 자동사이자 타동사이며(불처럼 스스로 타면서 만물을 태우고, 즉 자기가 자기를 추동하며), 과대망상증자의 기분처럼 전지전능하다.

우선, 김기택의 시에서 그것이 현현하는 세계를 우리는 마음의 유물론의 세계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바늘구멍 속의 폭풍(문학과지성사, 1994)의 뒷표지에 실려 있던 시인의 말은 그의 이 같은 독특한 진술 스타일이 마음의 실체에 대한 투시와 근접 관찰로부터 가능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음이란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육체이다. 살처럼 꼬집거나 때리면 아프고 상처가 난다...(중략)...마음이란 성감대보다 민감하고 오감보다 예민한, 섬세한 그만큼 망가지기 쉬운, 육체이다.//내 시는 그런 육체에 의하여 또는 그런 육체를 위하여 씌어졌다.” 이 같이 사지 몸통 세포 각 부분에 깃들어 있는 마음의 육체적 성격은 에너지와 질량, 연장성(entity) 등 물리적 성격을 그대로 가진다. 거기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역학적 사건에 해당한다. 마음은 우선 울음이나 웃음 같은 신체 현상으로 자기를 주장한다("울음 2").

 

온몸이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

온몸이 얼굴을 향해 몰려오고 있다

온몸이 녹아 눈에서 흘러나오려 하고 있다

 

떨림과 후들거림을 지나서 오고 있다

몸의 기운을 다 빨아들이며 오고 있다

심장과 허파를 가늘게 베며 오고 있다

뇌수에서 생각을 지우며 오고 있다

 

울음이 꽉 다문 입술을 찢고 나오기 전에

뺨과 목을 뚫어 입으로 만들기 전에

눈알에 금이 간다 시야가 깨진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뺨으로 흘러내린다

몸 안의 것들은 세차게 흔들리지만

내장에 깊이 박힌 슬픔은 떨어지지 않는다

 

근육 속에서 주름 밑에서 눈물이 일어나

얼굴 가죽이 울퉁불퉁 들뜨고 있다

두개골을 뚫고 나오려다 막힌 울음이

몸 안을 다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리다가

손가락 발가락에서 마구 돋아나고 있다

-"울음 2" 전문

 

육박하는 슬픔의 근거는 알 수 없다. 그가 초점의 중심에 놓고 있는 것은 슬픔의 범람 상태에 처한 신체 반응의 투시적 진술로, 울음이 슬픔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어떤 오래 묵은 슬픔(“내장에 깊이 박힌 슬픔”)은 울음의 세찬 힘으로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울음이라는 슬픈 마음의 가시화가 온몸이 얼굴로 몰려와 눈으로 쏟아지는 사건이라는 점 외에, 덧붙여질 수도 있었던 다른 부대적인 상황은 중요하지 않다. 한 인간의 신체를 장악하는 울음의 폭동 사태는 마음의 실체성을 전경화한다.

 

신체의 변경이 도구와 연접하면 마음은 이 도구에까지 연장된다. ‘그것은 신체만으로는 구현할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힘을 행사하기도 하고, 이 힘들 사이의 충돌로 신체와 함께 파괴되어버리기도 한다. 이 힘의 잔영, 생명의 잔영은 도막난 뒤에도 꿈틀거리는 낙지 다리처럼, 마음이 행사하던 제약 없는 충동의 잔량을 눈앞에 펼쳐놓는다. 가령, 그가 고속도로의 교통사고 현장을 트럭 앞에 속도 하나가 구겨져 있다...차체가 오그라들며 쥐어짠 검붉은 즙이 뚝뚝/바닥에 떨어져 흥건하게 흐르는데도/속도는 아직 제가 멈췄는지도 모르고 달리고 있다.”("고속도로 4")고 쓸 때, 그는 자기를 유지하려는 마음의 관성으로서 생명 본능이 파괴 본능과 일치해버린 순간을 포착한다. 이 충동이 불가피하게 억제되어야 할 때에는 금단 증상이 일어나기까지 한다. “길게 늘어선 차들 사이에서 점점 느려지던 버스가/아예 멈춰버리자/의자에 조용히 붙어 있던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계속 달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금단 증상")

