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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review

발효하는 황홀(일레인 스캐리, 『아름다움과 정의로움에 대하여』)

일레인 스캐리, 『아름다움과 정의로움에 대하여』,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2019

 

아름다운 소년이나 꽃이나 새가 현존하는 곳에 서 있는 순간 느껴지는 인지 경험은 무엇일까? 그것은 복제 행위를 부추기는, 심지어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눈이 아름다운 무언가를 볼 때, 손이 그리고 싶어 한다고.(11쪽)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대학 시절이었던 1996년, 리처드 로티의 대표작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에 간접적으로 인용된 『고통받는 신체』의 한 대목을 통해서였다. 로티에 의하면 스캐리는 그 책에서 “누군가에 대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은 그로 하여금 심한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고통이 지나간 다음에도 그가 자신을 추스릴 수 없게끔 그 고통을 이용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이 자기가 누구였던가를 서술하기 위해 사용한 언어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함으로써 ‘그의 세계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언어철학의 대가로 출발하여 문학문화의 전도사로 생을 마감한 로티의 언어에 대한 사랑은 매우 각별한 것이어서, 아마도 섬세한 자신의 문학적 언어 감각과 분석 일변도의 영미 언어철학의 태도 사이에서 갈등하며 이 틈을 사유하는 일에 긴 시간을 바쳤던 것 같다. 아마도 영문학자 스캐리의 저서는 이런 갈등 과정 속에 놓여 있던 독자 로티에게, 언어와 자아, 그리고 세계의 관계에 관해 예민한 조언자 역할을 한 듯 했다.

 

이 대목을 읽고 책을 검색해보았지만, 스캐리의 이 책은 아직 번역되기 전이었고, 몇 년 후 로티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도 절판되고 만다. 미적 취향과 도덕적 신념, 그리고 진리에 대한 탐구가 일관되고 통합되어야만 한다는 플라톤적인 이상이 주류 철학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문학과 철학은 분업화를 철저히 겪고 서로를 질시하거나 필요에 따라서만 참조하면서도 ‘사실 너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라고 속삭이며 애증 속에 곁눈질하는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20세기 말, 로티의 네오프래그마티즘은 쉽사리 상대주의나 (경멸적 의미를 내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변종으로 다루어지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20여 년이 지난 작년에야 스캐리의 해당 책(“고통받는 몸”이라는 제목으로)과 『아름다움과 정의로움에 대하여』가 번역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마 우연일 테지만 로티의 책도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라는 제목으로 최근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한 첫 번째 이유이지만, 끝끝내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던 경험적이고 실질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내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깨닫게 된 것인데, 이 책을 서술하는 동안 내내 스캐리가 간직하고 있었던 열망, 즉 아름다움이 공정함으로 이끄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실증하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그녀가 섬세하게 몇 번의 다른 방식으로 묘사하는 ‘아름다움 앞에 선 순간들’을 통해 비로소 내가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지난 몇 달 동안 나도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끝나지 않는 팬데믹 상황에서 매일의 확진자 추이에 대한 주의집중은 항상적인 스트레스를 일상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들판보다 동굴을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서서히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일과 휴식의 경계가 없는 집안에 자신을 격리시키고 뉴스와 기사를 통해 세계와 접촉하는 일은 실제 세계에 대한 경험은 축소시키고 소문만 비대하게 만든다. 어쩌면 세상은 허구가 아닐까? 좀비 영화야말로 오늘날 가장 사실주의적인 컨텐츠가 아닐까? 아니, 내가 언제부터 돌아다니길 좋아했다고? 손 안에 디지털 세상이 있는데도 점점 마음이 감옥처럼 협소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카뮈의 『페스트』를 첫 칼럼의 제재로 선택했을 때만 해도 나는 이런 사태가 이렇게까지 장기화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웃들은 예민해지고 귀만 밝아져, 나가지 못한 아이가 뛰고 개가 짖는 당연한 소리가 신경을 긁어댄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와중에 아름다움과 정의로움의 관계라니. 그런 추상적인 것을 생각하기에는 우리는 지금 신경쇠약 직전인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그런 신경쇠약 직전의 상태에서 이 책에 도착하기 전까지 다음 독서 칼럼을 뭘로 쓸까, 여러 권의 다른 책들을 전전한 터였다. 흥미진진한 고전으로 알려진 작품들을 읽으려 했지만, 완독할 수 없었다. 18세기의 어떤 작가는 순진무구해서 견딜 수 없었고, 아껴 두었던 작가의 소설은 번역이 엉망이었다. 설레며 펼쳤던 좋아하던 작가의 다른 작품은 은밀하고 복잡하게 나르시시즘적이었다. 작품들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였다. 신경쇠약은 인내심을 무너뜨렸다. 그 무엇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다만 플라톤의 대화편들과 스캐리의 이 책에서 ‘실제로 내가 가지고 있었던 구원적인 무언가, 그리고 여러분도 가지고 있으나 잠시 잊었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일종의 기능적 효능을 실제로 발휘하기도 했다. 이렇게 약장수처럼 사설을 풀어놓았지만,

 

