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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review

친애하는 바디우 할아버지께, XOXO, 정관사 없는 나라의 독자로부터

알랭 바디우, 참된 삶, 박성훈 옮김, 글항아리, 2018

이념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는 버림받고 길을 잃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될 수 있는 것을 향해, 여러분의 진정한 현실인 무언가를 향해 떠날 수 있음을 생각한다. 주체로서의 여러분은 결코 자기 집을 단단히 지어 올림으로써 실현되지 않으며, 따라서 주체는 그 자신을 향해 떠날 수 있어야 한다. 전통이란 그저 오래된 집일 뿐이며, 방황의 횡단은 그 집에 어떤 새로운 긍정(단언)을 만들어낸다. 그럴 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자리에 관한 하나의 새로운 상징화를 얻게 된다. 참된 집은 사유와 행위의 모험으로 여러분이 집을 떠나서 거의 잊어버릴 쯤에야 발견할 수 있는 무엇이다. (60쪽)  

살아 있는 철학자 중에 알랭 바디우와 슬라보예 지젝만큼 책을 자주 많이 출간하는 사람도 없을 것 같다. 게다가 두 사람이 절친이 되고 난 후에는 출간 속도가 더 빨라져서 이제는 독자 입장에서 따라 읽기도 버거울 정도다. 어느 정도나 절친인지, 지젝이 어느 책에선가 췌사에 바디우와의 우정에 관해 썼던 일화에 이런 것이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세미나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젝이 강연하는 와중에 바디우에게 맡겨둔 지젝의 핸드폰 벨이 울린 것이다. 그러자 바디우가 핸드폰을 끄는 대신 전화를 받으면서 강연 중인 지젝더러 전화받게 조용히 좀 해달라고 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이 일화 아래 지젝은 “이것이 진실한 우정의 행위가 아니라면 나는 무엇이 우정인지 모르겠다” 같은 말을 써놓았더랬다.

 

지젝의 공산주의가 공허한 말잔치뿐인 데다 그의 책은 논증은 없고 예증뿐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고 바디우의 사상적 전개가 시대에 안 맞게 너무 원리주의적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들의 진짜 철학적 주장들이 이런 막간극과도 같은 일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세미나 룸이라는 관습적 엄숙성이 팽배한 공간에서 진짜 향연(symposium)의 단면을 목격하는 느낌 말이다. 그건 마치 플라톤의 대화 「향연」에서 의사와 희극 작가와 비극 작가와 철학자가 ‘사랑’에 관해 온갖 신화와 상상과 추론을 동원해 진지하게 논의하는 자리에 술 취한 미모의 군인이 난입하더니 느닷없이 소크라테스에게 격렬하고 오랜 애증이 뒤섞인 사랑 고백을 하는 것과도 같고, 리처드 로티가 ‘메타포’ 개념을 ‘논쟁 중에 갑작스레 상대에게 퍼붓는 입맞춤’이라고 칭하며 그 강력한 실행력을 언급할 때 가리켰던 바와도 흡사하다. 나는 그것이, 철학이 문학과 예술에 가까워지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바디우의 글쓰기에서 그런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순간은 지젝처럼 강렬하고 도착적인 웃음을 터뜨리는 코미디보다는 오히려 순문학의 진지한 메시지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이건 어쩌면, 철학과 문학의 관계에 대해 늘 갈등에 휩싸여 있는 내가 너무 내 관심사를 투영해서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실체나 본질, 선험 따위는 없어, 이념은 죽었고, 신은 더 오래 전에 죽은 데다, 이 세계는 우연적이고 영원히 되풀이되는 유한자들의 비명의 소용돌이야’ 같은 속엣말이 귓속을 메아리치고 있었던 지난 세기말에,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 든 그의 『철학을 위한 선언』은 어떻게 시를 사랑하면서도 철학을 배신하지 않을 수 있는가, 아니 이 말은 거꾸로도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진리’의 이념이나 애매하고 모호한 수수께끼로부터 흘러나오는 아름다움 둘 중 하나를 포기하지 않고도 시와 철학을 서로에게 종속시켜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거의 팜플렛에 가까울 정도로 얇은 분량으로 나를 설득해 주었던 것이다.

