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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inid / hominin http://mmemories.tistory.com/trackback/235 http://jjy0501.blogspot.kr/2013/12/Oldest-Hominin-DNA-Sequenced.html
타박타박 지난 학기 한국 현대시강독을 들은 한 학생(동아리에서 힙합 하느라 학교를 무지 오래 다닌)이 기말 보고서에 첨부한 음악. 기형도의 시 을 원작으로 만들었다. 다시 들어도 좋구나. 올해가 가기 전에 여기에라도 올려놓아야겠다.
<혁명을 팝니다> 2013-07-29 (월) 조지프 히스, 앤드류 포터, 윤미경 옮김(마티, 2006)를 읽다가. 185쪽. 반문화의 지지자들이 정신질환과 반문화적 저항, 혹은 불순응을 혼동하게 된 사태에 관하여. 정신 이상의 낭만화. 황지우의 90년대 후반 '착란적인 것'의 詩化, 김수영의 일기("아내여, 언젠가 내가 정말 미치게 된다면..."). 반문화와 시. 김수영, 김춘수의 작품들을 일종의 반문화적 소비재로 간주했을 때 당대와 이후에 미치게 된 영향들에 관하여. 반문화의 지지자들, 가령 푸코가 범죄, 정신질환 등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광기를 거의 언제나 옹호하려 한다는 사실. "예수가 오늘날 세상에 온다면, 그도 역시 시설에 감금될 것이다. 하지만 살인광은 권력의 통로들을 활보한다."(186) 윌리엄 버로스, 비트족..
왼손의 투쟁 시에 관해 생각하고 있으면 시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오르가즘에 대해 생각하느라 전혀 감흥을 느낄 수 없는 애정 행위와 비슷할 것이다. 시는 아마도 반쯤 무의식적이고 집중된 행동의 일환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처음 무엇인가 자기 속엣말을 순전히 자발적으로 백지에 적기 시작한 시점을 떠올려보면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다. 속엣말은 흔히 (기억과 상상을 포함한) 생각이거나 느낌이거나 이 둘의 혼합일 터이고, 양 끝에 생각과 느낌이 있는 선분 위의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 그 스펙트럼의 어디쯤이 좋은지에 관해 쓴다는 것은 매우 곤란하고 불쾌한 일이다. 게다가 ‘좋음’이란 얼마나 애매한 말인가. 그것은 개인의 취향에만 국한되는 ‘좋아하다’의 명사형(‘좋아함’)이 아니라 객관적인 훌륭한 상태의 진선미가 통..
무덤 속에서 자라는 머리카락 #1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아,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든 사상 가운데 가장 축복 받은 이 사상을 취하여 그처럼 허송세월하고 있는 이 비참, 인간은 각기 다른 일에 종사하고 있다거나 군중에 관해서 얘기한다면, 인생의 연극에 있어서는 군중을 힘으로 사용하면서 다른 일에 종사하고 있으나 결코 이 축복만은 기억나게 하지 못하는 이 비참, 즉 군중이 개개인으로 분리되고, 그것에 의하여 각 개인이 최고이고 또 유일한 것을 획득하게 된다면 그로 인하여 인생이 가치 있는 것이 되며 그 안에서 사는 것은 영원도 결코 길 수는 없는데, 그와 반대로 인간이 기계처럼 사용되기 위하여 군중으로서 긁어모이고 있는 이 비참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울어도 충분하지 않다. -키르케고르(1849), 죽음에 이르는 병 ..
김정환, 좋은 꽃 이즈음 강의에서 황지우를 다루면서 김정환 시 생각이 많이 났더랬는데 나는 아무래도 10대 후반에 읽었던 시의 자장이 형성해놓은 80년대식 세계관을 나이에 걸맞지 않게 자꾸 고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30대 초반까지는 이것 때문에 80년대 시인들을 혼자 속으로 많이 원망도 했던 기억이 난다. (장정일이 서울에서 보낸 3주일에 해설 대신 80년대 시인들을 욕해놓은 것을 나는 백번 이해한다. 물론 격변하는 한국 현대 정치사 안에서 보자면 그도 나보다는 훨씬 앞 세대 사람인 것이 분명하지만, 저 충혈된 80년대의 격정이 미필적 고의로 감염시켜버린 '희생자'들은 자기 세대의 변방으로 밀려나 그 운명을 끝끝내 살아내야 하는 것이니까.) 아무튼 황지우를 읽으면서 자꾸만 김정환이 그리워 오랜만에 좋은 꽃을 꺼내 들..
김상혁,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민음사, 2013) 묵인 아직 젊었던 술집 여자의 등을 당신께 보냅니다 그 등에서 참았던 내 겨울도 보냅니다 나를 아들이라 부르던 손님들의 택시비와 이국땅에서 일요일마다 내게 주어지던 몇 푼의 돈도 함께 보내지요 나는 꼭 저금을 하는 기분입니다 당신이 남기고 간 기록들을 한 줄 한 줄 짚어 봅니다만 아마 실수로 빠진 내 이름이 오늘도 없습니다 요즘 당신은 통 편지를 보내지 않지요 어릴 적 공터에 뛰던 플라스틱 말들을 당신께 보냅니다 그 위에서 견디었던 내 예감도 보냅니다 먼 나라에서 한 번 당신을 본 적이 있지요 새벽이었고 당신은 내 가슴을 열고서 울기만 했습니다 결국 유사한 아침을 맞이하며 나는 사과나무 사이를 뛰어다녔습니다 종종 나무의 배후에서 당신을 봅니다만 그것은 비밀에 부칩니다 나는 말을 못 하는 일에 익숙하지요 ..
침묵, 聖 요한의 집, 20130420 같은 산길에서 같은 나무 등걸과 따로 따로 마주쳐 우리는 각각 사진을 찍었다. 동생의 나무 등걸 사진은 유적지 풍경 같았고, 내가 찍은 사진은 명백하게 지나치게 유머러스한 인간(이나 동물)의 사체의 패러디였다. 그것은 다소 키스 헤링 식으로 단순화된 네 발 달린 짐승의 사체와 닮았는데, 그것도 머리를 자른 것이다. 뭉툭한 팔 다리는 몽둥발이처럼 되다 말았고 심지어 꼬리가 잘린 흔적까지 있다. 이것은 누가 봐도 나무의 시체인데, 이 나무는 동물을 패러디하고 있다. 이 글은 전혀 신성하지 않다. 침묵의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침묵은 고통에 어울리는 것. 열정이기도, 수난이기도 한 passion은 주체할 수 없는 자기의 충혈된 에고의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자가 그것을 극기하려 할 때 그의 일그러진 표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