스캐리는 필경 독자들이 궁금해 마지않을 아름다움의 실체적 속성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작용들의 경험적인 실례들을 제공하려고 한다. 그녀는 아름다움이 성스럽고, 전례가 없으며, 구명적이고, 신중을 부추긴다고 말한다. 그런 특성들에 대한 언명은 어렵지 않게 누구나 동의할 만한 평범한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날 단 한 번도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야자나무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었을 때 그녀는 이 순간을 통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을 복제하고 묘사하고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그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늘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종종 경험하게 되는 이런 아름다움의 확장과 변경이 오히려 아름다움의 대상과 속성에 대한 우리의 기존의 사고와 감각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게 된다는 것에 대한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이 책을 써야만 했던 절실함의 배경에는 아마도 그녀가 적어도 미국의 문학 연구장에서 아름다움이 멸시당하는 상황을 자주 접했던 경험이 깔려 있는 것 같다. “지난 20년간 인문학에서 아름다움의 추방은 아름다움에 반대하는 일군의 정치적 불평들에 의해 수행되어왔다”는 2부의 첫머리는 이런 저간의 사정을 추측할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은 마치 해럴드 블룸이 『영향에 대한 불안』을 써야만 했던 사정과도 통하기 때문에 어쩌면 아름다움의 추방은 이 책이 쓰여지던 90년대 후반 이전 20년보다 더 오래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블룸이 60년대 이후 영미 문학 연구가 비교문학이나 문화연구의 장으로 넘어가고, 여러 정치적 견해의 참고문헌으로 문학작품들을 격하하는 것에 반론을 펼치기 위해 햄릿 이전과 이후의 주체성의 변화를 실증하려 했던 것처럼(그러니까, 문학작품은 당대 사회의 모방일 뿐 아니라 거꾸로, 독자이며 관객인 우리들 자신이 훌륭한 문학작품을 모방하기도 한다), 스캐리는 아름다움에 반대하는 정치적 논변들에 관해 이렇게 반론한다; “아름다움은 사회적 불의에 기여하기는커녕, 혹은 심지어 무구한 방관자로 불의에 중립적으로 남아 있기는커녕, 우리에게 항상적인 지각적 예리함(보기, 듣기, 만지기의 고고도 급강하)을 요구함으로써, 그리고 더 나아가 (...) 보다 직접적인 형태의 지시를 통해서, 불의를 다루는 일에서 실제로 우리를 도와준다.”

 

실제로 이 책은 논변을 통해 이론적으로 설득하는 대신 자기 자신이 하나의 문학작품이 되려는 욕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블룸의 저서를 닮아 있다. 이 책은 설득하지 않는다. 아니, 몇 군데 설득을 목적으로 한 논변이 있지만, 사실 그 논변들은 자의적으로 읽히는데도 불구하고, 중요한 건 사실 논변이 아니라고 이 책의 행간이 소리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가 언젠가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어떤 순간들—가령, 오랜만에 만난 기꺼운 친구들과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난 어느 초겨울 아침, 쨍한 아침 햇빛과 서늘한 대기 속에 당당하게 도열해 있던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빛바랜 황금색 바늘잎들을 비처럼 떨어뜨리는 광경의 황홀 앞에서 성체라도 영하듯 무릎이 꺾였던—이 소환되어 다시 그 감각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아름다운 경험들이 우리에게 일으켰던 지각의 변동을 기억하게 된다. 그러니까, 블룸이 햄릿 이전의 인간과 이후의 인간은 다른 인간이라 쓰면서 우리가 매력적인 문학 작품의 개성마저 모방하게 된다고, 그래서 우리의 주체성은 읽기 전과 후가 달라진다고 문학의 문학성을 구출하는 논변을 펼쳤다면, 스캐리의 이 책은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경험’ 자체가 우리 자신을 얼마나 다르게 바꾸어놓는지를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기억하게 만든다. 이런 연상 작용은 그녀 자신의 경험 묘사로부터 즉각적으로 불러일으켜지기 때문에 일종의 감염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얼마나 시적인지.

 

지난주에 오랜만에 아버지를 찾아갔던 날에 구원은 또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은퇴한 지 오랜 아버지의 교외 창문 앞에 바람이 뿌리고 간 배초향 씨앗이 여러 송이 보랏빛 꽃대를 피워 올린 현장에서 흑백의 섬세한 무늬를 가진 호랑나비 한 마리가 꿀에 취해 날개를 느리게 팔락이며 꽃대 사이를 오가는 15분 동안, 나는 넋을 잃고 있었다. 그때 나는 가족도 잊고 여기가 어딘지도 잊고 나 자신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가끔 학교 주차장 계단에 들어와 죽어 있는 제비나비며 부전나비를 보며 문명 속에 죽어가는 연약한 아름다움의 비극적 감정을 느낀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보는 순간 상징도 비유도 사라지고 나 자신을 잃어버린 채 중심을 내어주는 경험은 흔하지 않다. 하물며 호랑나비라니,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바로 그 나비라니.

 

이런 경험의 앞뒤에서부터 숙성의 시간은 자라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발효하리라. 그런 아름다움에 취하고 무릎을 꿇고 넋을 잃었던 순간들—우리 모두가 적어도 한 번씩은 경험한 그 신성하고 전례 없으며 구명적이고 우리를 신중하게 만들었던 순간들이야말로 현실 속에 도래한 시의 모습이 아닐까. 아무래도 디지털로는 오지 않을 황홀의 순간들을 통과하며 부디 우리 자신이 아름다움의 변경을 넓히는 데 더욱 관대해지기를.(끝)

-<독서In> 10월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