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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context

김성규,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창비, 2013)

 

절망

  

꽃들은 왜 하늘을 향해 피는가

그리고 왜 지상에서 죽어가는가

(80)

 

 

혈국(血國)

 

 

과일의 즙을 짜서 그릇에 담아보면 물체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다

인간의 피를 짜면 하나의 왕국이 세워지고

그 벽이 무너질 때 또 같은 양의 피를 흘린다고 한다

오늘, 조그만 도시를 통치하던 늙은 권력자가 죽었다

 

장례식이 축제의 도살장으로 변하고

사람들은 그가 누렸던 권력의 깊이만큼 접시를 펼쳐놓는다

상 위에 차려진 음식 냄새가 왕국을 가득 덮는다

냄새를 따라 곳곳에서 몰려드는 가난뱅이들을 보라

웃으며 게걸스레 접시를 비워대는

저들의 표정은 순간순간 음식 모양으로 바뀐다

 

마지막 남은 핏방울마저 혓바닥으로 핥아 먹으면 그들의 얼굴이

흰 접시 위에 올려져 잔칫상을 장식할 것이다

가난뱅이들의 표정을 젓가락으로 집어 먹으며

부자들은 음식의 풍부하고 다양한 맛에 감탄한다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고기를 씹는 입술이

웃을 때마다 더욱 건강해 보인다

 

또다시 숫돌에 물이 뿌려지고 먹을 것을 따라

돼지 한마리가 꿀꿀거리며 뒤뜰로 걸어간다

부모를 찾아온 아이들이 놀라 접시를 바라본다

칼 든 자의 무표정한 눈빛과 칼날의 단순함에 취해

접시에 차려질 음식 냄새에 취해

웃으며 박수 치는 아이들의 풍부한 표정들

나는 이야기를 듣지 않는 아이들에게 지나간 이야기와

이야기의 무력함과 그래도 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접시의 가짓수만큼 풀어놓는다

 

가난뱅이들의 웃음으로 우려낸 국물을 마시며

하품을 하는 아이들의 눈썹이 길어지고

아저씨, 재미없는 이야기 좀 그만하세요!

마실수록 취하는 술을 취하지 않을 때까지 마시며

낸 몸을 짜서 오늘, 한편의 시를 쓰는 밤

돼지가 그들의 얼굴을 잊어버리고 고기로 변해 나오듯

잠에 빠진 아이들이 국그릇에 숟가락을 떨어뜨린다

 

찌그러진 과일을 즙에 담가도 원형을 회복하지 못하듯

내가 쓴 시가 지나간 시간을 되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술을 뿌려도 아무도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오늘, 조그만 도시를 통치할 젊은 권력자가 선출되었다

(112-14)

 

 

사자의상

 

 

상점 앞에서 나는 눈송이를 피하고 있었다

死者衣裳이라는 나무 팻말이 달린 문을 밀치고

젊은 여자가 보따리의 피 묻은 옷을 꺼내며 운다

아주 좋은 물건을 가져왔구려

주인 노파는 웃으며 젊은 여자에게 돈 봉투를 건네준다

무엇이 좋은 물건이냐고 나는 물어보았다

 

죽은 사람의 옷을 입으면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다네

오늘 아침에 죽은 자식의 옷을 가져왔수

사라지는 여자를 바라보며 카드를 뒤집는 노파

안됐군, 더 안 좋아지겠어 운세를 보니,

거기 널려 있는 물건 중에 아무거나 입어보구려

첫 손님에게는 아무것도 받지 않는단 말이우

노파는 나에게 널려 있는 옷가지 중에 하나를 건넨다

 

옆구리의 통증 때문에 식은땀이 흐르고

--병원비를 아까워하는 자식의 눈을 피하고 싶어요

얼마 전 죽은 할망구의 스웨터를 입었구먼

가죽잠바 한번 입어보시우 멋지게 살았을 테니

--젊은 여자를 강간하고 건달로 살다 칼에 찔리는

상상만 하다 갔습니다 의외로 소심한 인생이었어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상점을 들르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노파는 나를 보며 다시 카드를 뒤집었다

死者衣裳에 맛을 들이면 다시 찾을 수밖에 없다우

새벽의 길, 눈 내려 푸르게 빛나는 날

많은 돈을 탕진하고 나는 빈털터리가 되어 걸어갔다

주머니의 돈을 모두 쥐여주며 노파에게 말했다

그 어린아이의 옷을 주세요 빨리

아이의 옷에 코를 파묻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송이눈동자엄마난로젖 냄새

역시 제값을 하지요? 이젠 더 입어볼 옷도 없을 겝니다

 

그리고 나는 몇 달 동안 편안한 잠을 잤고

봄눈이 내리는 날 다시 가게 문을 밀쳤다

어쩐 일이우, 또 어떤 옷을 입어보시겠수?

말없이 내 옷을 벗어주었다

카드 속 나의 운세는 무엇이었을까 나의 운세는……

오늘 밤에 죽을 사람의 옷입니다

틀림없이 자신의 책을 찢다 목을 매고 자살할 거예요

(11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