 

그 설득 작업은 논증과 선언의 형태로 되어 있었지만, 나는 그 전체로부터 하나의 퍼포먼스, 문학이나 예술의 작품이 그렇듯이, 하나의 실행적 힘을 ‘느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훌륭한 철학적 사유라면 의식하든 하지 않든 그 내부에 지니고 있는 시적인 힘이라고 생각한다. 바디우 자신은 철학이 진리 공정을 검증하는 작업이므로, 하나의 진리 공정으로서의 예술과 동화되지 않는다고 명료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내게 위안을 주었던 것이지만, 그토록 호메로스를 의식하며 시에 대한 철학의 우위를 역설하던 플라톤의 가장 멋진 대화들이 또한 그토록 시적인 감흥을 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오늘은 좀 다른 의미의 문학과 철학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오늘 소개하려는 책은 소설도 쓰는 뚝심 넘치는 이 좌파 할아버지 철학자가 젊은이들에게 주는 조언이다. ‘나 때’ 이야기가 없지 않지만, 모름지기 교훈에는 과거에 대한 반면교사가 있으니 모든 ‘나 때’를 도매금으로 넘겨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게 될 테니까 말이다. 차라리 이 할아버지는 ‘나 때’를 지금과 통렬히 비교하면서 그 변화를 처절하게 느끼고 있어서 이 책을 쓰고 있다. 그리고 ‘나 때’보다 훨씬 더 오래된 2500년 전을 소환한다.

 

다름 아닌 소크라테스의 사형 구형의 이유가 바로 젊은이들의 타락을 야기했다는 죄목이었다는 것. 무엇이 진리이고 어떤 것이 진짜 삶인가에 대한 통렬한 캐물음 없이 주어진 대로, 생긴 대로, ‘내’가 태어나기 전에 구성된 세계에 퍼즐처럼 맞춰진 채 사는 일로부터 선로를 이탈하여 ‘나’의 주체화의 여정을 ‘나 자신’이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구형한 아테네 시민들이 ‘타락’이라는 말로 의미했던 바라는 것. 오래 전에 시비 걸기 좋아했던 짓궂은 아테네 할아버지를 굳이 법정에 세워 다수결로 죽이기로 한 전락한 민주주의가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모양 이 꼴의 세계에서 자본주의의 화려한 위장술 아래 교묘하게 시민들을 훈육하고 있다는 것. 그런 훈육에 대해 우리는 무의미하게 반항하거나, 추상적으로 복종하는 소비자가 되고 있을 뿐, 자기를 향한 자기의 진짜 모험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21세기에 ‘근본’ 같은 말은 정서적 금기어가 되어가고 있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더 이상 어떠한 이념도 없을 때 이념 대신 들어서는 물신화된 민주주의의 내용”(83쪽, 강조는 원저자) 때문이라는 것이다.

 

‘뭐야, 쓸데없이 진지하잖아’라는 반응을 이끌어낼 수도 있고, 그 자신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고 직진한다. 젊은이들의 ‘타락’과, 약간 당황스럽게도 40, 50대를 제외한 노년과 젊은이가 연대하기를 촉구하는 “오늘날 젊다는 것”이라는 제목의 1장을 지나면, “동시대를 사는 소년들의 장래에 관하여”라는 2장에서 프로이트를 경유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오늘날의 물신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현하는 양상으로 ‘아버지/아들’ 관계를 논하고, 마지막 장인 3장 “동시대를 사는 소녀들의 장래에 관하여”에서 여성 젊은이들에게 주는 글을 따로 실어놓았다.

 

