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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review

논리와 착란

 서평) 함기석, 오렌지 기하학, 문학동네, 2012





 논리와 착란

 

과학적 공리의 성립은 종종 개념의 비약에 따라 출현한다. 줄리언 제인스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이 완성한 현대 물리학 공리들의 단초들은 대개 그가 아침에 면도하는 동안 떠올린 것인데, 그런 일이 왕왕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갑작스런 아이디어의 출현에 놀라 베이지 않도록 면도날을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새뮤얼 구테풀란과 마틴 탬니는 그들이 공동 저술한 논리학 서론에 논리규칙을 건너뛰는 개념의 비약에 관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어느 날 아침 E(아인슈타인) 교수는 우유(milk)를 정사각형(squere)의 시리얼(cereal) 그릇에 따르다가 문득 E=mc²이 떠올랐다. 실제 사유의 ‘흐름’은 아마 ‘우유(milk)하고...... 시리얼 스퀘어(c²)이면...... 에너지(E)가 솟아나겠지’라는 식이었을 것이다. E교수는 지난 수개월 동안 질량과 에너지 간의 관계에 대해 골몰해왔지만 여지껏 도무지 납득할 만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이제 막 그 해답을 얻었다는 확신이 들게 되었다. 수 주 후에 E교수는 E=mc²을 논문으로 발표한다. 청중 가운데 있던 한 동료 물리학자가 어떻게 이런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그 훌륭한 교수에게 묻는다. 이제 E교수는 그때의 우유와 시리얼 이야기를 다시 늘어놓을까? 천만에! 만일 질문자가 심리학자였고 맥락도 다소 달랐다면 E교수가 그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경우에 동료 물리학자가 알고자 하는 것은 E=mc²에 이르게 된 사유의 ‘흐름’이 실제로 어떠했느냐가 아니라 E=mc²이라는 주장이 어떻게 정당화되느냐이다.”


다소 긴데도 이 이야기를 인용한 것은 이야기가 재미있어서이기도 하지만, 혹 어떤 시들은 이 이야기의 역방향으로 산출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E교수가 우유와 네모진 시리얼 그릇으로부터 E=mc²으로 비약할 단초를 얻었다면, 어떤 이들은 거꾸로, 이미 있는 기호화된 공리로부터 그 공리의 기호들이 단지 희미하게 암시할 뿐인 이미지나 개념들이 배치되어 있는 장면이나 전혀 엉뚱한 ‘일종의 서사’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일종의 서사’라 한 것은 이 서사가 꼭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가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주로 꿈속에서) 하고 있는 것의 다소 전문화된 형태이기도 하다. 만일 친구에게 실수를 하고 사과할 기회를 놓치고는 꿈속에서 친구에게 맛없는 사과를 한 아름 안겨주었다고 치자. 당신은 ‘실수를 했으면 사과해야 한다’는 통상적인 윤리적 공리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강박적인 명령에 대항해 촉진된 ‘흐름’을 잠의 백지(아니, 흑판인가?)에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전제 없이 최근 수학의 개념과 기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새 시집을 출간한 함기석의 시들을 읽는다면 당신은 학창시절 칠판 가득 적힌 수식 앞에 불려 나갈 때의 공황 상태와 유사한 곤혹스러움을 느낄 수도 있다.

 

 

야옹 야옹 비가 내린다

인간의 뇌혈관 실핏줄 같은 비

비의 발톱이 정원을 쥐새끼처럼 찢어놓는다

나는 3층 2층 1층 0층을 차례로 올라가

공중의 지하실에 도착한다

거기서 비의 공격성이

인체와 정신에 미치는 충격을 수량화한다

시 대신 기하학 문제를 풀며 오렌지랑 논다

3차원의 내가 1차원의 나를 초대해

2차원 마을에 사는 나를 찾아가는 상상을 한다

상상은 피로 물든 백지와 함께 나를 찾아온다

나는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그래도 야옹 야옹 비가 내린다 오렌지는 웃고

기하학은 기하학을 살해한다

-「오렌지 기하학」 전문. (이 시는 시집 맨 앞에 놓인 ‘경고’ 표지판이다. 예열하시오. (어째서 다른 많은 시들을 인용하기 곤란한지 직접 확인하라.))

