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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수북 씨 어? 수국이 수북수북 피었네? 라고 한 것은 남편의 말. 농업 시험장에서 일하시면서 온갖 종류의 식물을 키우셨다는 할아버지 때문인지, 할아버지의 자식들은 하나 빠짐없이 모두 식물 키우기를 좋아했는데, 친정에서는 아버지가 35년 전에 대리인지 차장인지 승진하실 때 동료들이 가져온 군자란이 아직도 해마다 꽃을 피우고 함께 들어온 소철은 사람 키를 넘어간다. 분갈이도 안 해주는데 그 피우기 어렵다는 군자란 꽃이 어떻게 한 해도 안 빼먹고 피는지는 수수께끼. 언젠가 아버지가 베란다에 가득한 화분들에 너무 골몰하시는 걸 보고 물어본 적이 있었지. 아빠는 왜 말 없는 것들만 좋아해? 아버지는 슬픈 표정인지 서러운 표정인지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사람도 말을 못했으면 좋겠다. 그런 가족력 때문인지 동생도 식물을 키운..
최재서의 오판을 다시 생각한다 / 이명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81426.html
강정 시집, <백치의 산수>, 민음사, 2016 백치의 산수 현관에 놓인 신발들을 보니 이 집에 없는 사람이 살고 있구나괜히 문밖으로 나가 노크를 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와 신발을 벗고 신발 개수를 확인한다검은색과 푸른색 신발이 있고흰 신발이 하나 구겨져 있다 흰 신을 신고 잠깐 나갔다가돌아오자마자 검은 신발로 갈아 신는다 흰 신을 신은 자는 밖에 있는데, 흰 신이 말하려다 턱이 빠진 사람처럼나를 올려다본다 푸른색 신발 위엔 지난봄의 나비가 어른거린다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오니 더 먼 곳으로 나와 버린 기분이다문 쪽으로 귀를 기울인다 선회하는 나비의 기침소리 공책을 펼쳐 어제 하려 했던 말을 적어 본다아무 말도 써지지 않는다검은 신이 뚜벅뚜벅 방으로 들어온다 허리를 구부려 신발을 신는다 굴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거나물속에서 기어나..
출국장에서: 작란(作亂) 트리뷰트 도깨비장난 (...)작란(作亂)이라는 동인에 가담해서 장난을 치고 다닌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건 적법한 행위입니다. 왜 헌법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지금 장난하자는 겁니까? 작란은 예전부터 이미 하고 있습니다. 그 장난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없었습니까? 다 제 부덕의 소치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잘 돌보겠습니다. 장난에도 수위가 있는 걸 모르십니까? 소꿉장난, 흙장난, 불장난, 도깨비장난…… 도깨비장난이 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밑줄을 그을 단어가 나온 것 같습니다.(...) -오은, 「청문회」(『유에서 유』, 문학과지성사, 2016) 작란 말고는 동인을 모른다. 물론 문학사 책에 나오는 동인들과 동시대를 사는 다른 동인들이 있다는 사실, 그들의 이름, 그들에 속한 다른..
사후의 사후를 사는 냉담자의 멜랑콜리, 혹은 신성성의 재상상: 송승언의 시 돌의 감정 오래 전에 어떤 철학자의 윤리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문득, ‘나는 돌이 될 수도 있었다’는 상상이야말로 가능한 상상과 불가능한 상상의 접점에 서는 첫 경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철학자는 근대 초기에 살았던 사람으로, 아직 매일 햇볕을 받으며 물속에 잠긴 돌 위를 흐르는 물을 보면서 강변을 산책하는 일에 익숙했고, 콘스탄틴주의와 유대교의 강력한 신 개념과 그 이름을 통한 현실적 지배 속에서 살았지만, 이상하게도 경전의 글자들에 얽매여 있지 않았던 듯 보이는 데다, 바로 그런 이유로 자기 민족 집단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자기의 국가 종교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그런데도 더욱 더 이상한 것은, 그가 지극히 종교적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는 범신론적이고도 유물론적으로 자연과 우리의 물리..
누구나 알고 지내는 파르티잔 하나쯤은 있는 거 아니에요? 고등학교 동창들을 서울에서 만나면 서효인 아마도 집이나 직장에서는 그러하지 않겠지만우리는 강남 한복판에서 고래고래 사투리를 썼지조금은 불편해지려고 했다 너희가 사투리로자의식을 확인하는 자들이여 절대로 잊지 못하는사투리여 왕따의 기억처럼 죽이고 죽여도되살아나는 빌어먹을 사투리여염병할 뉘앙스여 괘씸한 톤이여 공동체여너나없이 쓸데없이 맥락 없이 욕을 뱉고 술잔은이리저리 세상 바쁘고 이것이 몇 년 만일까아마도 집이나 직장에서는 그러했겠지 예전에착한 학생이었고 놀 때는 놀았고 의리도 있었지만지금은 강남대로에서 택시 하나 못 잡는다이왕 모였으니 좋은 데를 갈까 하는 녀석은 여기 또 있고미안하지만 부끄럽다 죄송하지만 기억이 안 나요 반말이어색하요 하지만 사투리는 편하지 감각에 우정을 맡기고기억을 추렴해 보지만 사투리..
읽어버린 사람 얻어맞기를 자청하는 자는 마땅히 맞아야 한다.-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모피를 입은 비너스」. 이제는 소위 ‘정동 이론’이라는 문화 연구의 한 장을 연, 스피노자의 정동(affect)에 대한 들뢰즈의 강의에는 “기본적으로 감각적인 욕구(appetite)”에 의한 사랑과 “진실한 사랑”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 50쪽에 이르는 다소 긴 분량의 이 강의 녹취록은 블레이흔베르흐와 스피노자 사이에 오간 편지들에서 다루어진 본질의 순간성과 영원성에서 시작하여, 힘의 증대와 감소로서의 정동, 무엇보다도, 하나의 살아있는 이행이자 변이로서의 정동을 설명함으로써,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강조했던 기쁜-수동과 슬픈-수동의 색조를 음악이라든지, 연인 관계 같은 구체적인 ‘마주침’을 예로 들어 활력적으로 전달하..
Sent by Post 어쩌면 나는 세대론 같은 것을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 동갑내기들에 비해 시대에 좀 뒤떨어진 사람이다. 그렇다고 선배들과 어떤 경험을 공통적으로 실질적으로 정말로 구체적으로 총체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나에게는 지나치게 변화가 빠른 한국 사회에서 앞선 세대가 빠른 속도로 전력을 다해 수행한 세계 해석을 조금 이른 나이에 전력을 다해 (왜?) 받아들인 바람에 갑작스러운 사회 변화에 정신을 못 차렸던 문화적인 늦깎이의 일종 자괴감 같은 것이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왠지 모르지만 이 ‘문화적’이라는 말에 아직도 심한 양가감정을 느낀다.)이를테면 만일 내게 나의 문학적인 자양분이라고나 할 만한 것을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면, 그 시작은 주로 10대 시절에 탐독한 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