내 생각에는, 약간 과장하자면, 이 마지막 장을 집필할 때야말로 80 인생에서 가장 위험을 감수한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는 레지스탕스 아버지의 아들이었던 적도 있고, 여러 아이들의 아버지이기도 하건만, 딸이거나 아내이거나 어머니였던 적은 없어서, 정말로 너무나 진솔하고 겸허하게 이 책을 썼는데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무지를 숨기지 못했고, 숨길 수 없었고, 그렇다고 아는 척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1, 2장을 쓸 때와는 달리 더 많은 텍스트를 동원해야 했고, 전공자가 아니라면 독자가 몇 달을 공부해야 겨우 이해할 수 있을 라캉의 정신분석으로부터 애매한 인용문을 가져와야만 했으며, 아들에 관해 주는 글에서는 논거로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문화인류학적 분석의 도움을 전방위적으로 받아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3장은 일종의 문학적인(여기서 “문학적인”은 오늘날 분업화된 학제 내의 철학 분과에서 “허구적인”과 동의어로 사용하는 단어다) 색채를 띠게 되었는데, 1, 2장이 현실 반영론에 근거한 문학작품과 같다면, 3장은 사뭇 환상과 허구가 뒤섞여버리고 말았다. 3장에서 그는 우려와 기대를 반반 섞을 수밖에 없었다. 모르는 것에 관해서는 부정하거나 숭배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는 자신이 딸이거나 어머니거나 아내, 아무튼 여성일 수도 있다고는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소크라테스가 『국가』에서 유토피아를 상상하면서 여자 청소년들도 김나지움에 다니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제자들이 “아니, 선생님, 그럼 여자들도 웃통 벗고 레슬링을 한단 말입니까?”라고 묻자 “30년 전 우리 폴리스에 레슬링이 처음 소개되었을 때 남자들도 처음엔 웃통 벗는 게 낯설었단다”라고 대답한 바에조차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의 상상력만 탓할 수도 없다. 그가 사랑한 헤겔의 분명한 단언대로,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기 때문에, 월별 생리 현상을 걱정하면서 일정을 짜는 삶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에게 그것을 상상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어쨌든 바디우 할아버지는 위험을 감수했고, 자신 없음이 드러나는 대목들을 그대로 보여주기를 선택했다. 비판 정신을 간판으로 삼았던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인간 해방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페넬로페와 세이렌으로 분리하거나 문명과 자연으로 분리하는 것 말고는 여성에 대해 거의 사유하지 않았던 것이 불과 70여 년 전이니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선 안 되겠지... 솔직한 마음으로, 철학은 계속 더욱더 철저하게 보편을 추구하면서, 사유 실험을 할 때에는 ‘인간 일반’을 주어로 사용했으면 좋겠다. 그래도 ‘인간’을 의미할 때 ‘Man’에서 ‘Human being’으로 ‘좀 더 보편화해온’ 것은 보편적 진리 탐색이라는 철학 자체의 목적에 비추어 분명한 진보니까 말이다.

 

다만, 그가 젊은이들에게 주는 조언을 책으로 엮으면서 ‘소년’이나 ‘소녀’에게 따로 장을 할애하려 결정했을 때의 혼란은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그는 분명 이제까지 철학적 조언들이 ‘인간’이라 호명해온 것이 실은 ‘남성’이며, 최근의 전세계적 사회 기류를 통해 자기 자신의 사각지대를 의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언어상의 문제도 있다. 프랑스어는 여성형과 남성형이 분명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말하는 순간 성차를 표현할 수밖에 없게 된다. 현대 한국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일기나 시를 쓰려고 운을 뗄 때마다 나뿐 아니라 그 모든 성차를 의식하고 고민해야 한다니. 끔찍한 일이다. 그러니 그는 ‘그녀’에 관해 쓰지 않아 온 시간들에 대한 부채를 갚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편으로, 나는 바디우가 지나치게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도 생각한다. 어차피 독자는 프로이트를 읽을 때나 성서를 읽을 때나 바디우의 『사도 바울』 같은 책을 읽을 때에도, 그 모든 아들 담론들을 ‘메타포’로 받아들이게 마련이다. 설마 독자가 여자라고 해서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자신을 막달레나 마리아나 성모 마리아에게만 이입하겠는가? 그런 것이 걱정된다면, 걱정하고 있는 사람 자신의 상상력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해리 포터』를 읽다가 “말도 안 돼, 어떻게 나무가 말을 한담?” 하면서 책을 내던지는 사람이 간혹 있기는 하지만, 대개 독자들은 쓰는 사람 생각보다 상상력이 풍부하다. 너무 애매하게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너무 많은 것을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저 멀리서 반문이 들려오는 것 같다. 그럼 원리주의적이고 정초주의적인 진지한 선언마저 죄다 메타포로 읽으란 말인가?

 

그렇다. 원리주의적이고 정초주의적인 진지한 메타포로 읽는다. 메타포가 단순히 장식물에 불과한 수사적 기술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생생한 메타포는 현실을 바꾼다. 맨 앞에 인용한 글의 ‘집’이나 ‘횡단’이나 ‘모험’이 메타포지만 분명 우리 사유 속에 실재하는 것처럼, 진지한 메타포는 실재한다. 어쩌면 ‘이념’은 가장 진지한 메타포의 엑기스일지도 모른다. 수미쌍관으로 마무리해보자. 맨 앞의 인용문은 소년들에게 주는 글이지만, 이 글을 읽는 동안 독자는 소년일 수 있으니까. 누구나 마음속에 소년 소녀 할아버지 할머니 고양이 혁명가 시인 하나씩들 가지고 있지 않나?

 

전통이란 그저 오래된 집일 뿐이며, 방황의 횡단은 그 집에 어떤 새로운 긍정(단언)을 만들어낸다. 그럴 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자리에 관한 하나의 새로운 상징화를 얻게 된다. 참된 집은 사유와 행위의 모험으로 여러분이 집을 떠나서 거의 잊어버릴 쯤에야 발견할 수 있는 무엇이다. (60쪽)

 

-<독서In> 7월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