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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review

“I am not a man, I am not a man”

* 에밀리 정민 윤 지음, 한유주 옮김,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 열림원, 2020.  

 한 남자가 있었다. 일본 군인. 낡은 미신을 믿지 않았던 자. 전투에 나가기 전 무사를 기원하는 섹스를 믿지 않았던 자. 그는 괴짜였다. ‘위안부’의 음모나 혹은, 어떤 부위를 부적으로 지니지 않았던 자. 그의 동료들이 말했다, 남자가 되어야 한다고. 공식은 이러하다, 괴짜는 남자가 아니다. 전시의 논리에는 근거가 없다. 근거가 없다.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동료들이 말했다, 급습해, 약탈하라고. 그를 위안소에 밀어 넣었다. 벽에 난 구멍을 들여다보는 그들의 눈알들. 그가 나오는 걸 보았다. 되었다. 여기서 공식은 무엇인가. 공식은 없다. 한 남자가 있었다. 울면서 말했다. 나는 남자도 아니야, 나는 남자도 아니야.
  -「일상의 불운」(94) 전문.

   

 잔인한 일들은 매일 벌어진다. 나날의 뉴스 기사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불법과 위법을 피해 교묘하게 자행되는 잔인한 일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법은 조항을 더해가며 이 같은 잔인성을 더 촘촘하게 걸러내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완전히 불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한 우리는 안다. 무엇보다도, 역사 속에서 오랜 세월 벌어져온 대규모의 압도적인 악행들은 인간이라는 우리 종족의 본성에 기회를 보며 분출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잔혹성의 씨앗이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슬프고 끔찍한 추정을 그칠 수 없게 한다. 영국 작가인 콜린 윌슨의, 국내에 잔혹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던 인류의 범죄사(A Criminal History of Mankind), 20세기 후반으로 넘어오기 전까지는 그 자체가 그냥 세계사 같다. 인류가 있는 곳에 전쟁이 있으며, 전쟁이 있는 곳이 잔혹하지 않을 리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한국인 이민자인 시인이 낸 첫 번째 시집이다. 영어로 씌어져 한유주 소설가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됐다. 시집 중앙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실제 증언들로부터 어휘들을 골라내고 콜라주처럼 배치하여 1인칭 증언자의 목소리를 간직하고 있는 증언들이라는 장이다. 시인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는 경우에라도(그것이 직접적이거나 은근한 인종차별이건 혹은 성 차별이건) 그 내면적 고통과 고통을 야기하는 외부적 상황은 자주 이 증언들과 겹쳐진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은 한국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다음, 시인에 의해 영어로 읽히고 영어로 시화되어 언어에 예민한 한 소설가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이런 ‘(한국어)증언-(영어)번역-(영어)독서-(영어)시화(詩化)-(다시 한국어)번역과정은 마치 미처 듣지 못한 울음소리가 먼 계곡을 따라 메아리로 계속되다가 다른 시간대로 되돌아온 것처럼 느껴진다. 새삼스럽게 서럽다.

  그리고 이 시집을 읽으면서 우연히 보게 된 대조적인 한 편의 영화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갈등거리였던 것을 다시 선명하게 떠올리게 되었다. 스티븐 킹 소설을 원작으로 브라이언 싱어가 20여 년 전에 만든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Apt Pupil)>이라는 영화다. 이 영화는 나치 전범이었던 한 남자가 이제는 이웃집 할아버지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미국의 한 마을에서 이것을 눈치 챈 역사에 관심 많은 한 고등학생이 이 노인과 맺게 되는 무섭고 친밀하며 이상한 관계에 관한 것이다. 알다시피 스티븐 킹은 서스펜스의 대가이고 브라이언 싱어는 <유주얼 서스펙트>를 만든 바로 그 감독이기 때문에, 이 영화는 안도감을 주는 결말을 설계하지 않았다. 홀로코스트에 집착하던 고등학생 토드는 위장한 나치 전범인 노인을 처음에는 혐오스러워 하고 굴욕을 주다가, 그를 자극하고, 그래서 잊고 있던 나치즘의 무자비한 열정을 일깨운 대가로 자기 자신의 호기심이 도덕의 담벼락을 뛰어넘는 지경으로 나아간다.

  어떻게 잔혹한 역사에 대한 관심이 어떤 이에게는 섬세하고 무한한 연대의 감정을 자아내는 한편, 어떤 이에게는 뱃속에 잠들어 있던 공격성의 스위치를 켜는 것일까? 그 영화가 만들어졌던 20여 년 전과 달리 오늘날에는 저 똑똑한 고등학생이나 나치 전범이었던 노인을 손쉽게 일컫는 단어가 일반화되어 있다. (악의 평범성이나 비속성의 측면에서 볼 때 그 노인을 그토록 병리적으로 재현한 것에는 유보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겠지만) 우리는 저 공통감각과는 동떨어져 자신의 이해타산과 잔혹함 자체를 욕구하는 사람들을 흔히 사이코패스라고 부른다. 이 개념이 흔히 쓰이는 단어가 된 오늘날에 우리는 그 영화를 서구의 깊은 트라우마로 남은 잔혹한 역사적 사실을 빌려 만든 끔찍한 사이코패스 버디 무비라 정리해버릴 수도 있다. ‘사이코패스라는 말은 이제 미친놈’, 다시 말해 이해할 수 없고 상종하지 말아야 할 이상한 자라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고, 그것은 개념상 이해할 수 없고 상종하지 말아야 할 것이므로 이해하지 말고 상종하지 말고 격리하면 되는 것이다. 잔인성에 대항하기 위해서 잔인해지지 않고 수행할 수 있는 실천행위들은 연민과 깊은 연대감을 서서히 제도화하고 그것을 퍼뜨리려는 은근한 노력뿐이란 말인가?

  역설적이게도 나는 앞에 인용한 시가 어떤 희망의 기미를 엿보게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저 시 속의 한 남자가 마지막에 울면서 외치는 나는 남자도 아니야, 나는 남자도 아니야라는 말은 원문에 I am not a man, I am not a man으로 쓰여 있다(이 시집은 뒤쪽에 영어 원문이 수록되어 있다). 단어에 대한 몇 겹의 시대적, 성차적 편견을 중의적으로 훌륭하게 시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이 구절은 나는 사람도 아니야, 나는 사람도 아니야”(‘사람이 이렇게 잔인할 리 없다’)이면서, “나는 (진짜) 남자가 아니야, 나는 (진짜) 남자가 아니야”(‘남자라는 개념이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것일 리 없다’)라는 뜻을 모두 포괄한다.

  그러니까...아마도 이 시집의 제목이 의미하는 것처럼, 그리고 역사가 증명해온 것처럼 우리 종족에는 남의 살을 먹으면서 배태되어 온 특별한 잔인성이 있는 것일 테지만, 그나마 저 남자의 나는 사람도 아니야, 나는 사람도 아니야라는 울부짖음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언젠가는 인간의 개념이 좀 더 평화로울 수 있을 거라는 가녀린 희망이라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새삼 서럽다.(끝)

- <독서 In> 12월 독서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