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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review

우리가 정말 모르는 것들에 관하여

* 장 뤽 낭시, 이영선 옮김,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 갈무리, 2012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것은 2012년 말 무렵이었다. 낭시는 이미 라쿠-라바르트와 공동으로 출간한 책의 번역본으로 한국에 소개되어 있었고, 문학계에서 한창 ‘시와 정치 논쟁’이라 불린 뜨거운 논란 속에서 관심의 정점에 있던 자크 랑시에르와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프랑스 철학자 중 하나로 알려져 있었다. 이런 저런 이유들로 나는 몹시 지쳐 있었는데(‘지쳐 있다’는 게 사실 우리 시대 사람들의 정서적인 디폴트 값이기는 하지만) 특히나 패퇴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 정치적인 환경은 계속되는 장마처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나는 나의 희미한 (그 어떤 종류의 신에라도) 신앙을 잃었고, 사람들에 대한 환멸에 사로잡혔으며, 그에 못지않게 나 자신에 대한 염오에 휩싸였고, 이전에는 아름답다고 생각한 예술작품과 풍경들에서 일시적이고 스러져가는 세계의 덧없고 순간적인 열광들만을 발견하였다. 그때 학교 서점 신간 코너에서 발견한 이 작은 책의 거대한 제목은 나에게서 조금씩 유실되어간 모든 것을 간결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모호한 불안을 자아냈다. 이렇게 작은 책에서 이런 거대한 단어들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다룰 수 있을까? 또는, 평범한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 이 단어들은 얼마나 뜬금없는가? 요즘 세상에 누가 신을 믿고 정의와 사랑의 실재를 진지하게 성찰하며 아름다움 자체를 갈망하지?

이 책의 부제는 “종교, 철학, 사랑, 예술에 관한 낭시의 쉽고 친절한 네 개의 강의”다. 이것이 낭시가 12세 전후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행한 강의를 모아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책을 사서 집에 돌아와 책장을 펼쳐본 다음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이 강의가 주는 어떤 위로의 힘을 전혀 상쇄시키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증폭시키는 하나의 동인이 되었다.

강의록 형식의 책들이 주는 특별한 효과가 있는데, 그것은 글자들 밖으로 배어나오는 어떤 ‘열기’라고 할 수 있겠다.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 그랬고,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철학자 들뢰즈의 스피노자의 ‘정동’ 개념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고 있는 벵센 대학에서의 강의 「정동에 대하여」가 그렇다. 낭시의 이 강의록은 특별히 12세 전후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그 효과가 좀 다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독자는 어린이들로 가득 찬 교실에서 노년의 철학자가 최대한 어려운 개념어들을 자제해가면서 인류의 정신사에서 가장 중대한 이념들을 설명해야 하는 순간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그 ‘상대적으로 쉬운 설명들’이 도출되기까지의 경로를 추정적으로 되짚어 보게 된다. 그리고 그 경로를 결국 파기하게 된다.

제목만 보면 이 책은 마치 이제까지 인류의 정신을 사로잡아왔던 중대한 개념들의 개략적인 역사와, 우리에게 알려져온 가장 보편적인 내용의 요약을 쉽고 분명하게 제시해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신의 개념—강력하고 자비가 넘치며 우리의 죄를 심판할 것 같은—은 첫 번째 강의를 읽으면서 오히려 와해된다. 신은 왜 ‘신’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어야 했는가, 아니, 왜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신’이라는 이름이 필요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우리를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이라는 개념이 실체에 대한 이름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세계와 높은 하늘을 마주한 인간의 요청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생각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그것은 가령, 김성규 시인의 짧고도 강렬한 시 「절망」이 품고 있는 우리의 오래된 질문에서부터 비롯한다고 할 수 있다. “꽃들은 왜 하늘을 향해 피는가/그리고 왜 지상에서 죽어가는가”(김성규, 「절망」,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전문). 그렇기 때문에, 낭시는 신에 관한 강의의 시작을 ‘하늘’에서부터 시작했는데, (다른 세 편의 강의들에서도 그랬지만)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낭시의 강의 자체가 아니라 강의 뒤편에 실려 있는, 아이들과의 질의응답의 한 장면이었다.

