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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review

한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 마르타 바탈랴, 김정아 옮김, 『보이지 않는 삶』, 은행나무, 2019. 

이 책의 띠지, 출판사 서평 등에서 가장 먼저 인용하곤 하는 것은 51쪽에 쓰여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이 책은 무언가가 됐을 수도 있는 여성, 에우리지시 구스망에 대한 이야기다.

  이 문장을 읽고 나면 한 여성의 곡절 많은 인생 서사가 펼쳐질 것 같지만, 책은 우리의 기대와는 약간 다르다. 이 책의 태반은 에우리지시와 그녀를 둘러싼 모든 이들의 삶에 관한 브리핑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으며 떠올린 것은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4대에 걸친 모계 중심 대안 가족의 서사를 다룬 네덜란드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이었다. 이 소설은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 주인공들에 투영된 자기 과시적이며 마초적인 나르시시즘과 마술성을 뺀 것 같고, <안토니아스 라인>의 관대하고 강인한 인물 성격들을 보다 현실적인 관습의 한계 속에 배치한 것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소설의 많은 인물들은 작가 주변의 실제 인물들을 모델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와 인물 간의 길항에 대한 (격정보다는) 진단에서 비롯하는 서술자의 객관적인 태도는 여러 겹의 시간에 따른 흐름을 한 공간 안에 관계도처럼 펼쳐놓고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독자들이 대개 기대하게 마련인 주인공 중심의 흥미진진한 사건 전개나 극적 갈등 같은 것은 딱히 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이 소설에 별다른 이야기 전개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역설적으로 다른 이들의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청과전 둘째 딸이자 은행원을 남편으로 둔 아내이며, 남매의 엄마이면서 집 나간 언니 기다와 오랫동안 연락 없이 지내고 있는 중산층 여성 에우리지시가 어떻게, 할 수도 있었던 많은 일들을 못 하게 되고 그 좌절의 끝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모든 내력이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명절에 방문한 시골집에서 우리가 친척들로부터 전해 듣는 집안 이야기와 매우 닮았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다양하게 이야기에 삽입되는 멀고 가까운 많은 친척의 개인사는 저마다 기구하고 당대 문화와 사회에서만 용인되었던 어떤 잔인함에 종종 연루되며,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결정적인 한계와 과오를 담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살아내려던 나름의 안간힘들을 증명한다.

  에우리지시 구스망은 그러니까, 주인공이지만 그 주변의 모든 다른 사연 있는 사람들도 완전히 조연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이 소설의 한 페이지가 담고 있는 서사는 다른 책 한 권이 되기 위한 씨앗처럼 많은 정보를 품는다. 언급되는 거의 모든 이들의 인생사를 간추리고 요약하며, 필요하다면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들의 인생사까지 들려준다. 따라서 주인공의 인생사에 별다른 거창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때문에 굉장한 속도감을 느끼게 한다.

  그녀가 글을 쓰게 되기까지, 그녀는 보수적인 브라질 전통 사회의 가부장적인 분위기 속에서 나름대로 여러 번 탈출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에우리지시가 결혼을 원했을까? 어쩌면. 그녀에게 결혼이란 토착 풍습과 같은 것으로, 열여덟에서 스물다섯 사이의 남자와 여자가 저지르는 일 정도였다. 갑작스러운 감기 증세와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좀 낫다고나 할까. 사실 에우리지시가 정말 원하는 건 플루트를 연주하며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었다. 공대를 다니면서 숫자와의 의리를 지키고도 싶었다. 부모님의 청과전을 식료품점으로 만들고, 그 식료품점을 곡물 유통회사로 키운 뒤 거대한 재벌 기업으로 탈바꿈시키는 꿈도 꾸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일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다.(106쪽)

  그러나 그녀는 이 책에서 여러 번 언급된 대로 에우리지시가 에우리지시가 아니기를 바라는 에우리지시의 일부에게 설득되어 집 나간 언니의 공백을 메우고 부모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럭저럭 괜찮은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 그 이후 그녀가 시도했던 첫 번째 에우리지시 되기는 요리법 기록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개발한 요리를 식구와 동네 사람들에게 대접하고 기록으로 남겨 언젠가 책으로 출판할 수 있기를 기대하지만, 고민 끝에 보여준 요리법 노트에 대한 (그 모든 요리를 받아먹은) 남편의 무관심과 조롱은 그녀의 첫 번째 자기 되기 프로젝트를 좌절시킨다.

  두 번째로 시도했던 것은 재단과 디자인이었다. 옷 만들기에 흥미를 느낀 그녀는 천으로 된 모든 물건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웃들은 그녀의 솜씨에 반해 자신의 옷을 재단해주기를 주문하기도 했다. 주문이 많아지자 그녀는 재단사를 따로 고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자기 되기역시 남편에게 들켜 좌절하게 된다. 제법 잘 사는 중상류층의 제법 명망 있는 인사의 집안에서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자기 손으로 옷을 짓는 아내를 두고 싶지 않았던, 그녀의 그럭저럭 제법 괜찮은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제발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정말로 그것을 원했던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그녀가 상심하여 정말로 아무것도 못 하고 멍하니 앉아있게 되자, 그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세 번째 비밀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꽤 긴 시간이 흐른 후였다. 책장을 바라보고 앉아있던 그녀는 무()를 응시하기 시작했고, “바로 볼 줄 아는 능력”(205)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책장에서 영영 뽑히지 않았을 것 같았던 많은 책들을 정말로보게 만들었다. 그녀는 몰래 담배를 피우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플루트 연주자, 공학자, 유통재벌 경영을 꿈꾸던 소녀가 결혼 후 요리사, 패션 디자이너, 재단사의 꿈을 단계적으로 몰수당한 뒤 비로소 성공할 수 있었던 마지막 에우리지시 되기 프로젝트였다. 이 단계에서 그녀가 보여준 가장 특징적인 변화는 이제 그녀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에우리지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음이 에우리지시가 맞이한 새로운 단계의 일부였다.(208쪽)
(...)
무기력에도 불구하고 종이에 옮겨 담은 그녀의 글은 마력이 있었다. 그 마력이란,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에우리지시가 쓴 글에 불편함을 느끼는 많은 사람들이란 다름 아닌 동네의 여자들이었다. 젤리아와 그 추종자들은 에우리지시의 새로운 일상이 건방짐을 넘어서서 모욕적이라고까지 여겼다. 에우리지시 같은 여자가 어떻게 감히 그토록 어려운 책들을 읽고 케이크 굽는 법이 아닌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분명 에우리지시는 이웃 헌장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공동체의 행복이란 모든 구성원이 비슷해야만—그것이 은행 잔고든, 욕망이든—가능하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211쪽)

  이 책의 마지막까지 에우리지시 구스망이 어떤 글을 얼마나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도록 썼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누가 그 원고를 발견하게 될지에 대한 여러 가능성이 후기에 펼쳐져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상상적으로 읽어보자면, 어쩌면 이 소설이 에우리지시의 서랍 속에 있던 바로 그 원고일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되어 자기 자신의 눈빛을 하고 자기의 이야기를 신경 쓰지 않고하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한 사람에게 글쓰기가 자연 발생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내력과 수난과 침잠과 응시가 필요했던 것일까. 이 책은 무언가가 됐을 수도 있지만 결국 글을 쓰게 된 여성, 에우리지시 구스망의 자기 되기와 글쓰기의 자연 발생에 관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