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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 사랑의 탄생 아담이 신에게 복종하기를 선택했다면, 죄도 없고 법도 없었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랬다면, 사랑도 없었을 것이다. - 지젝, 죽은 신을 위하여. 나는 이 말을 '사랑은 타락의 증거이다'로 고쳐 읽었다가 또 다시, '타락의 결과물이다'로 고쳐 읽는다. 까마득한 아담 할아버지의 선악과 먹기가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였는지, 반항 정신 때문이었는지, 혹은 둘 다였는지 모르겠지만, 눈 밝은 타락의 길 이전의 순진무구한 삶이 '행복'의 표상이라면, 타락 이후의 역사는 갈등 없이는 살 수 없는 원수 같은 이웃 사랑의 가시밭길일 테다. 아담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만큼 유약했거나, 신에 맞먹을 만큼 위대해지고 싶은 반항인이었을까. 혹은 지독한 건망증이었을지도. 에덴에 널린 수많은 다른 동물들처럼. 에덴의 ..
쌀독 밖으로 나오는 바구미 급하더라도, 대강 하지 말자. 너무 빨리 읽으면 사상은 자라지 않는다. 자라지 않은 사상에서 흘러나오는 과거의 말들로는 그렇고 그런 상식 수준의 생각들 말고는 만들어낼 수 없다. 아니, 그것은 만들어진 것조차도 아니며 재활용되지 못한 재활용품 수거함 속의 냄새나는 빈 페트병 같은 것밖에는 안 된다. 그것을 가공하여 전혀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깊은 성찰과 사상이다. '전혀 다른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해도, 최소한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한 재료를 추출해내기라도 해야 한다. 위로가 되는 것은 내 말을 알아듣는 벗과 좋은 책이고, 이들과 대화하고 있는 동안만큼은 나는 내가 감히 인류의 벗이라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사는 현실의 세계에서 나와 어깨를 부딛치는 것은 '인류'가 아니라 무수한..
흑백의 밤 녹색의 불면증  아마도아프리카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이제니 (창비, 2010년) 상세보기 시인은 언제나 자신의 시가 너무 명백할까봐 걱정하고, 또 너무 모호할까봐 걱정한다. 어떻게 하면 잘 숨을 수 있을까. 그렇지만, 어떻게 하면 머리카락이 보이게 숨을 수 있을까. 어떤 시인들은 시가 재현하려는 대상의 전체가 지닌 뚜렷한 윤곽, 황금비율, 색채, 의미의 완전한 전달에 골몰하고, 또 어떤 시인들은 아직 드러난 적 없지만 (그래서 공상이나 망상으로 쉽게 오해받을 수도 있을) 세계에 편재하는 ‘무엇’의 손가락, 휙 돌아서 막 달아나며 사라진 실루엣에 불과한 뒷모습, 바람에 흔들린 옷깃 같은 단서들(만)을 독자에게 인색하게 제공한다. 이 기술들에 관해서라면 아마도 이제까지 제출된 모든 시론들을 다..
to Indimina  론 울프* 씨의 혹한 론 울프 씨가 자기 자신을 걸어 나와 불 꺼진 쇼윈도 앞에 서자 처음 보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하나의 입김으로 곧 흩어질 것 같은 그의 영혼. 그러나 이 순간 그는 유일무이한 대기의 조각으로 이 겨울을 견디고 있다. 그의 단벌 외투를 벗겨간 자들에게 그는 반환을 요구할 의사가 없다. 처음부터 외투는 그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 겨울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는 친구가 셋 있었는데 하나는 시인, 하나는 철학자 그리고 자기 자신이었다. 그들은 자존심이라는 팬티만 걸치고 혹한을 견디려는 그의 무모한 결심을 존중해주었지만, 이 존중이 그의 저체온증을 막아주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는 스테판에게 말했었다; 저 육각의 눈 결정이 아름답다면, 보이지 않는 내 영혼의 아름..
