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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비명처럼 무조(無調)라서: 김혜순론을 쓰기 위하여 않아에 관해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부끄럼 많은 요나 부크롬 씨는 한동안 심하게 망설였다. 고민하던 나머지 친구 병조림 인간에게 상의하고 싶었지만 그는 냉가슴이라는 돌림병을 여직 앓고 있어 말을 걸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맨홀 뚜껑 아래 시궁창에서 쥐 죽은 듯 지내던 크루소 씨에게 물어보았다. 않아는 40여 년 간 글을 써온 사람입니다. 저는 그의 글을 10대 시절부터 읽어왔지만 한꺼번에 몰아서 읽은 적은 없었어요. 않아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은 않아의 이름으로 출간되어 있는 시집 열다섯 권과 산문 세 권과 그밖에 그와 대담을 나눈 여러 사람들의 기록과 그에 관한 수많은 논문과 평론을 읽고 그것으로 그의 인생 40여 년을 가늠하여 종합한 뒤 마치 그것이 그에 관한 모든 것이라 이해하는 척..
wit n (zonna) cynical ...누나, 내가 이번에 승언이 책이랑 누나 책을 읽으면서 드디어 우리 동인의 공통점을 알았어. ...뭔데? 우린 각자 자기 방식으로 존나 시니컬해. ...네가 시니컬하다고? 누나가 건조하게 시니컬하다면 나는 축축하게 시니컬한 거지. ...너 안 축축해. 욕하지 마.
어차피즘 연구를 위한 메모 1. 어차피 씨는 누구인가 어차피 씨가 언제부터 어차피 씨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일주일에 서너 번씩 만취하고 나머지 3, 4일은 숙취를 벗어나느라 바빴던 젊은 시절에 그는 소위 X세대라는 그룹에 속해 있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비슷한 시기 신세대나 오렌지족도 있었지만 신세대는 뭔가 뒤쳐진 낱말 같았고 오렌지족은 계급적으로 한정되어 위화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X세대라 불리는 편을 선호했던 것 같다. 어차피 세대에 대한 명명은 윗세대 사람들의 일이니까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었겠지만, 나이 들고 보니 그나마 X세대가 가장 중립적인 명칭으로 여겨졌던 듯 싶다. 7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졸업할 때쯤 IMF 사태를 맞닥뜨린 사람. 친구들 중에는 선배들이 차린 IT 벤처 기업에서 일하다 거..
시간 공장 공장장 장 공장장님께: 장수진 시인 핀 시리즈 집중 리뷰 꼭 20년 전에 극단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어린이 마당극을 주말마다 공연해야 하는 극단에서였지요. 무대연출 보조로 잠시 투입된 저는 한 달 동안 새벽 5시에 나가 자정 넘어 귀가하면서, 극 중에서 해가 뜨면 해를 올리고 달이 뜨면 달을 올리고 멍 박사 옷이 찢어지면 바느질을 하고 마지막 한마당에 아이들에게 뿌릴 색종이를 무한히 자르고 끝없이 짐을 날라야 했습니다. 배우들의 몸은 쉬지 않고 연습을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변함없는 페이스로 터보 엔진처럼 무섭게 움직이더군요. 마지막 공연 뒤풀이에서 저는 만 원권 10장이 든 봉투를 받아들고 짜고 쓴 눈물을 삼켰습니다만, “적자가 3천 밖에 안 돼, 이번엔 선방했다!”는 극단 일원의 건배사에 뒤통수를 맞고 눈물이 쏙 들어갔더..
조롱당한 경비로봇 https://m.hani.co.kr/arti/economy/it/804067.html#cb
유다, 예수, 대심문관: 이율배반과 논리적 구원의 불가능성 * 오리너구리, 『빵과 차(茶): 무의미 이후 김춘수의 문학과 정치』의 일부를 소개하면서 나는 이 논문을 오래된 의문으로부터 시작했다. 그것은 어떻게 순수시의 대가가 5공화국의 국회의원이 되었을까 하는, 다시 말해 「꽃」과 전두환 퇴임식 축시인 「님이시여 겨레의 빛이 되고 역사의 소금이 되소서」 사이의 간극에 대한 의문이었다. (이 퇴임식 영상은 지금도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 가관이다.)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김춘수가 쓴 거의 모든 글과 김춘수가 읽었다고 쓴 거의 모든 글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찾아 읽었다. 그랬더니 이상한 점들이 점점 더 많이 발견되고 거기에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패턴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궁금함이 거의 수사기록에 가까운 논문을 쓰게 만든 것 같다. 그는 국회의원과 ..
왕의 박력을 가진 시인이 있었다면 * 조 메노스키 지음, 정윤희, 정다솜, Stella Cho 외 옮김, 『킹 세종 더 그레이트』, 핏북, 2020 처음 이 책이 흥미를 끌었던 것은 작가가 “스타트랙” 시리즈의 집필자 중 한 명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는 한동안 이공계 연구자들이 주인공인 시트콤 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나 자신이 “스타트랙”을 좋아했다기보다는 철없이 학교에서 나이 먹어가는 의 주인공들이 홀딱 반해 있는 “스타트랙”에 대한 경외감과 ‘덕질’할 때의 감정에 이입한 상태에서 이 책의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한국말하고 한글 쓰는 자연인의 입장과 에 대한 팬의 애정이 혼합되어 대뜸 이 책을 사고 말았다고나 할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스타트랙”처럼 미국적인(마치 각국의 이민자들이 연방을 이루듯이 다종다양한 행성의 사람들이 ‘연합..
우리가 정말 모르는 것들에 관하여 * 장 뤽 낭시, 이영선 옮김,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 갈무리, 2012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것은 2012년 말 무렵이었다. 낭시는 이미 라쿠-라바르트와 공동으로 출간한 책의 번역본으로 한국에 소개되어 있었고, 문학계에서 한창 ‘시와 정치 논쟁’이라 불린 뜨거운 논란 속에서 관심의 정점에 있던 자크 랑시에르와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프랑스 철학자 중 하나로 알려져 있었다. 이런 저런 이유들로 나는 몹시 지쳐 있었는데(‘지쳐 있다’는 게 사실 우리 시대 사람들의 정서적인 디폴트 값이기는 하지만) 특히나 패퇴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 정치적인 환경은 계속되는 장마처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나는 나의 희미한 (그 어떤 종류의 신에라도) 신앙을 잃었고, 사람들에 대한 환멸에 사로잡혔으며, 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