 

그의 진술이 단지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를 넘어서서 냉정하고 잔인하다고까지 여겨지는 것은 이처럼 그가 마음의 중핵을 생명 본능과 그 폭력적 본성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녀에게서 둘로 갈라져버리면/바로 피가 날 것 같은 하나의 얼굴처럼 호환성의 극대화를 보여주는 마음을 서술할 때에나("모녀"), 전지의 음극과 양극처럼 두 혀가 만나 두 몸이 하나의 살갗으로 덮여 있는 순간/두 몸이 하나의 살이 되어 서로 구분되지 않는 순간”("키스")처럼 마음의 전류(電流)를 묘사할 때조차도 그는 온전히 인간주의적인 안전한 감동으로 독자를 안심시키지 않는다.

 

김기택의 냉정한 진술이 주로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이라는 사건의 경위와 그 사건의 끝에 관한 것이다. 그가 죽음을 즐겨 다룬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그가 생명 현상에 얼마나 착목하고 있는지 알려 준다. 그것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윤리적 당위를 매뉴얼화된 형태로 배면에 두고 있는 생태주의적 견해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고,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찬미로 빛나는 삶 긍정의 미학으로 수렴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지극히 유물론적인 인간학으로서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의 살아 있는 신체를 시체로부터 구별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생명이 사라진 육체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저 경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같은 질문들에 착목한다.

 

이 마음의 유물론 안에서 김기택의 시신(詩神)의 원형은 위압적이고 비정하며 폭력적인 생명의 무차별적 특성 그 자체이다. 그것은 그럴 듯한 문명의 의장 아래 결코 마르는 일 없이 거세게 흐르고 있는 복개천의 물살처럼 검고 무서운 냄새를 풍긴다. (유대인의 야훼의 뜻이 그렇듯) ‘스스로 그러한유일신이 만일 있다면, 김기택에게 그것은 온갖 유동적인 형태 변환에 깃들어 있는 힘 그 자체, 생명 있는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지니고 있는 이 본성(nature, 自然, 스스로 그러함’)인 선악 없는 욕구와 충동에 가까울 것이다. ‘어찌됐든 당신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기분을 빈틈없이 관리하라는 기만적인 긍정과 위로와 힐링이 난무하는 무차별적 휴머니즘의 질서 속에서 그의 시가 소중하고 또 소중한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에 내재된 폭력성과, 이 복개된 폭력성의 검은 물 위에 건설되어 있는 인간주의의 여러 이데올로기적인 허울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투시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왜 시가 단지 기분을 위로해주는 당의정의 역할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끊임없이 심리적 사실들을 직시해야 하는지 증명하고 있다.

 

 

하느님은 지금 공석(空席)이십니다: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민음사, 2012)


구관조 씻기기

저자
황인찬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2-12-07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황홀하면서도 슬픈 백색 감성!황인찬 시인의 첫 번째 시집 『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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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의 시가 육체의 있음과 그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마음의 실체성을 드러내는 데 골몰하고 있다면, 즉 그가 심리적 사실들의 유물론적 측면에 골몰하고 있다면, 그리하여 무자비한 고대의 신 같은 그것’--생명 본능의 폭력성에 착목하고 있다면, 황인찬은 사라진 신의 자리가 가리키는 공집합({ }) 안의 빈 공간, 0 속의 여백이 바로 신적인 것의 비밀 그 자체라는 점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말린 과일의 향기("건조과")처럼 실체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도 끝까지 남아 영원을 가리키는 암시적 성격 그 자체이기도 하고, 극소량으로 인간을 죽일 수 있다는, 책상 위에 앉은 독개구리의 환영("독개구리")처럼 실체는 없으나 삶에 대한 실감을 예민하게 하는 끈덕진 극소량의 공포이기도 하고, 집중된 생각의 끝에 끝끝내 애매하지만 어떤 윤곽으로 나타나는 바람(wish)의 물화(物化)("구원")이기도 하다.