아저씨는 파업 중 며칠 전 연구실을 나서던 밤 11시, 파업 중인 외솔관 경비 아저씨가 6층 연구실 옆 계단 복도에 놓인 쓰레기통을 가만히 치우고 계신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을 이 아저씨가 "아이구, 오늘 나오셨어요?" 하는 동시에 나는 "아니, 오늘 나오셨네요?" 하고 둘이 웃고는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데, 아, 아저씨는 왜 이 무임금의 밤에 나오셔서 '살짝이 아무도 모르게' 쓰레기통을 치우고 계시는 건가, 가슴이 아프다. 그러고 보니 청소/경비 노조 파업이 보름이 넘어갔는데 학교에 나와 보면 넘치는 휴지통 하나 없다. 이래서야 파업이 파업답게 될 수 있을까...하다가 아저씨의 집이나 다름없을 외솔관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그의 저임금-무임금의 밤 시간을 생각하고, 이러한데, 나란 놈은 공부..
기도합니다 http://viamedia.tistory.com/trackback/398 일본성공회 토호쿠교구 주교의 메일 3월 13일 20시 38분에 지진 재해지역인 토호쿠교구 카토 히로미치 주교님이 일본 각교구 주교님과 성직자에게 보낸 메일입니다. 한일협동위원회를 통해 전송되어 왔기에 급히 옮겨 전합니다. - 관구 한일협동위원회 유시경 신부 주교회, 그리고 지금까지 메일로 연락주신 여러분들께 오늘 밤 겨우 집에 전기가 들어와, 이 컴퓨터로 메일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메일을 열어보니 정말 많은 격려 메일이 와 있었고, 캔터베리 대주교님을 위시하여 해외로부터 많은 메시지를 주셔서 지금 처음 보면서 정말 놀랐고 감사를 드립니다. 수도는 아직 개통되지 않았지만, 어젯밤까지는 컴컴해서 몹시 추웠습니다. 어떤 분이 주신..
김영승 선배님, 공개된 지면에 편지를 쓰라는 분부를 받고 이 편지를 쓰기까지 저는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남들이 볼 걸 뻔히 알면서 쓰는 편지에는 도대체 무슨 내용을 담아야 할까요. 그래서 마감 기한 최후통첩을 받고도 한참을 지나 선배님 단 한 분만 읽는다 치자 결심하고서야 겨우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선배님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선배님을 20년 전부터 압니다.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들어간 문예반 반실에 놓여있던 날적이에 추상같은 2학년 선배가 어여쁜 글씨로 적어놓았던 「반성641」을 읽고 나서, 저는 반실 책장에 꽂힌 선배님 시집을 들고 학교와 집을 오가며 참 불온한 말들을 낄낄거리며 열심히 읽었더랬습니다. 굴헝같이 습하고 어둡고 서늘해서 이상하게 아늑한 문예반실에서, 동기들과 겨울이면 곱은 손가락을 호호 불며 갱지..
그녀는 요리를 멈추지 않았다 : 「요리사와 단식가」와 <301․302> 자연의 목소리와 같은 에고이스트는 없어. 자연의 목소리 속에서 우리가 확실히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모든 타인을 희생할지라도 알아서 쾌락을 구해야 한다는 만고불변의 성스러운 견해야. - 프랑수아 드 사드 금욕적인 수도자들은 비범해진다. (...) 그들은 다르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다른 곳에 있기를 갈망한다. (...) 다른 곳에 다르게 있기를 소원함에 담긴 위험성은 이 소원이 완전하게 실현될 가능성에 있다. - 마크 에드먼슨 왜 증상은 멈추지 않는가? - 자크 라캉 1987년 부근 넥타이 부대가 시청 앞 광장을 행진하던 1987년, ‘60년대산(産) 젊은 시인’ 장정일은 이 정치적 사건보다 몇 달 앞서 시집 을 출간하고, 이어 김수영문학상의 최연소 수상자가 되면서 문단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이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