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ext & context

시인동네 2018년 8월

 * 기억할 만한 글: 김인숙, "하이쿠(俳句)는 맥주 두 잔이다"

                    류성훈, "공구"      


 비


               성선경


 머리는 없고 토슈즈만 있다, 가슴은 없고 토슈즈만 뛰어다닌다, 다리도 없고 종아리도 없고 토슈즈만 음계를 밟는다, 몸통은 모두 없고 토슈즈만 바쁘다, 발목 위는 없고 다 없고 토슈즈만 뛰어다닌다, 그림자도 없이 토슈즈만 뛰어다닌다, 흙먼지 위의 흙먼지 위를 토슈즈만 뛰어다닌다, 연잎 위에 물방울이 또르르 구른다, 물방울 위의 물방울 청개구리가 한 마리 또다시 뒷발에 힘을 모은다. 




 공터를 가진다는 것


                 민왕기


 책 한 권 남기고 떠난 작가가 적막에 성실했듯이

 문장과 문장 사이 행간에 시간이 흐르듯이


 쓸쓸함에 성실하면 공터가 생긴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공터


 지금 이 공터는 쓸쓸하고 사람에게는 쓸쓸함이 공터였다

 아무것도 메워 넣을 수 없는 시간의 공터


 그를 읽다 문득 사람이 가진 공터의 평수를 재어보고

 어떤 것은 깊고 어떤 것은 널따랗기에

 나는 내가 가진 공터나 살피면서 밤을 산책했다


 사람이 만나는 일이 공터와 공터가 만나는 일 같기도 하고

 서로 공터를 넓히는 사랑을 하나 갖는 것 같아서


 누가 떠나면, 둘이 있던 공터에 혼자가 남아 휑한 공터를 열 평 쯤 더 늘리게 되겠지


 쓸쓸한 사람을 보면 눈매가 시원한 것은

 그 사람 공터에 바람이 불고 있기 때문


 그 사람 문장과 문장 사이가 멀고 긴 것은

 떠난 사람 많아 공터를 넓혀왔기 때문


 쓸쓸한 사람 보면, 그의 공터에 들러 바람이나 쐬다 오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