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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문학의 공포

1. 초월적 상상력의 부정적 총체성으로 얼룩진 ‘세계의 밤’을 지나 ‘우리-없는-세계’의 ‘존재-없는-생명’의 공포에 도달한다. 또는 충동의 가없는 질주를 지나 매끄럽게 균질화된 권태로운 기분의 세계에 도착한다. 아무튼 저 세계의 밤은 충동과 부정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이 ‘우리-없는-세계’, 또는 균질화된 권태 속을 미끄러져 가는 지금-여기의 시공간은 가장 작은 요철도 무덤처럼 불룩한 충격을 안겨주는 곳이다. 어쩌면 낭만주의 다음에 고전주의가 오는 것처럼, 혹은 패션 유행의 30년 주기설처럼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세대는 복고를 새것으로 겪는 것일지도. 그러나 과거와 꼭 같이 반복되지 않으므로, 복고가 되기 전의 그것을 겪은 사람은 거부감을 표시할지도. 그러고 보면 이즈음의 시는 어떤 면에서는 1990년대와 썩 닮았다. 형태가 아니라 기저의 근본 기분이. 1990년대의 서정시가 그랬던 것처럼, 이즈음 시의 많은 화자들은 비밀스럽게 감상적이다.

 

2. 이것이 2천 년대부터 지금까지 내 신체와 심리에 새겨진 경험을 통해 떠올리면 간신히 요약해낼 수 있는 몇 개의 문장이다. 물론 이 요약은 많은 개별 사례들을 생략한 뒤, 저 개념들의 환기와 발명/발견의 도움을 받은 뒤에야 가능할 것이다. 저 개념들의 환기와 발명/발견은 이론화하려 안간힘을 쓰는 이성의 발휘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는 주체를 벗어나려는 것은 생각하는 주체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 때문에 힘겹고 무의미한 시도가 될 뿐 아니라, 애초에 불가능할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이 모든 가치들이 평준화된 경우를, 그러니까 생각 자체가 없어진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어쩌면 나대신 생각해줄 신체 없는 지능이 빠른 속도로 진화 중이니 생각보다 더 이른 시일 내에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그런 소문이 너무나 무성하기 때문에, 우리는 파산 루머가 도는 주식회사처럼 소문을 모방하다가 정말로 그렇게 될 수도 있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응용해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럴 때 더 이상 주체가 아닌 주체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네가 (대신) 생각한다. 고로 나는 이제 좀 잘게. 아시모프의 「최후의 질문」의 비틀린 판본 같구나.

그러나 나는 내가 보아온 한 20년 남짓을 이렇게 간신히 요약하고 곧바로 불안에 시달린 직후 다음과 같이 한 사람의 시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뒤죽박죽 다른 모양으로 흐트러질 수도 있을 것이다.

 

3. 훗날 ‘미래파’, 또는 ‘2천 년대 젊은 시인들’의 대표 주자라 불리게 된 사람의 시를 처음 읽었을 때를 떠올리면 나는 희한하게도 도널드 바셀미 같은 미국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아니, 도널드 바셀미가 이 사람을 광범위하게 표절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해럴드 블룸이 『영향에 대한 불안』에서 ‘독자가 어떤 시인의 시를 읽고 그의 선대 시인의 시를 읽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선대 시인이 후대 시인을 표절하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 모든 후대 시인들의 열망’이라고 했던 것의 사례가 아닐까. 만일 황병승이 바셀미를 아버지 시인으로 생각하기라도 했다면 말이다. 1990년대에 태어난 음악 애호가라면, 장기하에 귀가 익숙해진 뒤 배철수를 들으면 그런 기분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자우림에 익숙해진 뒤에 크랜베리즈를 들을 때나 신중현을 듣고 지미 헨드릭스를 들어도 그럴 수 있다. 어쩌면 지금은 LP나 카세트테이프, CD 앨범의 물리적 속성을 통해 손으로 만져지는 감촉이나 (판의 스크래치나 테이프의 늘어진 정도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지는) 시간에 따른 미세한 소리의 변화, 앨범 자켓의 낡아가는 과정을 통한 시각적 정보 같은 감각적 경험 특질들이 사라진 후라 더 그럴 수도 있다. 이것은 점점 종이책이 사라지고 디지털 부호로 남게 되고 있는 문자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문학은, 순전히 독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연구자로서 머릿속에 연대기표가 입력되어 있지 않은 경우라면, 그리고 실시간으로 따라가며 충분히 시간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라면, 애써 연대기적이지 않다. (시 강독 강의실의 학생들이 들여다보는 태블릿 속이 그렇듯이) 향유된 경험 속 시간의 저수지는 허구와 역사와 실질적인 인과관계가 실제로는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마구 뒤섞여 있는 수프와 같다. 심지어 언제 출간되었느냐 보다 수용자가 언제 접했느냐가 더 문제될 수도 있다. 순전한 독자-나에게는 이상과 카프카와 양선형과 도널드 바셀미와 제임스 조이스와 황병승과 김혜순이 언어 게임 속에서 친밀한 가족 유사성으로 연결된다. 내가 서점 주인이라면 이들을 같은 서가에 배치할지도 모른다.

