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ext & context

<혁명을 팝니다>

 

2013-07-29 (월)

조지프 히스, 앤드류 포터, 윤미경 옮김<혁명을 팝니다>(마티, 2006)를 읽다가.

185쪽.

반문화의 지지자들이 정신질환과 반문화적 저항, 혹은 불순응을 혼동하게 된 사태에 관하여. 정신 이상의 낭만화.

황지우의 90년대 후반 '착란적인 것'의 詩化, 김수영의 일기("아내여, 언젠가 내가 정말 미치게 된다면...").

반문화와 시.

김수영, 김춘수의 작품들을 일종의 반문화적 소비재로 간주했을 때 당대와 이후에 미치게 된 영향들에 관하여.

반문화의 지지자들, 가령 푸코가 범죄, 정신질환 등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광기를 거의 언제나 옹호하려 한다는 사실.

 

"예수가 오늘날 세상에 온다면, 그도 역시 시설에 감금될 것이다. 하지만 살인광은 권력의 통로들을 활보한다."(186)

 

윌리엄 버로스, 비트족, 기 드보르, 장 보드리야르로 이어지는 우상 파괴의 계보.

 

"주목할 아무런 결과도 내지 못한 채 체제를 몇 번이나 더 전복해야 우리는 전복이 갖는 의미에 의문을 품기 시작할까? 광기가 진정으로 똑같은 것을 계속적으로 반복하면서 매번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급진주의의 어떤 것이든 체제에 손상을 가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미친 짓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몇 십 년이 더 흘러야 "엿 같다"라고 말하는 수녀들이 급진적이 아니라 재밋거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을까?"(189-90)

 

"근본적인 문제는 심미적 규범과 복장 규범에 대한 반란이 실제로 전복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피어싱과 문신을 하든, 어떤 종류의 옷을 입든, 어떤 음악을 듣든 자본주의 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 기업들은 회색 플란넬 양복과 바이커 재킷에 관한 한 근본적으로 중립적이다."(191)

 

"히피들이 배반을 하지 않고도 여피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스템이 반대자를 '포섭'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실제로 반대를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미셸 로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입증했듯이, 물질적 가치를 거부하고 대중사회를 거부한다고 소비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로 체제에서 벗어나길 원한다면, "카진스키처럼" 숲으로 가서 살아야 한다(그리고 레인지 로버[Range Rover]를 타고 통근을 하지 말아야 한다). 반문화 반란을 특징짓는 상징적 저항의 일상적 행동들이 실제로 체제 파괴적이 아니기 때문에 반문화 사고의 논리를 그 자연스런 결론까지 다 따르는 사람은 누구라도 극단적인 형태의 반란에 점점 더 이끌리게 될 터다. 이러한 반란이 파괴적이 되는 지점은 진정으로 반사회적이 되는 지점과 대개 일치한다. 그렇게 되면 반란자라기보다는 단순히 성가신 존재일 뿐이다."(201)

 

"요점은 의복의 획일성이 기술지배에 의해 강요된 어떤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정반대이다. 회색 플란넬 정장은 남성들 사이에 소비주의가 없다는 징후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반문화 반란은 체제를 전복시키기는커녕 남성들이 네루 재킷에서 레저슈트에 이르기까지 안 입은 게 없었던 60년대 공작혁명(Peacock Revolution)의 발생에 필수적이었다."(220)

 

"소비주의는 정치에 둔감하거나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소비주의의 성공요인은 접근가능하고, 개인화가 가능하며, 바로 만족을 줄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의 핵심적 정치사상들--자유, 민주주의, 자기표현--을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민주정치가 이론상으로 훌륭해보일지 모르되, 민주주의의 실천은 쇼핑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소비자 주권 같은 주권은 없다."(235)

 

"우리는 우리들의 삶에서 문화와는 별도로 정치가 다시 들어설 공간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한 방법으로 어지럽게 흩어진 소비주의의 부스러기를 일부 치워버리고 획일성을 우리의 삶에 도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과감히 차별화되기"보다는 "과감히 동일해져야 할 것"이다.(237)

--> 이 같은 견해는 리처드 슈스터만의 <삶의 미학>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어쩌면 하버마스의 비판철학의 맥을 잇고 있는 저자들과 프래그머티즘의 경험론의 맥을 잇고 있는 슈스터만의 근본적인 계보 상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이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 화해는 불가능할 것인가?

또 하나, '너무 많은 차이성의 현기증이 동일성으로 향하게 한다'는 저자들의 태도는 김수영의 산문을 떠올린다. 김수영이 독일 태생이었다면, 그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의 정치적 태도는, (냉정을 찾았을 때는) 하버마스에 가깝고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아도르노의 편에 가깝다.

 

"글래드웰이 볼 때 쿨은 추상적이고 무한한데, 마치 철학자 무어(G.E. Moore)가 했던 '선'은 "단순하고, 정의할 수 없으며, 자연적이지 않은 속성"이라는 유명한 말과 흡사하다. 우리는 이를 "추상적 본질주의자들"의 쿨에 대한 견해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우리들 대부분이 그게 무엇인지는 결코 알 수 없어도, 쿨은 실제로 존재한다(쿨한 사람들과 쿨한 것들이 실재한다)."(240)

--> 이 같은 논의를 몇 년째 유행한 '시적인 것'의 정의와 관련해 생각해보면 놀랍도록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쿨'하기 짝이 없는 1980년대 초의 황지우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와 몇 년 후의 "시적인 것은 실제로 있다"는 '시적인 것'의 존재론적 위상을 더욱 더 "추상적 본질주의"에 의거하여 저 높은 곳에서 임재한 '신적인 것'에 가까운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쿨'과 '선'과 '시'와 '신'의 동일한 '없는 듯 실재하는' 속성에 관해 생각해보라.

 

"하지만 현실에서의 쿨은 그렇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사악한 것이 아니다. 쿨을 현대도시 사회의 핵심 위계질서로서 생각하는 것이 최선이다. 계급과 같은 전통적인 신분의 형태처럼 쿨은 내재적으로 지위재이다. 모든 사람들이 상류 계급이 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훌륭한 취향을 가질 수 없듯이 모두가 쿨할 수는 없다.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쿨한 사람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쿨이 궁극적으로 구별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쿨의 이데올로기는 피에르 부르디외가 "자연스런 취향의 이데올로기"라고 부른 것과 다르지 않다."(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