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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context

이준규, "검은머리방울새"

    
토마토가익어가는계절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이준규 (문학과지성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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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방울새


  검은머리방울새는 오리나무숲에 살았다.
  이 문장은 무한히 반복해도 좋으리라.
  그러니까 검은머리방울새는 오리나무숲에 산다.
  검은머리방울새는 쮸잉쮸잉쭈잇쭈잇 울었다.
  검은머리방울새는 방울새나 촉새처럼 또륵또륵또륵또르륵또르르륵 울거나 찌리찌찌리찌찌쪼찌리찌 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검은머리방울새는 그냥 쮸잉쮸잉쭈잇쭈잇 울었다.
  검은머리방울새가 현실에서 어떤 울음을 운다면 그것은 꿈을 꿀 때뿐이기 때문이다.
  검은머리방울새가 침묵할 때는 다른 모든 새들이 침묵할 때와 동일한 침묵을 침묵한다.
  침묵을 침묵할 수 없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검은머리방울새는 어느 날 문득 아무것도 아무것과 구분할 수 없었다.
  검은머리방울새는 전체는 전무,라고 외친 후 홍방울새를 생각해보고 완전한 침묵을 시도했다.
  그 제스처로 혀를 뽑아버렸다.
  그러면서 검은머리홍방울새는 생각했다.
  이젠 내게 제스처만 남았고 제스처로 살다 제스처로 떠나 제스처 그 자체가 되어 제스처로 표상될 것이다.
  그 후론 검은머리방울새는 침묵의 그림자를 오랫동안 응시하는 습관이 생겼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검은머리홍방울새는 검은머리홍방울새로 영원히 동어반복되기 때문이었다.
  침묵의 그림자는 쮸잉쮸잉쭈잇쭈잇 흔들리고 있어 매우 시끄러웠다.
  검은머리방울새는 참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오리나무숲에는 큰불이 났고 검은머리방울새는 어어, 어이가 없었다.
  쮸-잉 쮸-잉 쭈잇 쭈잇. 쮸-잉 쮸-잉 쭈잇 쭈잇.
  검은머리방울새는 오리나무숲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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