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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詩神-屍身)의 뜬 눈 7월 14일의 일기.1. 시 쓰기의 숨겨진 목표는 (시인에게까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그 목표는) 시를 죽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김수영은 그것을 "이제까지의 시를 폐기하는 것"이며, 잠정적으로는 자기의 갱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를 죽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시를 죽이는 일'이라면, 그는 시(자기의 온몸인, 시 쓰기의 순간에만큼은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혼신인)-로서의 자기를 죽이려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시를 죽이려 하는 것일까? 지금 당장의 시를 죽임으로써 정말로 죽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2. 시를 죽이는 시 쓰기는 죽지 않는다. 자동기계.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했을 때, 어떤 측면에서는 인간을 욕망의 기계로 이해한 스피노자의 유물론적 관점을 부각시켜 이어받은 들뢰즈..
오늘은 비
정동 이론 * 멜리사 그레그, 그레고리 시그워스 편저, 최성희, 김지영, 박혜정 옮김, 정동 이론 The Affect Theory Reader, 갈무리, 2015. "우리가 습관을 통해 좋은 취향을 획득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대상과 정동 사이의 연합(association, 아마 영미 경험 심리학에서 일컫는 '연상'을 이렇게 번역한 듯-오리너구리)이 습관을 통해 보존되는 것이다."(67)"폭력을 노출하는 것이 폭력의 기원이 된다."(75)- 사라 아메드, "행복한 대상". "'몸의 활성화된 살의 차원에서, 즉 되기가 진행되는 몸의 차원에서, 오류가 결코 있을 수 없는 경보의 옳음이라는 차원에서 우리가 가정해야 하는 그 몸의 실존적인 효과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위험을 알리는 기호들이 영원히 어른거리는 세..
김춘수 가상 인터뷰) 업보 경찰 행정관 나사루의 비망록 *이 글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이 알료샤에게 이야기해준 자신의 서사시 「대심문관」을 상호텍스트로 삼고 있는 김춘수의 시 「대심문관」을 다시 상호텍스트로 삼고 있으며, 플라톤의 영혼불멸에 관한 대화, 『국가』 10권의 반향이 조금 스며 있다. 전기적 서술들은 모두 김춘수의 자전소설 『꽃과 여우』를 비롯한 그의 저술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돌아가신 김춘수 선생이 아라뱃길 산책로를 걷고 있다는 제보를 받은 것은 비가 제법 내리다 갠 4월 말의 어느 평일 낮이었다. 업보 경찰의 행정관으로서 내가 하는 일은 대개 많은 사람들의 습관이 기록된 문서들을 분류하고 정리하여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간단한 조서를 작성하는 일이다. 하지만 래리 플린트의 분신이 미국 대통령 후보..
폭염 속에서 전지구적인 고민은 인류를 잠식한다 백만 년 만에 쓰던 글을 저장 직전에 잃어버리면,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 남극에서 빙하가 녹을까봐 에어컨을 안 틀어주는 전지구적인 도서관 직원의 혼란스러운 눈망울과 마주했을 때처럼 하소연할 데가 없어 비참하다. "저도 정말 헷갈려요... 빙하가 녹고 있는데 사람들은 자꾸 에어컨을 틀어달라고 하고..." 그녀는 고민에 휩싸여 정말로 아노미 상태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땐 정치적 올바름이고 지구네트워크고 환경론이고 에코고 나발이고 나는 그냥 흙바닥 위의 펭귄보다도 불우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아, 네, 당신의 지구적인 고민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더워서 땀범벅이 되어 지쳐빠진 채 허탕치고 집에 돌아가 각자 에어컨을 틀면 빙하는 더 빨리 녹을 텐데? 도서관은 책 보러 오는 곳이고, 너무 더우면 책을 볼 수 없..
시와 세계, 2016, 봄. 사람 그리는 노래 송승언 정원으로 이어지는 여러 갈래의 길에는신도들이 늘어서 있고 신앙심을 시험하려는 듯이줄줄이 대기열을 만들고 혀를 내밀고 있다혀끝에서 신속히 흩어지는 것없었던 듯 새겨지는 것그것을 위해 나는 항상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낯가죽을 새롭게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혀를 내밀며 드는 생각은 이것나는 대체 어떤 종류의 인간인가? 여러 갈래의 길로 이어지는 정원에 서서향나무의 뒤틀림에 경탄했다저렇게 뒤틀릴 수만 있다면 개발 중인 신도 두렵지 않을 텐데비늘조각이 육질화 된 향나무를 보며향나무 좋지...나도 좋아해말씀하시던 신부님은 맥주 마시러 갔고 나는 이제 내 팔다리의 멀쩡함을 입증하기 위해뇌에 대 타격을 입은 사람의 말을 빌려 쓴다탁구 하던 사람술집 하다가 망한 그 사람 종이 울리면 슬프지는 않았다..
우회 살들이 조각조각 난자되고 가 있다피가 번진 도마 위에 파란 눈을 뜨고 가 없어진 잉카 레스토랑에서뚱뚱보 여자들이 배를 들고 나온다피망 유령처럼 웃으며 포크와 나이프가 식탁에와 정반대의 상황으로 놓여 있다피가 번지는 도마는 계속 피가 흡수하는 도마 탐정 요리사가 빛과 그림자로 도마를 조사한다도마는 깨끗하다조사의 순서와 순환을 역조사한다도마에 깊고 긴 칼자국 문장들이 음각으로 새겨진다 도마가 아가리를 벌린다도마가 그를 삼켜 그를 가둔 도그마로 변한다 가 사라진 식탁에가 밤과 낮으로 마주 앉아 오래도록 응시한다―함기석, 「요리사를 요리하는 요리사」 전문(『뽈랑 공원』,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1. 서양철학의 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인 존재론과, 그 연장선상에서 정신분석학에서 출몰하는 ‘그것(it)’의..
수신이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끔찍한 뉴스들이 현저히 많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은 단지 저의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 전에도 대형 참사들은 있었고, 패륜적인 범죄는 저질러지고 있었으며, 전쟁과 테러가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저의 세대 사람들에게, 잔혹함의 여러 유형들이 이토록 종류와 규모에 있어 많고도 다양하게 짧은 기간 동안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 적이 없었다는 느낌은 쉽사리 떨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네트워크 기술의 발달 때문에 가능해진 체감의 차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공중파와 종이 신문만 있었던 시절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미디어의 통로들을 시간의 제약 없이 접하고 있습니다. 알려질 수 없었던 참상들과 그 세부를 이제는 우연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