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글/review

도리 없이




허연, 『내가 원하는 천사』(문학과지성사, 2012) 서평

 

도리 없이

 

정한아

 

첫 번째 시집 불온한 검은 피가 나왔을 때 그는 삶의 배경에 드리워진 죽음의 냄새를 쫓으며 실존철학을 읽고 있는 젊은 시인이었고, 13년 만에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상자했을 때, 그는 삶을 위해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을 용서할 길 없어 밤에 마주친 도둑 고양이의 두 눈을 보며 추하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되새기고 있는 범인(凡人)’이 되어 있었으되 하나의 이 되고자 했다. 세 번째 시집은 이 범인, 잃어버렸으나 사라지지 않는 기억의 지층을 계속 곱씹고 있다. 그의 첫 번째 장기는 후회다.

 

혼자 아프니까 서럽다는 낡은 문자를 받고, 남은 술을 벌컥이다가 덜 자란 개들의 주검이 널려 있는 추적추적한 거리를 걸었다. 위성도시 5일장은 비릿했다.

 

떠올려보면 세월은 더디게 갔다. 지금은 사라진 하숙촌에서 나비 떼 같은 사랑을 했었고, 누군가의 얼굴이 자동차 앞 유리창에 가득할 때도 그게 끝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아득해지지 않았으니 세월은 너무 더디다.

 

이제 어떡해야 하는 거지

 

아득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 스스로 가해자가 되어 문자로 답을 보냈다. 지금에 와서 나를 울린 건 사랑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었을 뿐.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비를 피해 은하열차처럼 환한 전철 속으로 뛰어들었고.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바짓단이 다 젖도록 거리에 서 있었다.

-"후회에 대해 적다" 전문 (18-19)

 

“’혼자 아프니까 서럽다는 낡은 문자는 현재 속에 틈입하는 기억의 생생함을 과거 특정 시간으로 서둘러 회귀시키는 그의 방식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그의 시 속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 동기로서의 사라지지 않고 쌓이기만 하는 과거’(두 번째 시집부터 자주 등장하는 지층이 그 증거다)에 대해 이것이 지나간 것이다라고 자꾸만 되풀이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 과거가 현재 속에서 현재를 영위하기 힘들 만큼 자주 출몰하기 때문이리라. 그는 낡은 과거로부터 이제 막 전송된 문자는 현재적 의미를 획득하지 않는다고 애써 생각하고자 하며, 그래서 부러 낡은 문자라고 못 박고, 다음 연에서는 과거를 재서술한다’. “지금은 사라진 하숙촌에서했던 나비 떼 같은 사랑의 가난한 지복의 순간이나, “그게 끝이라고 믿었던 이별이나, “어느 것 하나 아득해지지 않았으니 세월은 너무 더디다고 그는 쓰고 있으니, 이 과거의 틈입 자체가 그의 현실이라는 점이 주는 지긋지긋하게 완료되지 않는 기억의 삶에 대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 안간힘을 쓰며 구분선을 긋는 일뿐이다. “이제 어떡해야 하는 거지라는 화자의 난감함은 아마도 혼자 아프니까 서럽다낡은 문자를 배신하고 가해자가 되어보낸 답 문자의 내용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 나를 울린 건 사랑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었을 뿐.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다.”는 뒤이은 진술만큼 뻔한 거짓말이 어디 있으랴. 정말로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바짓단이 다 젖도록 거리에 서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의 시의 대부분은 이런 일에 바쳐지고 있다. , 떼어낼 수 없는 과거를 현재로부터 고립시키려는 노력이 한 쪽에, 그러나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져 현재라고 믿어지는 것 속에 고립될까봐 두려워 과거를 소환하려는 노력이 또 한 쪽에. 그러니, 이것은 과거와 현재라는 두 개의 창문 사이에 갇힌 나비의 형국인데, 이것은 또한 자기 자신의 마음이 하는 일에 일일이 반응하는 시인의 소명에 따른 것이니, 이 마음의 생김을 선택할 자유가 없었던 그에게, 삶이란 비극이 아닌가. 사소하고 비루한 이미지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과거로부터 헤어날 길 없으면서, 동시에 헤어나면 안 된다고 여기고 있는 시인의 여린 마음에 그러므로, ‘살아라는 형벌로 주어진 삶은 흘려 보내고 또 흘려 보낸 다음에 남은 단단한 슬픔의 원자들로 표상된다.