 

함기석의 시는 수학적 모티프들과 시적 이미지들을 섞으려 한다. 초현실주의자들이 보여주었듯이, 이것이 불가능하지 않은 것은, 우리들이 모두 조금씩 초현실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우선 특징적으로 표면에 드러나는 ‘개념적 비약’과 이미지의 결합이 가능한 조건이 다음과 같은 사실로부터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즉, 논리(논증)와 상상은 거대한 공통분모를 가지는데, 그것은 논리도, 상상도, 일단 주어진 최초의 가설이나 몽상의 단초가 발아하는 순간, 실제 현실과 부합하느냐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 자체로 진행되는 자율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경험 현실에 비추어보았을 때 그것들이 얼마나 엉뚱하거나 섬뜩한가는 지적 자율성에 의해 밀고 나간 학문적인 가설이 결국 비인간적인 파국으로 치달을 때나 꿈속에서 태연하게 받아들였던 상황과 사물을 꿈에서 깨어나 되새기면서 몸서리칠 때를 떠올리면 알 수 있다.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가 불신의 자발적 정지를 통한 독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경험적 현실이라고 생각해보라. 그것은 꿈같은 현실이기는 하되, 악몽에 가까울 것이다.) 종국에는 ‘비인도적인’ 모든 비약과 상상의 자율적인 전개가 허용되는 것은 그것이 여전히 ‘가설’이거나 ‘꿈’이라고 간주될 때일 것이다. 학문과 예술은 당분간 이들을 제도적인 체류지에서 발효시킨다. 어떤 이들은 개념의 비약과 이미지의 제약 없는 상상이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현장을 당신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오, 이 시집은 금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함기석은 이 같은 점을 잘 알고 있다. “너의 모순 없는 주장처럼/모순이 없고 충분히 강력한 어떤 공리계에서/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명제가 존재한다면/그건 사랑이고 죽음일 거다/우리의 말과 수학기호, 기억의 불완전성을 우주는/시간의 불완전성 정리로 정리해 명료히 망각할 거다”.(「제로 행성-규락에게」)


함기석은 이 같은 ‘논리와 상상’의 결합을 시도함으로써 신비주의에 다가서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이것은 M. C. 에셔가 그림으로 계속 시도했던 것이기도 하다. 「폭포」를 비롯한 일단의 에셔 작품들은 2차원 평면에 공간적 깊이를 표현하는 그림의 특징을 이용하여 원근착시도형들에 사실적인 세부를 더함으로써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상의 세계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이 구도의 밑그림인 도형의 실제적인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그의 작품들의 예술적 가치를 떨어뜨리기는커녕 지적하는 자의 상상력의 결핍을 드러내는 일이 된다. 결론을 말하자면, 그 착오가 가능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무모순에 대한 기대야말로 이 초현실성을 실로 실감 있게 하는 근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우리는 우리의 논리적 관성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것인데, 함기석 시에서 종종 드러나는 (논리적으로는 일탈이거나 ‘유의미하지 않음-참도 거짓도 아님’으로 간주되는) 어휘들(과 그것이 그림자처럼 거느리고 다니는 이미지나 뉘앙스)의 자리바꿈과 임의적인 배치가 우리에게 ‘이상한 나라’의 감각을 가져다주는 것은 바로 시인과 독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논리적 사고의 관성이 이 황홀한 착오들의 강고한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논리적인 전개에 대한 기대를 증폭시키는 형식, 그 형식이야말로 독자의 논리적 사고의 관성을 구조화하고 착란의 함정과 덫을 놓아 초현실로 굴러 떨어지게 만드는 주범이다. 그것은 단순히 ‘스타일’이 아니다. 롤랑 바르트는 언젠가 ‘스타일은 도피다’라고 했거니와, 함기석의 형식은 갈아입는 옷이 아니라 자기 몸의 무늬다. 그 자신이 다음과 같이 말한 바도 있거니와. “나에게 시의 형식이란 시의 육체의 외적 연장이지 시각적 수사나 현혹이 아니다. 모든 시의 형식은 시인 자신과 언어의 실존의 투사이자 현기증이다.”(「언어는 감각의 육체다」, 열린 시학 2006년 여름호.)


