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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승, <친애하는 사물들>(문학동네, 2012) 해설) 거기 수심이 얼마나 됩니까

이현승 시집 친애하는 사물들 해설




거기 수심이 얼마나 됩니까?

 

정한아

 

 

당신이 비로소 자발적으로 혼자일 때

 

 

당신에게 당신 한 사람만 탈 수 있는 잠수정이 주어진다면, 당신은 이것을 타고 어디까지 내려가고 싶을까? 실제로 돌고래 모양으로 생긴 레포츠 용도의 일인용 잠수정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은 잠수가 목적이 아니라 수면 바로 아래에서 달리거나 수면 위로 뛰어오르거나 뛰어올라 한 바퀴 돌기 위한 것이다. 잠수란 무릇 수면 아래로 깊이 깊이 침잠하는 일. 레포츠용 돌고래 잠수정이 유희를 위한 것이라면, 이현승의 일인용 잠수정은 명상과 사색으로 당신을 유도하여 당신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도록 한다. 그러나 이 명상과 사색은 위안을 주어 당장의 양심을 편안하게 하거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가혹한 진실을 꿰뚫어 관조하기(contemplate) 위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시집은 끊임없이 ‘세계 안에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익숙하고도 괴상망측한 자기의 현실 속에서 물으면서 독자를 부지불식간에 이 성찰에 참여시키는 철학적 성격을 담고 있다.


당신은 수면 위와는 달리 조용한 물밑으로 내려가면서 처음에는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다. 엄마의 자궁 속에서 얇은 막에 싸여 물에 잠겨 지내던 기억할 수 없는 옛날을 갑자기 떠올린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제 막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상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투과하는 햇빛의 양이 점점 줄어들고, 수온이 점차 내려가고, 망측한 모양의 생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 당신은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관광 상품이 되려면, 일인용이어서는 곤란하다고. 그러니까 우선 당신은 당신에게 쏟아지는 세계의 중압감을 맞서는 데 있어 타인이 대신 제공해주는 관점 같은 것은 안경집에 고이 넣어둔 채, 자기 자신으로서 생각한다는 일의 힘겨움과 의미를 알게 된다. 대부분이 침묵인 깊은 어둠 속에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당신은 두려움에 떨게 되리라. 어제인지 오늘인지 헷갈리고, 차라리 어서 한계 수심에 닿기를 바라고, 다시 떠오를 수 있을지 근심하고, 당신과 닮은 타인의 존재를 화급하게 요구하고, 급기야 당신 자신이 ‘정말로’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물을 것이다. 그것은 궁금증과 두려움이 혼재된 형태의 질문으로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당신은 다행히도 잠수정을 타고 있다. 이 최소한의 공간, 당신과 당신을 질식시킬 거대한 물 사이의 완충지대를 제공하는 잠수정은 당신의 생명을 담보하는 최종의 보장물이다. 당신 자신의 연장(extension)이며, 당신의 일부인 잠수정. 이것을 당신의 마음과 당신을 질식시키는 외부 세계 사이의 완충지대인 당신의 피부라고 불러보자.


어떤 로봇 애니메이션에서 조종사들이 자기의 연장이자 일부로서 로봇을 ‘입듯이’, 그리고 이 조종사들의 연장된 신체가 된 로봇들이 또 한 번 방어막을 ‘입듯이’, 우리는 중력과 수압, 망측한 괴물 같은 타인과 급격한 감정의 온도 격차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 위로 저 추상적인 ‘사회’가 제공해준 언어를 삼켰다가 ‘나’의 말로 뽑아 낸 제2의 피부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각질처럼 연약한 부위를 보호하고, 더러 굳은살처럼 어지간한 충격에는 긁히거나 찢어지지 않도록 우리 감정과 생각의 장기들--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희미한 뭉치--을 보호해준다. ‘나’의 외피 안에서 ‘나’가 온전히 혼자 견디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그리하여 잠수정은 공상이나 상상의 영역이 아니라 우리 자신, 각자 계발한 외피를 입고 있는 현실의 ‘자기’들의 비유이되, 유머와 지혜의 단단한 외피를 입고 깊은 수심을 혼자서 견뎌내는 이현승의 화자들 자신의 이미지와 매우 닮아 있다. 이현승의 사색적인 화자들은 강고한 지성적 외피를 입고 있다. 이 화자들이 깊은 수심 속에서도 일희일비하지 않는 까닭은 탄성이 뛰어난 굳은살 탓이다. 이 지성의 굳은살 안에서 그는 즐겨 명상하며, 기꺼이 그럴 수 없는 순간에도 사색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가 종종 울음이나 웃음의 감정적 표현을 시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상황의 심부에서 깨달음을 건져 올리는 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그는 이미 자기 안에 맹수와 비명을 함께 지니고 있었으되, 이 적대적인 ‘둘’의 연방으로서의 자아가 온갖 양가적인 일상적 사태들--친애하는 망측한 사물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교호(交互)하게 되었는지의 내력을 전작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에서 보여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