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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시와사상 2024 겨울

새로

 
                                   장대성
 
술은 아니고요
잘 좀 살려고 새사람이 되려고
기지개를 켜면서 외친 말이에요
 
회사 근처 원룸은 누런 직사각형 같고
나는 아침마다 수학 문제를 풀듯이 분주해져요
대기업을 안 다녀 다행인가요 거긴 너무 비싸니까
땅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넓이라서
다행입니까
거울 안의 나에게 물으면
 
웅얼웅얼 뭐라는지 모를 입 모양이
즉석밥을 다 털어 넣을 때까지 따라다녀요
 
그런데 아침부터 멧돼지가 기차에 치여 죽고
멧돼지의 죽음보다 출근길 걱정하는 사람들을 보니
오늘도 잘 살긴 힘들겠죠
 
이를 닦으면서도 나는 자꾸
멧돼지는 왜 기차역까지 내려왔는지
표는 가지고 있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먹고사는 문제겠죠 사는 동안
죽기 전에 죽어버리러 온 것이겠죠
 
무서운가요
무서웠을 겁니다
 
멧돼지가 술을 마실 줄 알았다면 달라졌을까요
말을 해서 자신의 고충을 토로했다면
조금이라도 귀여웠다면
 
멧돼지 아닌 무엇이었다면
 
사람은 뭐 그리 거창해서
미간을 좁혀 스크린 도어를 굳게 닫는지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면서
목을 세계 조여봅니다 숨이 턱 막혀
 
이대로는 불편해서 잘 살 수 없겠어요
넥타이를 조금 풀어 내립니다
 
어제 술을 많이 마셨더니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립니다
삼겹살에 소주
그 조합은 정말 최고잖아요
 
스스럼없이 맛있다 말하고
기름이 참 깨끗하다고 하는 나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요
부끄러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
우리는 그렇게 되어가겠죠
 
숨이 턱 막힐 때까지 산을 오르겠죠
- 장대성 / 2024년 계간 <파란> 시 등단
 
 

비평

 
                                      이현아
 
그곳에서 나는 연극배우였다. 이 연극에는 미친 사람들만 출현했고 그들은 돈이나 죽음이나 직업이나 생활 같은 것 모두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울거나 웃었고 갑자기 화를 내기도 하였으며, 그러므로 이 연극에는 극단적으로 화합만이 존재하거나 갈등만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 연극에는 대본이 있다.
 
이 연극에서 어떤 미친 사람은 단 한 권의 책만 읽었다. 그 책은 책자처럼 아주 얇았고 책 읽는 사람은 책을 다 읽으면 거꾸로 뒤집어서 다시 읽었다. 그는 책을 읽다가 가끔 노트에 뭐라고 끄적이기도 하였는데 절대 자기 노트를 보여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것을 빼앗으려고 하면 노트의 페이지를 찢어서 먹어버렸다.
 
극의 중반부에서 나는 미친 사람들과 춤을 춘다. 이것은 대본이 있는 내용이고 음악이나 인디언 분장이나 북소리 같은 것은 없다.
 
(미친 사람처럼 자유롭게 춤을 추시오.)
 
다들 몸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고 누군가는 바닥을 굴렀다. 넘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 춤을 추다가 나를 때렸고 나는 분노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개 많은 관객은 우리의 율동이 만들어내는 거대하고도 불규칙한 운동에 집중하였으나
 
그날, 그 사람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나를 오랫동안 응시하다가 시선을 거두고 들고 온 수첩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부터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는지를 갑자기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소리를 지르고 가슴을 주무르고 문질러도 나는 내가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것 같았고
 
오로지 수치심만을 느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연극배우 일을 그만두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몇 번이고 미친 사람이 되고자 집에서도 바닥을 기고 머리를 쥐어뜯고 그것을 먹어보기도 하였지만 내가 연기하는 미친 사람은 나를 설득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역류성 식도염에 걸린 환자였다.
 
그러나 관객을 연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내 옆에 앉은 누군가 작게 웃으면 나도 작게 웃었고, 사람들이 크게 웃으면 나도 크게 웃었다. 눈물을 흘리면 조용히 했다. 지루한 표정을 지으면 눈을 가늘게 떴다. 연극이 끝나면 극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면 되었고 누군가 감상을 물으면 "옛날 생각이 나더군"이라거나 "그렇게 나쁘진 않았어" 대답하면 되었다.
 
동조할 수 없는 관객도 있다. 지금 내 옆에 앉은 사람은 감동하지도 웃지도 따분해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장면은 보지도 않고
리플릿만 읽어대거나 고요하게 무대의 배우들을 관찰하고 노트를 꺼내 무언가 적고만 있다.
 
내가 노트를 슬쩍 훔쳐보려고 하자 그는 노트를 찢었고
그것을 꾸겨서 한입에 넣었다. 그는 얼굴이 새빨개진 나를 보고 종이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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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 2024 가을호(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