 

이러한 암시와 예감은 종종 기원에 대한 고민에서 연유한다. 다음의 짧은 시는 이 시집의 여러 편의 시에서 반복되고 있는 기원에 관한 문제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탱크가 있다

환기구가 있다

창문이 있다

5층의 건물이 있다

간판이 있다

전신주가 그 앞에 있다

내가 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내가 있다

무작정 올라갔더니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지나가면

옥상이 있다

거기에는 물탱크가 있다

푸른 물탱크가 있다

"개종 2" 전문

 

순전히 환유로만 이루어진 듯한 이 시의 비밀은 제목에 숨겨져 있다. 그는 이 시집에 네 편의 개종연작을 싣고 있는데, 2부를 여는 이 시의 바로 앞, 1부의 마지막 시편이 그 최초의 개종시편이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기에 나는 문을 열었다/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문의 안쪽에는 나와 기원이 있었다/나는 기원을 바라보며 혹시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는지 물었다/기원은 내게 잘못된 일은 없다고 말해주었다/그렇다면 다행이다/(...중략...)/뜨거운 빛이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무더운 여름이었다”("개종") 문밖의 세계로부터의 희미한 발신을 알아챘으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시인의 말은 신의 죽음이나 사라짐을 의미하나 싶지만, “뜨거운 빛이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는 시구를 통해 어쨌든 거기에 무언가 있다는 확인을 동반한다. 그것이 죽거나 사라진, 혹은 원래 없었던 신의 빈 자리를 뜨거운 빛이 대체했다는 뜻인지, 오히려 뜨거운 빛이 신의 또 다른 변용인지는 알 수 없다. 현상계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알 수 없다는 말을 길게 쓰면 경전이 되고 짧게 압축하면 이 되지 않을까. 가장 상상적인 내용들이 이 빈 자리를 차지한다.)

 

그에게 이 빈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흔히 세간에서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인격신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문의 안쪽에 있는 기원은 거기에 잘못된 일은 없다고 말해준다. 기원의 발명/발견적 성격은 알려지는 것으로부터만 가능하므로, 기원이 문 안에 있는 것은 당연지사. 문밖의 존재()가 분명한 실체로서의 누구, 인간 지성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외계인이든, 후두엽의 전기 자극이든, 그저 뜨거운 빛이든, 이름은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문밖에는 분명히 아무것도 없다고 못박아버릴 수 없는, 때로 뜨겁고 빛나는 무엇(는 것 같)’. 목소리나 빛, 열감, 냄새 같은 감각의 확실성은 끊임없이 이 있음을 생생하게 고지하고 있다. 설사 전지하거나 전능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개종 2"에서 이 빈자리는 심지어 푸른 물탱크에 의해 점유된다. 모든 주어의 서술어는 있다로 끝난다.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종교적 신념 체계에서처럼 무작정 올라가서 다른 공간으로 나가는 문을 지나 그 다른 공간에서 만나는 최종적인 꼭대기의 존재’--화자의 주의가 집중된 푸른 물탱크는 육중하고 엄숙하고 불투명하고, 아마도 이 5층 건물 구성원들의 최소한의 생존을 책임지고 ()으며지나치게 과묵하다. 마치 하느님처럼. 신은 자기 자리에 없지만 물탱크의 모습으로 얼마나 묵묵히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이 숭고한 유머 앞에서 우리는 어쩐지 경박하게 웃기를 삼가게 된다. 카프카에 관한 벤야민의 에세이에 나온 말브랑슈의 경구를 첼란에게서 재인용하자면, “주의력은 영혼의 자연스러운 기도”(파울 첼란, "자오선")이니까. 신의 존재에 대한 확실성이 기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같은 깊은 주의 집중이 신(적인 것)의 존재를 요청한다.