이와 관련하여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정신분석학의 잘 알려진 진술은 다음과 같은 함의를 가진 것으로 드러난다. 즉, 단지 누군가의 농담이나 말실수로부터 그의 무의식이 징후로 드러난다는 표면적인 해석뿐 아니라, ‘언어’를 통해 대별되는 논리 자체가 무차별적이고 임의적인 성격을 배태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째서 우리는 강의실에서의 대화에서 이따금 삼천포에 빠지고 또 종종 이것을 기대하기도 하는가? 지성이건 감성이건, 지루한 것을 못 참기 때문이 아닌가?) 이것은 절대 터무니없지 않은데, 진술은 논리적이거나 비논리적일 수 있지만 비논리적인 진술 형식 자체가 논리를 전제로 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착란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고한 논리적 사고와 문법적 구조의 관성이 바로 착오와 착란을 ‘현실적으로’ 실감하게 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명사들은 시공간적 배치의 변화에 따라 다른 현실들을 창조하는 임의적인 오브제 역할을 하게 된다.


가령, 빵이 하늘에 떠 있는 마그리트의 작품이 전해주는 초현실적인 실감은 우리가 실제로 하늘에 떠 있는 구름들을 본 무수한 경험들과, 붓 터치의 사실적인 묘사에 ‘구름’의 자리를 변항으로 간주하고 거기에 ‘빵’을 배치한 간단한 자리바꿈으로부터 온다. 다음의 시를 보자.

 

 

그리고는 검다

발톱을 세우고 풀숲에 숨을 죽이고 기다리다

얼룩말이 지나가자 번개처럼 덮친다

 

그러나 달려온다

성깔이 사납고 갈기가 무성한 그러나

말을 강탈해 말의 심장과 내장을 먹는다

 

그리고는 나무 위로 달아나

사라지는 말의 얼룩과 살점들을 바라본다

핏속에서 드러나는 말의 흰 뼈

 

그런데 난다

검은 날개를 펴고 빙빙 하늘을 돌다 내려와

말의 주검의 잔해들을 쪼아 먹는다

 

그러자 빗속을 달려온다

하이에나 소리를 내며

말의 뼈를 부수어 깨끗이 먹어치운다

-「아프리카」 전문. 

시인이 접속어들을 동물 이름이 올 것이라 기대되는 주어의 자리에 배치했을 때, 이 시의 나머지 부분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화면처럼 익숙했던 장면으로부터 그럴 수 없이 기괴하고 낯선 ‘말들(words)의 밀림’으로 화한다. 그 나머지 부분이 유도하는 ‘관성’이야말로 실로 논리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사고의 관성에 대한 앎(관성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가와 그 패턴)과 개방적인 사고(관성에 따른 사고의 운동 경로로부터 나갔다가 돌아오는 유연함과 탄성)가 동시에 발달한 사람만이 뛰어난 ‘초현실적 실감’을 실제로 초래할 수 있음을 실증한다. 논리를 오래 연습하면서 즐겨 상상하는 자만이 능란히 속이는 착시를 만들 수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착란의 강고한 배경으로 자리한 우리들 자신의 논리적 사고의 관성과 그것이 어떻게 논리적 착시와 착오를 통해 간단히 파열되고 다른 세계를 만드는가에 중점을 두었으되,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말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시각적 형태와의 교호에 관해서는 충분히 논하지 못 했다. 그 같은 ‘보여주기’의 시들은 갤러리에 걸고 개념 미술이라고 주장해도 이상하지 않은 작품들이다. 그의 시 속에서 지속적으로 탈옥을 감행하던 말들이 드디어 자기의 몸 자체를 변용시키기에 이르렀다고 해야 할까. 그는 말들이 사물이 될 때까지 풀무질과 담금질을 계속하고 있다.

 

 

나는 녹지 않는 문장을 녹여 사물을 만드는 대장장이

눈물은 어디서 왜 오는가--이것을 녹여 심폐현미경

절망은 왜 끝나지 않는가--이것을 녹여 극한 망원경

--「4개의 회전체 眼球 사이에서 作圖되는 6개의 선과 4개의 면과 다면체 언어 큐브」의 결구. 


-문학동네 2012년 가을호(2012-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