 

4. (본래적으로, 시는, 대형 온라인 서점이 시라고 부르는 것의 테두리를 훨씬 더 넘쳐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지면이 지면이니만큼 보다 관습화된 범주에 한정해야 할 테다. 그러니 너무 멀리 가지 말도록 하자.) 그러나 또 한편, 언젠가 쓴 적도 있지만, 황병승은 20세기 후반 장정일의 적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해도 아버지의 인정을 굳이 갈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이들의 특징이다. 그들은 ‘아바 아버지’--강제된 표준에 대한 생래적인 면역거부반응이 있었던 것 같다. 이 말은, 외설적인 아버지에 대한 노골적인 폭로를 위해서는 외설적인 재현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압도적인 대안적 폭력을 필요로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이 황병승의 시집 해설에 “숭고한 뒤죽박죽 캠프” 같은 제목이 붙은 이유이고, 장정일이 『서울에서 보낸 3주일』의 책 말미에 남이 써준 해설 대신 자신이 쓴 평론을 실으면서 1980년대 시인들을 한데 모아 불사르고 있는 이유다. 매우 거칠게 나는 다음과 같이 섣부른 주장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조짐은 모더니즘이 몰래 측은히 여겼던 아버지의 시체를 장지(葬地)까지 질질 끌고 가며 모독하는 자의 울부짖음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었다고. 오늘날의 독자가 보기에 그 울부짖음은 폭압적인 아버지의 고함만큼이나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다.

 

나는 두드린다!

어린이날이라고

당신은 나를 피아노 앞에 주저앉히고

나는 더 세고 강하게!

두드려도 괴롭고

두드리지 않아도 괴롭고

당신은 그저 즐거워, 한다 어린이날 기념 독주회라고

우리 아이는요 금세 피아노의 주인이 됩니다 보세요

곧 알게 되겠지만,

내가 당신을 이해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황병승, 「어린이날기념좌절어린이독주회」 결구, 『트랙과 들판의 별』, 문학과지성사, 2007

 

그런 건 불필요했다, 죽은 아버지가 말했다. 왜냐하면 나는 아버지니까. 모든 방식은 나의 방식이다. 모든 형상과 모든 배경은 내 머릿속에서 나온 내 것이다. 모든 색채는 내 것이다. 너는 내 의미를 앗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요, 줄리가 말했다.

-도널드 바셀미, 『죽은 아버지』 중에서, 김선형 옮김, 팽귄클래식 코리아, 2011(원작 1975)

 

 

5. 나는 지금 유진 새커가 블랙 메탈로 시작해서 흑마술과 고딕소설을 지나 21세기 재난영화로 마무리함으로써 악마학을 존재신학에 얹어 어렴풋이 보여주고자 했던 철학의 공포의 여운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가 설명하는 20세기 공포영화의 특징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전형 알레고리 현시방식 형이상학적 원리 살아 있는 모순으로서의 후생의 형태
살아 있는 시체 좀비 하층계급의 폭동 다중, 전염병 활기 있는 시체
언데드 흡혈귀 낭만적인 귀족계층의 몰락 인간과 동물 변환, 유기체와 무기체 변환 불멸성의 부식
악마 혼합물(인간의 몸+ 악마의 혼), 혼종 중산층이나 부르주아, 때로 치유의 틀 또는 임상의 틀에 속한다 인간을 짐승으로, 짐승을 신으로 변형(위계상의 변환) 고기 초자연적 존재인 동시에 비천한 짐승
허깨비 유령 후생의 미지의 기원(정신이나 영혼 혹은 그 세속적 형태인 기억의 영역) 영매, 물리적 세계 속 대상의 변화, 징후와 전조에 의한 현시 정신 비물질성의 물질화