신에 관한 강의를 듣고 난 한 아이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하늘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를 알 수 있나요?” 그러자 노년의 철학자는 자신이 이 강의 시작 전에 만난 천문학자의 말을 전한다. “그가 말하기를, 누군가가 그에게 ‘하늘은 땅의 표면에서 시작합니다’라고 말했답니다.” 이 질의응답은 매우 과학적인 동시에 시적인 데다가, <주의 기도>에 등장하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의 절망을 놀라울 정도로 갑작스럽게 상쇄시키고 있기 때문에 거의 숭고한 감동을 준다. ‘하늘이란 신이 거하는 닿을 수 없는 성스러운 곳을 의미한다’는 절망적인 관습적 편견으로부터 단지 과학적인 정의로 이동했을 뿐인데도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뜻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증폭되는 것이다. 꿈과 현실이 갑자기 접붙여지고, 현실에서 가능한 꿈의 세목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낭시는 이것을 매우 하이데거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단숨에 절망을 가능성으로 채우는 시점의 변환은, 어린이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 말을 전해준 천문학자조차 ‘누군가’로부터 그 말을 전해 들었다는 것이다. 마치 복음서처럼, 실제 저자는 알려지지 않은 채, 그것은 ‘믿고 싶은 소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과학적인 진술이 띤 전언의 형식은, 전혀 의도된 바 아니지만, 모종의 신비로운 느낌을 남긴다.

정의에 관한 강의가 끝난 직후 첫 번째 질의응답에서 나온 질문은 “우익과 좌익 중에 무엇이 더 정당한가요?”였다. 사랑에 관한 강의의 질의응답은 자신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의 관계에 대한 논의로 가득 찬다. 특히 아름다움에 관한 강의에서 나온 어린이들의 질의는 이 철학자로 하여금 진땀을 빼게 만들었다. 특히 시간 관계상 끝나지 않은 채 마무리된 한 어린이와의 논쟁은 두고두고 독자를 고민에 빠지게 만든다. 그것은 ‘신과 사랑, 그리고 아름다움, 고로 이 철학자가 강연에서 다룬 그 모든 대단한 이념이 순전히 환상일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이 어린 청중은 자신이 예술을 창작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면서 아름다움이 환상의 문제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는다. 순전히 독자 입장에서 보았을 때, 어떤 의미에서 낭시는 이 주장에 완벽히 수긍할 만한 반론을 제공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그는 마치 바둑판에 돌을 던지는 사람처럼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신은 아이들이 한 질문을 어른들도 똑같이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아이들이 한 질문인지도 모르고요.(212)

결과적으로, 이 책이 주는 위안은 전통적인 이념에 대한 낭시의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유만으로는 불충분했을 것이다. 진짜 위안은 무엇을 질문해야 하는지조차 잊어버린 우리 자신이 물어야 했을 많은 진짜 질문들을 대신 물어주는 가능성덩어리 어린이들의 정직하고 진지한 삶의 집중이다. 나는 위에 인용한 문장을 무의식적으로 “당신은 어른들이 한 질문을 아이들도 똑같이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로 읽었었다. 그것이 강의와 질의응답을 읽으면서 내가 하고 있었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 읽어보니 아이들과 어른들의 순서가 달라지는 이유를 이제야 좀 알겠다. 내가 본 많은 강연장의 어른들끼리의 질의응답은 대개 ‘정말 모르는 것’들에 대한 공동의 탐구 과정이 아니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서로 확인시켜주는 거래 현장에 가까웠다는 의혹이 점점 더 짙어졌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명한 노철학자의 훌륭함을 확인시켜주는 대신, 어린이들의 본질적인 질문이 얼마나 정교하게 되풀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읽는 이까지 수수께끼에 말려들지만, 이 모름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은 얼마나 위안을 주는 것인지. 왜냐면, 우리가 점점 더 우울한 이유는, 팬데믹이나 정치 사회적인 환경보다 더, 우리가 무엇을 모르고 있고 무엇이 진짜 질문인지 자꾸 잊어가는 데 있기 때문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