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ext & context

류인서, <신호대기>(문학과지성사, 2013)

 

 위조화폐

 

 

지루한 휴전의 나날,

즐겨 입는 그물무늬 셔츠의 창살 안에서

나는 적들의 화폐 만들기에 열중입니다

 

내가 만든 이것으로 나는

다섯 개 강을 건너 사흘 동안 걸어가면 나온다는

적의 옛 마을이 숨은 지도를 살지도 모릅니다

벚나무 가지에 걸어둔 춤추는 노숙자 소녀의 분홍 전화기를 살지도 모르고

두툼한 샌드위치와 커피가 있는 휴일의 식욕과 다시 바꿀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오늘 사랑법

위조만을 위로 삼는 위험한 선택입니다

 

쇠비린내가 묻어나는 천진한 내 손은 나의 전리품입니다

식민지인 이 손안에서

팔랑이며

짤랑이며

몸을 섞는

악화와 양화들

보실래요?

곧 패총처럼 수북해지겠군요

 

동전처럼 뻣뻣하고

지전처럼 후줄근한

썩지 않는 그 나라가 코앞입니다

어리둥절 차가운 당신 웃음쯤 문제가 아닙니다

(10-11)

 

 

침묵 수도원

 

 

침묵은 귀 밝은 늙은 동물,

놀랍게도 그 굽은 등을 지반 삼아 집 짓는 사람들을 보았다

선잠 든 침묵의 귓불을 건들지 않으려 가만가만 시간을 벽돌 쌓으며 걷는 젊은 수도사의 조심성 많은 뒷모습을 보았다

가을겨울가을겨울 더 깊어지는 회랑(回廊)이 침묵의 방벽이 되어주는 말없음의 시간을 보았다

 

삼엄한 침묵의 경계(警戒)를 피해 수도원 담장을 혼자 넘어 나가는 벙어리 신이 떠올랐다

황무지 눈빝은 발자국 없이 뛰놀고 있었다

봄잠 든 침묵의 콧등을 밟고 골짜기 숲으로 산책 나선 천진한 밝은 얼굴의 노수도사들도 있었다

 

소리, 소리들을 보았다

수도원 뒤쪽 산맥 넘어 흰 눈이 걸어 내려오는 소리

마당을 지나는 바람의 나무 구두 소리

저녁 종을 당겨 새의 길을 봉쇄하는 소리

한 자루 촛불로 천년의 침묵과 어둠을 봉쇄하는……그런 소리들을

(16-17)

 

 

렌즈

 

 

해변으로 떠밀려 와 죽어가는 화면 속의 고래

그 고래 물기 그렁한 눈접시에 담기는 배부른 구름

그 구름 몸 풀어 어린 구름에게 젖 물리는 동안

어린 구름 자라 덩치 큰 고래 구름으로 다시 떠가는 동안

죽어가는 고래 둥근 눈접시 둘레에

백 배속 빨리감기 테잎처럼 되감기며 지워지는 머나먼 낯선 별의, 바깥

(32)

 

 

생일

 

 

어서 오세요 어머니 오늘이에요

나 지금, 당신이 말한 그 끔찍한 나이에 닿았어요

습관처럼 놓인 생일상을 보세요 아름다운 붉은 상보 좀 보세요

 

드세요 어머니 하고많은 날의

불어 터진 장수면발을 드세요

무지개떡 쑥개떡 장미화전 드세요

벽사진경의 이 수수팥경단은 꼭꼭 씹어 드세요

앞접시 뒷접시의 케이크 조각도 드시고요

노래가 시들기 전 미역줄기가 식기 전, 양초의 작은 불꽃 후불어 꺼드릴게요

 

드시고도 헛것처럼 그대로인 시장기로는

나를 드세요 내 화분의

미뢰가 사라진 혓바닥 선인장을 드세요

이 귓바퀴와 오돌뼈를 드세요 휘파람 마파람 소리까지 잊지 말고 드셔주세요

역산(逆産)의 산고 넘어 새파랏게 나 낳아주신 어린 어머니

주름 많은 되새김 위장 속 내가 삼킨 천사와 악마의 수컷들까지

이물 없이 드셔주세요

 

드시고

밝은 날 밝은 시 골라

다시 날, 낳아주세요 어머니

(52-53)

 

 

장물(贓物)

 

 

그가 식용 구름 한 상자를 보내왔다

밤의 머리맡에 놓인 물그릇의 습기를 훔쳐 먹으며

살아 있는 나무사다리 난간에 달려 자란다네

이것 흔히 양식 불가라 알려진 생물

 

이것은 종종

그루턱에 핀 송곳니버섯

부스럼투성이 진주패

무한 시효 백지 위임서 등속의

대용물

 

(십 년 전 그와 나는 극지의 만년설을 공동구입, 보관법에 관해 설전을 벌인 적이 있다

상해버린 만년은 결국 저기 사철나무 아래 쏟아졌고

젖지도 구겨지지도 않은 포장지는 쪼개진 솔로몬의 식탁보로)

 

이 구름에서 제일 맛있는 부위는 탄력 주름 풍부한 바깥잎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의 급소는 이번에도

음악 아닐까, 하고

한입 베어 물기부터 했을 거다 그는

떫고 딱딱해, 늙은 종교 맛이야

 

반송 불가 그의 구름이 울타리 앞에 있다

은연중 누구나 저걸 베어 물었을 테지

독을 품었을지 모른다는 의심 그것이 독기일 테지

구름은 무수한 숨은 이빨 자국과 알게 모르게 번진 핏물 얼룩을 가져

생기 있는 표정이다

어떤 구름도 문 적 없는 분홍 잇몸처럼

(6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