다소 도식적이지만 다채로워 보인다. 도식적인 것들은 가끔 그리움을 유발한다. 괴수의 종류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으로 전승된 익숙한 ‘전통’에 입각해 있다. 이미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전형적인 서사를 생각하게 되고, 그 서사들은 괴수들의 특징에 알맞은 사회적 알레고리의 의미와, 형이상학적인 각각의 원리와, 악몽이 도사린 무의식에서부터 기어 나온 것 같은 ‘살아 있는 모순으로서의 형태’, 그러나 반드시 인간을 닮아 있고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언젠가 ‘신’(들)이 그러했듯이. 마치 ‘시적인 것’에 대한 여러 정의가 그러했듯이.

그러나 유진 새커는 그보다 최근에 등장한 공포영화들의 공포의 뚜렷한 특질을 그 익명성이라고 해석한다. <The Being>, <The Entity>, <It’s Alive!>, <It Lives Again>, <The Stuff>, <Them!>, <The Thing> 같은 제목의 영화들에서 공포를 주는 대상은 분류도 거의 무의미하다. 이 이름들은 ‘거기 있음’의 다른 명칭에 불과하다. 물론 이 해석은 2010년에 출간된 것이므로, 코로나 언택트 기간 동안 질병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데카메론’을 제공하기 위해 이미지에 이미지를 덧칠해야 했던 OTT의 폭발적인 괴수 재해석 속도전을 비롯한 나머지 10여 년은 별도의 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대중적 공포의 대상이 살, 피, 고기, (반투명한) 정신처럼 이미지와 덩어리감, 축축함과 일정한 공간 점유의 신체적 속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달리 점점 더 그냥 ‘있음’이나 ‘it’으로 명명불가능하고 새커 말마따나 ‘기후학적인’ 실체 없는 생명으로 재현되는 양상은 2천 년대 시에 흘러넘치던 피, 살, 고기의 현기증 나는 실재의 현시적 공포와 충동의 육화가 휩쓸고 간 후 도래한 존재신학적인 암시의 시들의 전개와 모종의 유사성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저 괄호 안의, 으스스한 익명의 공포의 대상들은 한때 ‘신’이나 ‘물 자체’를 일컫는 말들이었고, 공교롭게도 한국담배인삼공사가 ’90년대에 출시한 뒤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담배 이름들—(연기가 되어 사라질) 이것This, 존재Esse—과 겹친다.)

 

물탱크가 있다

환기구가 있다

창문이 있다

5층의 건물이 있다

간판이 있다

전신주가 그 앞에 있다

내가 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내가 있다

무작정 올라갔더니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지나가면

옥상이 있다

거기에는 물탱크가 있다

 

푸른 물탱크가 있다

- 황인찬, 「개종 2」, 『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

 

6. 푸른 물탱크는 생각하기에 따라 숭고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이 시에 등장하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이것은 ‘하느님 아버지’처럼 육중하고 이 건물의 생명을 관장할 것만 같은 팽창한 능력을 떠올리는 한편, 저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을 급작스럽게 팽창시키고, 다음 순간, 화자는 너스레를 떨면서 말한다. 이거 봐, 당신들이 ‘위층에 계시는 그분’(The one upstairs, 아차, the one도 담배 이름이다)이라고 부르는 분이 바로 이분이셔. 알아서 모시라고. 공포와 신성과 웃음이 번갈아 자리를 바꾸는 물탱크가 이 시에서 하는 역할은 순전히 ‘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공집합처럼.

 

7. 이런, 살아 있는 시인은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실수다. 그러고 보니 유진 새커도 살아 있는 시인이네.

 

8. 왜 나는 이제 될 수 있으면 살아 있는 사람들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까?

 

9. 철학의 공포를 빌려서 문학의 공포를 이야기하려 했지만, 두 번 죽은 아버지가 공집합이 되었는데도 완전히 잃어지지 않아 희망을 가져야 할지 절망해야 할지 헷갈리고 있다. 아아, 여기구나. 포스트모던의 무간지옥이.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으려면: 길을 잃은 아버지를 찾는 데 있어 첫 번째 문제는 일단 그를 잃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바셀미, 같은 책

(끝)

  - <현대시학> 2024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