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ext & context

타락; 사랑의 탄생

아담이 신에게 복종하기를 선택했다면, 죄도 없고 법도 없었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랬다면, 사랑도 없었을 것이다.
- 지젝, 죽은 신을 위하여

나는 이 말을 '사랑은 타락의 증거이다'로 고쳐 읽었다가 또 다시, '타락의 결과물이다'로 고쳐 읽는다.
 
까마득한 아담 할아버지의 선악과 먹기가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였는지, 반항 정신 때문이었는지, 혹은 둘 다였는지 모르겠지만, 눈 밝은 타락의 길 이전의 순진무구한 삶이 '행복'의 표상이라면, 타락 이후의 역사는 갈등 없이는 살 수 없는 원수 같은 이웃 사랑의 가시밭길일 테다. 아담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만큼 유약했거나, 신에 맞먹을 만큼 위대해지고 싶은 반항인이었을까. 혹은 지독한 건망증이었을지도. 에덴에 널린 수많은 다른 동물들처럼.

에덴의 '웰빙' 생활과, 지성을 감득한 타락 이후의 삶 사이에는 죄와 법의 탄생이,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을 발명할 절실한 필요성이 있었다. 물론, 모든 탄생에 대한 설명은 사후적이다. 칸트가 자유를 그렇게 설명했듯이. 그러나 이미 있는 세계를 귀납추리해내다가 이 기계의 여신과도 같은 기적적인 발명(견)으로 묶어주지 않는다면, 인간은, 과연, 이제까지 견뎌올 수 있었겠는가. (이 문장의 논법도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에는 도약해야만 한다. 거기서부터는 믿음의 문제다.)

눈이 닿는 곳마다, '오직 사들인(혹은 빼앗은) 것들을 통해서만' 가본 적 없는 그 낙원의 삶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지긋지긋한 프로파간다. 그중 며칠 새 가장 웃겼던 것은 강서경찰서-강서구청 옆에 떠억 붙어있는 키스방 간판-롤링스톤즈 자켓 사진을 싼티나게 패러디한 듯한 입술 그림 옆에 천연덕스럽게 적어놓은 "전립선 마사지 체험". 피 터지는 사랑에의 노력 대신 가짜 낙원의 환상.

낙원에서 그런 것이 필요할 리 없다.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자주 찾는 쾌락이라는 테라피가 실은 에덴에 없었으리라는 이 생각이 왜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걸까. 난 아무래도 '인간 일반'은 믿고 싶으면서 국회의사당이라든가, 극장이라든가, 기타 모여 있는 '사람들'을 믿기에는 망설임이 앞서나 보다. 일반 의지에 선악이 없다는 것이 아직도 이렇게 무서우니, 

*

그러나 어찌하랴!
더러운 그대가 내 이상(ideal)의 질료인 것을.
 
(카악, 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고 시의 첫머리를 시작했을 때, 김수영도 전립선 마사지와 사랑 사이를, 타락한 세계에서의 위장된 행복과 머리를 쥐어뜯는 갈등 사이를, 요동하고 있었을까.  

(또 유입경로에 창발적인 검색어들이 출몰하겠군.) 

'text & contex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준규, "검은머리방울새"  (0) 2011.04.28
사랑, 최소한의 코뮤니즘  (0) 2011.04.16
사랑과 혁명  (0) 2010.03.05
Derrida on Deconstruction, Subject and Human Rights  (0) 2010.01.18
"법"과 법  (0) 2009.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