 

이 과묵한 빈 자리의 역할은 때로 모범적인 정신분석가처럼 마주하는 사람의 가장 깊은 감정들을 이끌어낸다.

 

여섯 살 난 하은이의 인형을 빼앗아 놀았다

병원 놀이를 하기 위해서였다

인형은 나의

의사 선생님이었다

나는 선생님께 아프다고 말했다

어디가 아프냐 물어도

아프다고만

선생님은 내게 의자에 앉으라 하셨다

의자는 생각하는

의자였다

앉아서 생각해 보라고, 잘 생각해 보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실 때,

나는 울어 버렸다 무서워서

너무 무서워져서

"의자" 전문

 

처음에는 놀이였던 것이, ‘아프다고 말하고 나자 그의 실제적인 고통이 문제되기 시작하면서 무대는 정말로 진료소가 되어버린다. 인형-의사는 말한다. 어디가 아프냐. 의자에 앉아라. 앉아서 생각해봐라. 잘 생각해봐라. 전형적인 분열증자의 환청처럼 인형-의사의 목소리는 시종 명령하고 있지만, 기이하게도 이 목소리는 사뭇 자상하게도 들린다. 그런데 무엇이 무섭다는 말인가? 아이들에게 벌 줄 때 사용하는 생각의 의자와 상담실 카우치가 기묘하게 합쳐진 황인찬의 의자는 인형-의사에게 상담자와 훈육가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부여하면서 화자에게도 역시 병자와 죄인이라는 이중적 역할을 되돌려준다. 인형-의사는 고해를 받고 보속해주는, 신의 대리자로서의 전통적인 사제 역할을 수행하려는 참이다. 그리고 물론, 이 역할을 부여하는 것은 병자이자 죄인인 화자 자신이다. 병자-죄인인 화자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인형-의사의 목소리는 실제 현실의 논리와는 무관하게 화자의 존재를 겨냥하는 어떤 확실성을 수반하고 있다. 그를 울어 버리게 만든 무서움은, 얼핏 보면 (‘생각의 의자의 역할에 따라) 그에게 고통을 유발한 어떤 잘못의 인정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실은 이 같은 실재와의 조우로부터 비롯된 즉각적인 반응에 가깝다.

 

그리하여 우리는 시시때때로 실재와 마주쳐 울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더 잘 웃도록 진화해 왔는지도 모른다. “제 주먹으로 제 발로 제 대갈통으로 제 심장으로 제 구역질로 꽉 틀어막고//반가워요 반가워요 반가워요/볼 때마다 행복해지는 웃음, 잡을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 손을/다시 만나니 정말정말정말 행복해요”(김기택, "살갑게 인사하기")라든가, “꽃잎과 저녁이 뒤섞인,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서 너는 가장 먼저 냄새를 맡는 사람, 그게 아마//예쁘다는 뜻인가 보다 모두가 웃고 있었으니까, 나도 계속 웃었고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안 그러면 슬픈 일이 일어날 거야, 모두 알고 있었지”(황인찬, "유독") 같은 시구들은 이 웃음들이 단순히 무섭고 슬픈 일로부터 도피하려는 위장이 아니라, 어쩌면 진실과 마주쳐 눈이 멀거나 실신하지 않기 위한 필생의 노력이 관습화된 결과일 거라고 넌지시 얘기해준다.

 

김기택이 파헤치고 있는 무시무시한 고대 신의 모습처럼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는 생명 본능의 무자비한 실체성이든, 황인찬이 때로 육감(六感)에 가까운 오감으로 감지하며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빈자리의 확실성이든, 세계의 한 겹 아래로부터, 우리 현실의 문밖에서부터, 우리 자신으로부터 언제까지나 오고 있는 그것. 그것에 대한 생각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가까스로 보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을 감지하고 생각할 때에만 우리는 인간이 아닐까. 이 다른 스타일의 신적인 것을 감히 시적인 것으로 불러도 될까보다. ()

  -<더 포지션> 2013년 봄(13-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