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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context

강정 시집, <백치의 산수>, 민음사, 2016

 백치의 산수

 

 

현관에 놓인 신발들을 보니 이 집에 없는 사람이 살고 있구나

괜히 문밖으로 나가 노크를 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와 신발을 벗고 신발 개수를 확인한다

검은색과 푸른색 신발이 있고

흰 신발이 하나 구겨져 있다

 

흰 신을 신고 잠깐 나갔다가

돌아오자마자 검은 신발로 갈아 신는다

 

흰 신을 신은 자는 밖에 있는데,

흰 신이 말하려다 턱이 빠진 사람처럼

나를 올려다본다

 

푸른색 신발 위엔 지난봄의 나비가 어른거린다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오니 더 먼 곳으로 나와 버린 기분이다

문 쪽으로 귀를 기울인다

 

선회하는 나비의 기침소리

 

공책을 펼쳐 어제 하려 했던 말을 적어 본다

아무 말도 써지지 않는다

검은 신이 뚜벅뚜벅 방으로 들어온다

 

허리를 구부려 신발을 신는다

 

굴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거나

물속에서 기어나온 사람이거나

 

이 집엔 많은 신발이 걸어 다니고 많은 사람이 말을 한다

나만 빼고 모두 살아 있구나

(58-59)

 

 

무조(無調)

 

 

말러를 듣는다

죽음 너머 새 떼들이

우주의 거대한 석상을 무게 없이 끌고 오는 소리

 

말러를 들으며 술을 마신다

물속의 불이 일으켜 세우는 네 발 달린 물고기들

새하얗게 타오르다 사막으로 발가벗는 바다

 

방 안에 쏟아진 별들이

대낮 먼지의 신음을 밝힌다

 

음악 지난 자리에 써 내린 글들

그 옆에 그린,

굳게 입 다문 석상의 얼굴

 

너를 알았다고 깨닫는 순간,

나는 이미 죽었다고 믿게 만드는 먼 성단(星團)의 재치

 

음악은 공간의 투명한 침묵일 뿐,

그 어떤 시간도 실연하지 않는다

 

그리는 순간,

물이 되어 흘러내린 석상의 얼굴

 

그 위에 띄운,

새로 태어난 사랑의 이목구비

(124-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