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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의 죽음-미지수 X의 부재증명, 가눌 수 없는 체념의 층위 철학의 고백 총알이 빗발치던 1차 세계대전의 참호 안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써내려간 노트는 1921년, 자신의 유일한 생전 출판물로 완성된다. 그가 뽑아낸 군더더기 없는 철학적 명제들은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천착의 결과물로, 이는 언어적 전회라 불릴 만큼 정통철학의 문제를 언어의 문제로 날카롭게 포착한 것이었다. 그 일단은 다음과 같이 명제화된다.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을 명료하게 묘사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좌우간 생각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명료하게 생각될 수 있다. 언표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명료하게 언표될 수 있다.” 이런 ‘말에 대한 믿음’은 근대 이전의 철학사 전체가 증명하고 있는바, 모든 철학은 말로 표현되기 전까지는 언제나 공상의 ..
신(神) 없는 세계에서의 고행 지하생활자의 수기 상세보기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 문예출판사 펴냄 러시아 대문호의 긴 독백형식으로 쓰여진 작품. 삶에 대한 은폐된 불안과 은밀한 증오에 시달리며 철저히 고립된 곳에 도피처를 마련한 주인공이 초라하고 고독한 공간에서 바깥세상의 모든 가치있는 것을 부정하며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모습을 담았다. 문화청첩장)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이동현 옮김, 문예출판사, 1998(1864)) 골방에서 나오지 않은 채 다음날 해야 할 일도 잊어버리고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녀는 쓰지도 않는 물건들을 온라인 쇼핑몰에서 사들이는가 하면 온갖 토론방을 드나들며 독설을 퍼붓는다. ‘세상은 너무나 한심한 사람들로 들끓고 있다. 저 한심한 오랑우탄들이 나를 진작 알아보았다면! 내가 여..
빽투더퓨처 라디오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나오던 노래였는데 제목을 모르고 있다가 도입부의 가사를 구글에 돌려 제목을 알아냈다. 듣고 있으면 20대로 돌아가는 것 같아 반갑고 끔찍하다.
누덕누덕 -한동안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았더니 어떻게 생각을 하는 건지 잊어버렸다. 한동안 일기라는 걸 적지 않았더니 어떻게 고백하는 건지도 잊어버렸다. 글이 허구라는 아이디어를 더 강하게 받아들였다면 나는 소설을 쓸 수도 있었을까? 솔직하게 써도 언제나 거짓말이 된다. 그러니, 애써 거짓말을 하는 것은 위대할 수도, 쉬울 수도 있겠다. 생각도 쓰기도 하물며 감사하는 마음도 연습이 필요한데 연습은 언제나 실전처럼 해야 한다.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그러니까, 뭐가 뭔지 모르게 그저 열심히 하라는 거겠지. 중요한 건 연속성이 아닐까? 몸이 느끼는 감각 같은 것 말이다. 그렇다고 "맘만 먹으면 넌 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날마다 기획과 실행을 연습시키는 신자유주의 처세술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무엇보다..
꼬마친구 숲속친구 모두모두 즐거워 나는 아직도 선배나 스승과 잘 논다. 어제 오랜만에 꽝꽝의 은사님과 그의 후배들(나의 직장선배들)과 덩어리 돼지고기를 먹으러 갔었더랬다. 꽝꽝 사람들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참 칙칙하다.(그 칙칙함이 어느 정도냐면, 1995년 꽝꽝 정문 앞 30m 지점에 문을 열었던 꿈의 패스트푸드점 KFC가 2년만에 망해서 나갔을 정도.) 물론 개중 내가 젤루 칙칙했던 적도 있었다. 근데 어느새 이 착한 칙칙함을 견딜 수 없게 됐으니 난 정말 무지하게 뺀질한 놈이 틀림없다. 나는 선배나 스승을 놀려 먹는 걸 정말로 좋아한다. 그렇지만 나만큼 그들에게 애정을 가진 사람도 없을 거라고 은근히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무척 오만한 놈인 것도 틀림없다. 10년 전의 은사님이 넌 ㅈ선생이 좋으냐,고 물으시기에 그분은 공..
그런 밤 오늘 나는 당신들과의 詩的인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거리는 어둡고 옅은 안개는 팅커벨의 잠가루처럼 도시 위에 영영 떨어져내리고 있지요. 그리고 나는 내 인생에 마주친 모든 시적인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다 일어나 갑자기 생각나는 영혼의 얼굴들, 그들이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일까요. 나는 내일 나보다 어린 친구들에게 또 거짓말을 하러 학교에 가지만, 이 거짓말들이 (진실)에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기적적으로 알아보는 나의 어린 친구들 또한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자다 말고 일어나 갑자기 떠올리는 이런 영혼의 얼굴들과 그 이름에 대해 나는 결코 무엇으로도 완벽하게 '쓸' 수 없을 테지만, 나는 이것들이 가장 시적이라는 사..
지식-사물 애호가 Andrew Cornell Robinson acrStudio © 2007 대가리만 발기한 새끼들이 제일 싫다. 얼마나 엄청난 오욕에 머리를 처박으려고 저 지랄이지? 그는 대개 수집가다. 향유보다는 소유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읽지 않은 책들이 먼지를 덮고 책장에 줄지어 꽂혀 있다. 더러 먼지는 닦이지만 서문 이상 읽히지 않는다. 이 책들은 언제나 최신 유행하는 담론들, 문화적으로 세련된 이론들, 한 시대를 풍미한 문제작들이다. 제목을 수백 번 보았기 때문에 그는 심지어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책을 안 읽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그는 정기적으로 헌책방에 가서 자신이 애호하는 어느 사상가의 책 색인에 제목이 수록되어 있었던 책이라도 새로 나오지 않았는가 뒤진다. 그는 정신분석의 연인이며 대중의 비판자이며 ..
이별의 뒷맛 오, 어째서 나는 너에게 그토록 친절했던 것인가. 이 씁쓸한 이별의 뒷맛이 도무지 가시지를 않는다. 이제는 형제가 된 첫사랑의 장신구 가게를 찾아가 동생의 생일 선물을 사고 근처 카페에 혼자 앉아 핫초코라느니 그따위 것을 마시며, 어느 시인을 욕한 나의 글이 게재된 학교 신문과, 젊은 시인들의 시선집을 읽는 이 간지럽고 짐짓 우아한 역겨운 문화 생활. 삼킬 수 없는 감정에 설탕을 발라본다. 이제는 알지 못하는 시인들의 시를 읽으며 이름과 사랑에 빠지는 계절. 얼굴 대신 이름들과 닿지 않는 텔레파시를 주고 받는 상상의 놀이만이 가능한 시절. 술을 많이 마셔도, 우리의 심장은 포개어지지 않고, 웃음도, 눈물도, 우울도 TV 광고처럼 가벼이 떠나보낼 수 있는 시절. 어서 지나가라. 그러면 이 시절을, 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