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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review

시간 공장 공장장 장 공장장님께: 장수진 시인 핀 시리즈 집중 리뷰

20년 전에 극단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어린이 마당극을 주말마다 공연해야 하는 극단에서였지요. 무대연출 보조로 잠시 투입된 저는 한 달 동안 새벽 5시에 나가 자정 넘어 귀가하면서, 극 중에서 해가 뜨면 해를 올리고 달이 뜨면 달을 올리고 멍 박사 옷이 찢어지면 바느질을 하고 마지막 한마당에 아이들에게 뿌릴 색종이를 무한히 자르고 끝없이 짐을 날라야 했습니다. 배우들의 몸은 쉬지 않고 연습을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변함없는 페이스로 터보 엔진처럼 무섭게 움직이더군요. 마지막 공연 뒤풀이에서 저는 만 원권 10장이 든 봉투를 받아들고 짜고 쓴 눈물을 삼켰습니다만, “적자가 3천 밖에 안 돼, 이번엔 선방했다!”는 극단 일원의 건배사에 뒤통수를 맞고 눈물이 쏙 들어갔더랬지요. 알바비보다 택시비가 더 나왔다고 괴로워하던 저는 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루 너댓 시간에 불과한 수면 시간을 얼른 가 보충하고 싶었지만 극단 사람들은 3차까지 마시고 노래방에 가서 모두 부술 기세로 테이블 위에서 춤을 추고 귀청이 찢어질 것처럼 노래를 하더라고요.

동굴을 사랑하던 저는 조용히 빠져나와 택시를 탔습니다만, 이 이상한 적자의 노동과 엄청난 마이너스 상황에서도 넘치던 에너지는 이상하게 숭고한 감정을 남겼습니다. 당신이 숭고에 관한 글에서, 벌이는 호프집 알바로 하고 연기는 돈과 분리’”해야 했던 시절에 관해 쓰면서 “‘노동이 끝나고 책을 보는 건 불가능해. 전태일은 정말 위대하지 않아?’ 제게 쓰기는 중노동이에요. 예술은 정말 체력전이고요. 무언가 숭고하다면 이런 것이 숭고에 가깝지 않을까요?”(숭고의 값, 문학과 사회, 2017년 여름호)라고 썼던 것처럼 말이에요. 시와 돈의 거리에 관해 생각할 일이 생길 때마다 저는 그 짧았던 가정의 달에 제 뒤통수를 세게 때린 적자 3천의 선방을 떠올리고, ‘그래도 시는 최소한 팔다리는 아낄 수 있잖아라고 생각했으니 어쩌면 아이러니한 일일까요.

이런 개인적인 회고를 남기며 이 글을 시작하는 것은 아마 장 공장장님의 시간 공장 컨베이어벨트의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에너지와 시간 공장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이 풍기는 멜랑콜리의 맛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당신의 에세이가 대략 20년 전의 소년을 벗어난 당신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일지도요. 당신은 당신이 시간 공장의 근로자라고, “영원한 잠이 가장 명예로운 퇴직이라고, 모두들 노력하라고한 것은 당신이 아니라 공장장”(밤은 옛날의 공장)이라고 썼지마는, 실은 시간 공장에서 그들은 한 사람일 테니까요. 당신의 시간 공장은 당신이 만들고 당신이 노동하는 곳이니까요. 사실 그걸 멈출 수 있는 건 당신이 아니라 컨베이어벨트뿐이니까요. 시간 공장의 컨베이어벨트는 공장장도 끌 수 없으니까요.