 

초코바를 빨며 지나가는 비만의 세월을 나는 안다. 그 지독한 슬픔을

 

버섯구름의 완벽한 구도를. 기울어진 채 녹이 슬어가는 버려진 철선의 고혹적인 빛깔을. 죽어가는 쿠르드 전사들이 불렀던 사랑 노래를. 전소된 집터에서 발견된 깨어진 변기를. 신장개업 할인 마트 앞 미친 풍선 인형을. 전나무 숲에 널려 있는 치골이 튀어나온 흰 시신들에서 느껴지던 성욕을.

 

! 이미 아무것도 아니어서 쪼갤 수 없는 것들.

지독해서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을.

-"지독한 슬픔" 전문 (69)

 

초코바를 빨며 지나가는 비만의 세월”, 아마도 그것은 범인이 되어버린 현재의 (곧 과거가 될) . 그러나 다음 연에 진열된 이미지의 조각들은 시공간적으로 비만의 세월과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마치 구도가 완벽한 종군 기자의 기록처럼 낱낱이 응축된 감정들을 지니고 있다. “! 이미 아무것도 아니어서 쪼갤 수 없는 것들”, , 쪼개고 쪼개어 더는 쪼개어지지 않는 비극의 성분들. 기억의 이미지가 지닌 시공간의 스케일과 상관없이 지독해서 측정할 수 없는 것들”. 이 비극의 성분들을 느끼는것은 확실히 주관의 일일 텐데, 사적인 슬픔의 미세 성분들이야 우리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어떤 보편적인 시스템 메커니즘의 됨됨이와 관련되는 것이라면, 그에 대한 시인의 비극적인 추정의 일단을 다음과 같은 시를 통해 추측해볼 수 있지 않을까.

 

보리밭에는 언제나 바람이 불었다.

보릿대가 쓰러졌고 수백만 년이 흘렀다.

 

알에서 먼저 나온 형은 보수주의자가 된다. 동생은 기회를 노린다. 평등을 외치는 것이다. 하긴 동생으로 태어난 새가 둥우리에서 할 수 있는 건 혁명밖에 없다. 확률은 낮아서 대부분 실패하고 둥우리는 유지된다. 형은 눈물을 흘리며 동생을 밖으로 밀어낸다. 어수선해진 둥지를 추스르며. 바람이 없었다면, 중력이 없었다면, 알이 하나밖에 없었다면…… 형은 이유를 만든다. 수백만 년 동안

 

별일 아니라는 듯 새들이 하늘을 난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전문 (74)

 

시인은 영화 제목으로 시를 썼지만,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내가 머릿속에 그리는 이미지의 연쇄는 그의 시로 족하다. 이것은 인류의 투쟁사를 한 둥우리에서 태어난 형제 새의 생존 투쟁으로 환치한 것이다. 먼저 나온 새는 운명적으로보수주의자가 되고, 동생은 운명적으로기회를 노리며 평등을 외치는 혁명가가 된다. 그 시도가 성공할 확률은 낮아서 대부분 실패하고 둥우리는 유지된다”. 동생 새를 밖으로 밀어낸 형 새의 죄책감은 자기가 벌인 사건을 환경적 요인으로 돌리는 수많은 합리화의 동기가 된다. 그는 병리적인(pathological) 윤리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그가 알고도 저지른다는 뜻이다. 그리고는 살아남은 맏이들만이 수백만 년 동안//별일 아니라는 듯” “하늘을 난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세계는 알면서도 저지르는병리적인 윤리에 사로잡힌 살아남은 자들이 하늘을 점유하는 운명적으로끔찍한 곳이 아닌가. 그 많은 인공적인 제도와 의장들로 위장하고 있는 이 세계가 실은 자연 다큐멘터리의 놀랍도록 반복되는 서사와 별다를 게 없지 않을까. 물론 자연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은 대개 통속화된 인간중심주의에 의해 지배된다고 역방향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 순환적인 상호 설명이 보여주는 것은 으레 전형적인 운명적 비극이다.

