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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공장 공장장 장 공장장님께: 장수진 시인 핀 시리즈 집중 리뷰 꼭 20년 전에 극단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어린이 마당극을 주말마다 공연해야 하는 극단에서였지요. 무대연출 보조로 잠시 투입된 저는 한 달 동안 새벽 5시에 나가 자정 넘어 귀가하면서, 극 중에서 해가 뜨면 해를 올리고 달이 뜨면 달을 올리고 멍 박사 옷이 찢어지면 바느질을 하고 마지막 한마당에 아이들에게 뿌릴 색종이를 무한히 자르고 끝없이 짐을 날라야 했습니다. 배우들의 몸은 쉬지 않고 연습을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변함없는 페이스로 터보 엔진처럼 무섭게 움직이더군요. 마지막 공연 뒤풀이에서 저는 만 원권 10장이 든 봉투를 받아들고 짜고 쓴 눈물을 삼켰습니다만, “적자가 3천 밖에 안 돼, 이번엔 선방했다!”는 극단 일원의 건배사에 뒤통수를 맞고 눈물이 쏙 들어갔더..
조롱당한 경비로봇 https://m.hani.co.kr/arti/economy/it/804067.html#cb
유다, 예수, 대심문관: 이율배반과 논리적 구원의 불가능성 * 오리너구리, 『빵과 차(茶): 무의미 이후 김춘수의 문학과 정치』의 일부를 소개하면서 나는 이 논문을 오래된 의문으로부터 시작했다. 그것은 어떻게 순수시의 대가가 5공화국의 국회의원이 되었을까 하는, 다시 말해 「꽃」과 전두환 퇴임식 축시인 「님이시여 겨레의 빛이 되고 역사의 소금이 되소서」 사이의 간극에 대한 의문이었다. (이 퇴임식 영상은 지금도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 가관이다.)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김춘수가 쓴 거의 모든 글과 김춘수가 읽었다고 쓴 거의 모든 글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찾아 읽었다. 그랬더니 이상한 점들이 점점 더 많이 발견되고 거기에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패턴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궁금함이 거의 수사기록에 가까운 논문을 쓰게 만든 것 같다. 그는 국회의원과 ..
왕의 박력을 가진 시인이 있었다면 * 조 메노스키 지음, 정윤희, 정다솜, Stella Cho 외 옮김, 『킹 세종 더 그레이트』, 핏북, 2020 처음 이 책이 흥미를 끌었던 것은 작가가 “스타트랙” 시리즈의 집필자 중 한 명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는 한동안 이공계 연구자들이 주인공인 시트콤 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나 자신이 “스타트랙”을 좋아했다기보다는 철없이 학교에서 나이 먹어가는 의 주인공들이 홀딱 반해 있는 “스타트랙”에 대한 경외감과 ‘덕질’할 때의 감정에 이입한 상태에서 이 책의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한국말하고 한글 쓰는 자연인의 입장과 에 대한 팬의 애정이 혼합되어 대뜸 이 책을 사고 말았다고나 할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스타트랙”처럼 미국적인(마치 각국의 이민자들이 연방을 이루듯이 다종다양한 행성의 사람들이 ‘연합..
우리가 정말 모르는 것들에 관하여 * 장 뤽 낭시, 이영선 옮김,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 갈무리, 2012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것은 2012년 말 무렵이었다. 낭시는 이미 라쿠-라바르트와 공동으로 출간한 책의 번역본으로 한국에 소개되어 있었고, 문학계에서 한창 ‘시와 정치 논쟁’이라 불린 뜨거운 논란 속에서 관심의 정점에 있던 자크 랑시에르와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프랑스 철학자 중 하나로 알려져 있었다. 이런 저런 이유들로 나는 몹시 지쳐 있었는데(‘지쳐 있다’는 게 사실 우리 시대 사람들의 정서적인 디폴트 값이기는 하지만) 특히나 패퇴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 정치적인 환경은 계속되는 장마처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나는 나의 희미한 (그 어떤 종류의 신에라도) 신앙을 잃었고, 사람들에 대한 환멸에 사로잡혔으며, 그에 ..
“I am not a man, I am not a man” * 에밀리 정민 윤 지음, 한유주 옮김,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 열림원, 2020. 한 남자가 있었다. 일본 군인. 낡은 미신을 믿지 않았던 자. 전투에 나가기 전 무사를 기원하는 섹스를 믿지 않았던 자. 그는 괴짜였다. ‘위안부’의 음모나 혹은, 어떤 부위를 부적으로 지니지 않았던 자. 그의 동료들이 말했다, 남자가 되어야 한다고. 공식은 이러하다, 괴짜는 남자가 아니다. 전시의 논리에는 근거가 없다. 근거가 없다.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동료들이 말했다, 급습해, 약탈하라고. 그를 위안소에 밀어 넣었다. 벽에 난 구멍을 들여다보는 그들의 눈알들. 그가 나오는 걸 보았다. 되었다. 여기서 공식은 무엇인가. 공식은 없다. 한 남자가 있었다. 울면서 말했다. 나는 남자도 아니야, 나는 남자도 아..
한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 마르타 바탈랴, 김정아 옮김, 『보이지 않는 삶』, 은행나무, 2019. 이 책의 띠지, 출판사 서평 등에서 가장 먼저 인용하곤 하는 것은 51쪽에 쓰여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이 책은 무언가가 됐을 수도 있는 여성, 에우리지시 구스망에 대한 이야기다. 이 문장을 읽고 나면 한 여성의 곡절 많은 인생 서사가 펼쳐질 것 같지만, 책은 우리의 기대와는 약간 다르다. 이 책의 태반은 에우리지시와 그녀를 둘러싼 모든 이들의 삶에 관한 브리핑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으며 떠올린 것은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과 4대에 걸친 모계 중심 대안 가족의 서사를 다룬 네덜란드 영화 이었다. 이 소설은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 주인공들에 투영된 자기 과시적이며 마초적인 나르시시즘과 마술성..
발효하는 황홀(일레인 스캐리, 『아름다움과 정의로움에 대하여』) 일레인 스캐리, 『아름다움과 정의로움에 대하여』,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2019 아름다운 소년이나 꽃이나 새가 현존하는 곳에 서 있는 순간 느껴지는 인지 경험은 무엇일까? 그것은 복제 행위를 부추기는, 심지어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눈이 아름다운 무언가를 볼 때, 손이 그리고 싶어 한다고.(11쪽)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대학 시절이었던 1996년, 리처드 로티의 대표작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에 간접적으로 인용된 『고통받는 신체』의 한 대목을 통해서였다. 로티에 의하면 스캐리는 그 책에서 “누군가에 대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은 그로 하여금 심한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고통이 지나간 다음에도 그가 자신을 추스릴 수 없게끔 그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