그게 멈추면, 모두 깜깜해지겠지요. 아마도 우리들의 몸은 우리들 각자의 시간 공장, 이 과거 저 과거의 실들이 가로 세로로 직조되어 새로운 컨베이어벨트를 만들고 있는 공장일 테지요. 나는 당신의 시와 에세이로부터 시간을 느끼고 있는 당신의 몸시간 공장의 멈추지 않는 터빈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당신은 끊임없이 옛날의 당신을 호출했다가, 옛날의 당신이 지금의 당신이 되어온 길을 되짚었다가, 어떻게 지금-여기에 있게 되었는지 여러 어휘 꾸러미로 재서술하려 시도하고, 언제인지 모를 옛날의 당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것, 시간의 절대적인 경험치를 통과해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을 재구성하고, 그리고 또 빠뜨린 것이 없는지 시간 공장의 감사를 실시하고, 유실된 꿈들을 재분류하고 다른 가능한 배치의 디자인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여지없이, “야유와 은유를 소낙비처럼 퍼붓(예술가들, 사랑은 우르르 꿀꿀), 내가 사랑하는 당신의 시는, 그 모든 환멸의 경험치를 비극을 깨달은 자의 명랑으로 변환한다는 점에서, 노상 웃다 광인으로 오해받은 데모크리토스처럼 광기를 품고 있었지요.

어쩌면 오래된 낭만주의 문학의 정의처럼, 시는 두 번 회상된 기억일지도요. 그러나 그 말은 보기보다 쉽지 않을지도요. 당신은,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지나온 시간들을 한꺼번에 지니고 있는 시간 공장인 몸 안에서, “벌컥벌컥 뛰는 심장의 운동으로서, “전적으로 몸의 영역에서, 현재화된 기억들의 총체 속에서,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직조되는 동시에 자기 자신 그 다음 벨트를 이어가는 경험과 꿈과 환멸의 감각과 지각과 감정의 직물 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것인지도요. 무임금의 노동을. 하면 할수록 손해나는 적자의 노동을.

담장 밖에서 마당으로, 다시 대문 밖으로, 골목 밖으로 한 올의 수수께끼도 흘리지 않고 걷는 검은 옷을 입은 여인”(매일 한 사람씩 죽는 동네), 그녀는 자기가 일으키는 변화에는 일말의 감정도 없는 시간 그 자체인 것처럼 무정하게 자기 갈 길을 갑니다. “늦봄을 지나 장마철이 되는 동안변화하는 연두”(연두가 날아가면 남겨지는 것들)의 농도는, 그 무서운 우거짐이 보여주는 시간성의 실감은 또 어쩌게요. 당신은 19세기 러시아 소설 속의 작은 인간처럼 지나온 모든 것의 환멸에 시달리다 급기야 자신이 느끼는 수치심이 실은 당신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지도(“수치심. 나를 낳아 곱게 길러준 부모 새끼.”,작은 인간) 모르겠어요. 이즈음의 시들 속에서 깜,,,빡 간단(間斷) 속에 오가는 과거-어쩌면 가능했을 대체 현실과 생시 사이에는 죽은 걸리버여전히 여행 중인 걸리버,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한 당신에게 거의 동시에존재하지요.

잠과 현실을 오가며 차원을 자주 헛갈리는 시간 공장 근로자-공장장 장 공장장님, 당신은 혹시 살과 피와 심장에 새겨져 없어지지 않는 그때-거기의 와 지금-여기의 가 한 치의 이격(離隔)도 없으나 결코 일대일대응이 아니어서 지나간 모든 것을 떠올릴 때마다 극심한 향수에 시달리게 되는, 시간여행자의 시차증을 앓고 있나요.

언젠가 물가에 발목을 담갔던 소년, 댄스 학원과 잡지 촬영장과 방송국과 영화 촬영장과 지하 연습실을 지나 환멸과 비극을 학습하고 오랜 길을 돌아온 소년은, 이미 도착해 있으나 아직 오지 않은 자기 자신을 기다립니다(나의 일).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오랜 소문이 있었습니다만, ‘같은 발목을 욕망할 때, ‘언제인가의 나에 대한 언제인가의 나를 지난 지금의 나의 그리움이 문제일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면 할수록 적자인 것 같은 이런 노동은요.

어쩌겠나요. 시간 공장의 컨베이어벨트는 공장장도 멈출 수 없는 것일 테지요. 잘된 일도 안된 일도 아니고, 그리 생긴 것을요. 그게 멈추면, 모두 깜깜해질 테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매번 다른 방식으로 처음으로 돌아가는지도요. 그 처음이 처음이 아닐 위험을 감수하고서도요. (당신의 춤과 잠과 꿈에 질긴 안녕과 평화가 함께 하시길.)

  -<현대문학> 2021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