시인의 이런 비극적 세계관을 다음과 같은 우화로 변형시키면, 형이건 동생이건, 중요한 건 새가 아니라 둥지이며, 주거자와는 상관없이 오직 둥우리의 관성과 건재만이 이 세계가 생겨먹은 모양새의 주된 목적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우리를 사로잡고, 어쩌면 이것은 형 새의 생각을 내면화한 동생 새가 할법한 생각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지하 도시를 건설했다.

얼룩진 빨래를

삶으며 삶을

이해했다.

지하 도시 사람들은 다 똑같다.

5분만 더 자고 싶고

한 숟가락 더 먹고 싶고

일하기는

죽기보다 싫다.

푹신한 양털 침대에서 일어나든

야자수에 걸린 해먹에서 일어나든

뭄바이 천막에서 일어나든

사람들은 모두 똑같다.

아침은 생태적으로 저주에 가깝다.

 

지하 도시는 굳건하다.

집집마다 커다란 가방이 하나씩 있다.

종종 이사에 쓰이지만

가끔씩은 생이 담긴다.

- "지하 도시" 전문 (78-79)

 

가끔씩은 생이 담긴다.”는 결구를 나는 왜 가끔씩은 주검이 담긴다로 읽었을까. ‘과거사라지지 않고 집적된 살아있는 회상으로 생각하는 시인이, 그와 마찬가지로 주검집적된 한 무더기의 생으로 간주하기 때문일 거라. ‘아침이 생태적으로 저주에 가까운지하 도시의 사람들은 개개의 치부를 삶아 없애고, ‘5분만 더 자고 싶고 한 숟가락 더 먹고 싶고 일하기는 죽기보다 싫은소소한 욕망들을 품을 따름이지만, 이 소소한 욕망들과 날마다 밀고 당긴 결과는 결국 지하 도시의 굳건함이라는 대단한 성과로 있게된다. 무언가가 새로 생기거나 파괴되면 우리는 그것을 즉각 알아채지만, 피곤하고도 거대한 무언가가 오랫동안 그대로 있다는 사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오랫동안 유지되는 피곤하고 거대한 무언가그 시간성과 공간성이 그 자체로 우리의 감각과 인식의 범주를 구성해버리니까. 이것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소소한 욕망과 길항하고, 또 제때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식지 않은 소멸의 순간을 아직 이라 부르고 싶은 시인의 미련, 그것이 거둘 수 없는 사랑이 아닐까. 그의 비극적인 세계관이 반동 형성(reaction formation)인지, 혹은 변경 가능한지의 여부보다도, 당분간 이것이 훨씬 중요하지 않을까. 시인에게 사랑은 쪼개어도 쪼개어지지 않고 과거로 돌려보내고 싶어도 자꾸만 출몰하여 현재에 걸림돌이 되는 굉장한 원자들이되, 아마도 그 최초의 모습은 이러했으리니,

 

걸어서 천년이 걸리는 길을 빗물에 쓸려가는 게 사랑이지.

-"사랑 1" 전문 (95)

 

쓸려 가며 도리 없이 다 젖는 일이고, 다 젖은 다음의 오랫동안 도리 없는 만 가지 황망함에 대해서도 역시,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군말 없이, 어쩌면 자청하여 빗물에 쓸려간 어느 날, 시인의 그 모든 비극적인 세계는 시작되었을지도. ()

 

[*] 켄 로치 감독, 2006년 작.


(<문학과사회> 2012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