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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review

‘보람 있다’는 게 어떤 느낌이더라?

* 오야마다 히로코, 한성례 옮김, 「공장」, 『구멍』(걷는사람, 2017) www.yes24.com/Product/Goods/50327309

 

일하고 싶은 마음이 실현되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물론 나는 일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일하고 싶지 않다. 삶의 보람이나 삶의 의미와 노동은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예전에 연결된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연결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다. 이런 생각을 이쓰미 씨에게 말하면 또 고기 먹으러 갔을 때처럼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한다는 말을 들을 것 같다. 그런 게 아니다. 일과 노동에 이르기 위한 지금까지의 과정은 싸움이라고도 말하지 못할 정체 모를 기묘한 일이다. 자신의 내면이 아닌 외부 즉, 다른 세계의 일이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일할 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최선을 다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자부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사실은 아무 가치도 없었다. 그 증거가 바로 지금의 내 처지다. 일하고 싶지 않다. 일하고 싶지 않지만 일하지 않고 살아갈 다른 대안도 없다. (285쪽)

 

이 인용문의 화자인 우시야마는 이 소설에서 돌아가며 화자 역할을 하는 세 사람 중의 하나다. 세 명의 화자는 거대한 공장 지대의 각기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있으며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기 전까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도 이들이 공장 생물 관찰 기록과 관련되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독자뿐, 인물들은 간혹 마주치기도 하지만 서로의 삶에 엮여 들어가지는 않는다.

 

가장 비중이 큰 인물이자 자주 화자로 등장하는 우시야마는 비정규직으로 문서 파쇄실에서 끊임없이 파쇄기에 문서를 넣고 있다. 다른 한 명의 화자는 인쇄실 교정부 파견직 직원으로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문서의 교정 교열을 종일 보고 있다. 이 교정 교열 작업은 사실 정말로 정밀성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2교, 3교로 돌아올 때 본래 교정 사항이 무시되거나 더 잘못돼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화자 후루후에는 15년이 넘게 옥상 녹화라는 이상한 부서를 혼자 담당하고 있지만 공장 사택 단지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매년 이끼 관찰회를 여는 것 이외에 다른 가시적인 성과는 아무것도 이루지 않고(이룰 필요도 없고 이룰 수도 없고) 있는 정규직 직원이다. 사실 다른 화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이 왜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끼를 전공하고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지도교수의 추천을 받아 대기업에 입사하게 되었을 때, 그는 그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출근 첫날부터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을 뿐더러, 공장의 그 누구도 그의 업무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니 각 인물들은 자기 일의 보람을 전혀 느끼고 있지 않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도 꽤 큰 사택 단지를 비롯해 마을을 거느리고 있는 거대한 공장지대는 그러한 각각의 의미 없는 노동 속에서 불가사의하게 유지된다. 어쩌면 ‘공장’은 한번 유지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각각의 개별적인 노동과는 상관없이 자동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야마다 히로코는 실제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녀는 마츠다 자동차 공장에서 문서를 파쇄하는 일을 했고, 자신의 팔다리가 기계의 연장으로 느껴졌던 공장 시절, 틈날 때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꼼꼼하게 온갖 것들을 메모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해서 쓰지 않고, 자신이 쓸 수밖에 없어서 썼다. 20세기에 이 소설이 나왔다면, ’80, ’90년대의 비평계는 분명히 이 소설을 해설하기 위해 노동자의 ‘소외’에 관한 『자본』의 인용문을 언급하고 남미 환상적 사실주의의 기법이 이런 주제에 적정한지 논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 전체에서 느껴지는 ‘노동자’의 지나치게 무기력한 뉘앙스를 꼬집었을 것이다. 그것은, 지난 세기 말보다 오늘날의 공장은 훨씬 더 자동화되었고, 훨씬 더 미분된 욕망들로 촘촘히 직조되었으며 그런 이유로 ‘적대’는 명확한 과녁을 가지지 않고, 따라서 불가능할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인 듯하다. 이런 ‘적대’의 무용성이 강철 같은 권태 속에 숨이 막힐 듯한 침묵으로, 역설적이지만 지나친 디테일의 치명적인 무력함으로 드러나 있다. 자기가 드러나 있는 줄도 모르고 드러나 있는 것처럼 드러나 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환상적 사실주의 기법으로 처리해 놓았지만, 어딘가 억지스럽다. 그리고 그 억지스러움이야말로 현실의 곤혹을 처참하게 확인시켜준다.

 

한편, 어딘가 21세기판 카프카처럼 느껴지고 극사실주의적인 묘사 끝에 초현실에 이르게 되는 이 소설의 전체적인 얼개는 희한하게도 2010년대 한국 소설의 어떤 흐름과 매우 유사하게 느껴진다(이 글을 쓰며 찾아보니 실제로 오야마다는 한국 동시대 소설들을 꽤 섭렵하고 있는 듯하다). 얼핏 보기에 전통적인 소설 작법을 따르고 있는 것 같은 이 소설을 세심하게 읽는 것은 때로 지루하고 때로 피곤한 일인데, (그러나 이런 종류의 필사적인 지루함과 피곤함이 전혀 없는 작품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이 소설을 비롯해서 이 책에 실린 다른 소설들―「구멍」과 「이모를 찾아가다」 역시 현실/초현실로 직조되고 착오와 통상적인 서사의 인과 관계가 뒤얽히는, 분리된 내면의 착란을 기반으로 한 서술 태도를 보여준다. 가독성을 고려해서 쓰인 누보로망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건 내 느낌이겠지. ‘가독성을 고려’할 만큼 독자의 비위를 맞추고 있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내 생각에는, 이 점이 이 작가의 미덕 중 하나이다. 가령, 이 소설에서 매번 충분한 휴지 없이 화자가 변환될 때, 어째서 쓸데없이 자잘한 묘사들은 이상하리만큼 자세해서 독자를 졸음으로 몰아넣으면서 이렇게 중요한 화자의 변환을 사소하게 처리하는지 의문이 드는데, 전통적인 소설가라면 이 같은 불균형을 매끈하게 처리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약간 생각을 달리하는 적극적인 독자라면 바로 그런 장치야말로 지위도, 성도, 연령대도 각기 다른 세 인물이 한 인물처럼 어떤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고 느끼도록 작가가 의도했을 것이라 추정하게 된다. 버전이나 주로 사용되는 소프트웨어는 다르지만 같은 운영체계 하에 작동하는 동일 브랜드의 컴퓨터처럼 말이다.

 

이 세 명의 화자가 끊임없이 읊조리는 지나치게 세세한 디테일들을 감싸고 있는 그 나른하고 권태로우며 무의미와 물음표로 가득한 세계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보면 『이방인』 식 실존주의의 변종 같기도 하다(지난달 칼럼에 그 이유를 약간 해명하긴 했지만, “카뮈 식”이라고는 쓸 수 없다. 그는 『이방인』에 대해 손해배상이라도 하듯이 『페스트』도 썼으니까). 그렇지만 역시 저 인용문이 나의 혼잣말과 너무나 닮아 있는 것은 사실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느낄 것이라 생각하면 우울해지는데...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면 정말로 비참할 테다.(끝)

-<독서In> 2020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