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I/MRA 검사는 한 시간 가까이 걸리는 검사였는데, 느낌은 20여 분도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소음이 크다면서 의사는 귀마개용 헤드폰을 씌워주고 단단히 고정시켰다. 세심한 건지, 기계의 작동 때문인지, 몸이 닿는 부분이 따뜻했다.
여러 종류의 소음이 일정 시간 동안 반복되었다. 대개 높고 낮은 한 종류의 소음(점점 음이 높아지는)과, '웅웅' 하는 소리와 '찌르르' 하는 소리가 함께 울리는 듀엣 소음, 심지어 이것에 다른 한 가지 소리가 합쳐져 트리오로 울리는 소음도 있었는데, 기계 안에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눈을 감았던 나는, 소음이 바뀔 때마다 그 충격을 되도록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일정한 시간 동안 반복되는 소리들을 '감상'하기까지 하였다. 그것들은 외계인이 몰고 온 UFO가 공중에 멈추어 아래로 핀 조명 같은 직사광선을 쏠 때나, 제자리에 멈춰 공중에 뜬 채 접시 부분은 정지하고 몸체만 돌며 나이트클럽 조명처럼 여러 빛깔의 빛을 뿜을 때, 혹은 지구인을 납치한 외계인이 머리에 여러 전극을 꽂고 검사할 때 내는 기계음 등을 떠올리는 것이어서 약간의 공포와 호기심을 함께 불러 일으켰다. 소음의 패턴이 바뀔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고 또 이내 익숙해지면서, 어느 순간엔가 나는 가수면 상태에 있는 느낌까지 받았다. 하기는, 메탈리카의 음악을 들으며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잠이 들곤 하던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규칙적인 소음은 신체와 호응한다는 것도 궤변은 아니리라. 마이클 존스가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록음악을 연결시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무튼 이 이상한 '기계 속에서의 명상'은 희한하게도 얼마쯤 평온한 느낌을 주었는데, 상상적으로 기억하건대, 자궁 속에서의 환경과 상당히 비슷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검사 시간 내내 나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마치 낮 시간 동안 관 속에서 잠자는 어린 흡혈귀처럼, 혹은 오븐 속에서 서서히 부풀어오르는 빵 반죽처럼 아무도 모르게 비밀스럽게 고양되었던 것이다.
내 머릿속 도면에 나의 이상주의나, 거기에서 비롯되는 분노나, 시적 황홀경 같은 것은 전혀 새겨져 있지 않겠지. 며칠 잠잠하던 두통이 아침 무렵 오른쪽 머리의 경미한 통증으로 다시 시작되더니, 잊을 만 하면 다시 되풀이 찾아온다. 두 달 넘게 예측불허로 계속되는 전방위적인 두통이 정말 신경과 질환일까? 떠나지 않는 약한 감기 기운 같은 것도 기분이 나쁘다.
이즈음 나의 과제는 '번민의 한 단계 위'다. 그것은 고통에 무감/둔감해진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온갖 고통을 이해하고 다른 패러다임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것에 관한 것이다.
금요일에 처음 들어간 밤의 요가 강습은 좋은 명상의 기회였다. 마르고 유연한 요가 강사는 덕성을 갖춘 듯하여, 그 본래 의미에서의 요기를 떠올렸다. 눈이 크고 미인상인 그녀는 또렷하고 친절하며 관대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어 호감이 갔다. 그녀의 마른 몸은 요가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수행임을 증명하는 듯 잘 만들어진 활과 같은, 그러니까, 어쩐지 육체성보다는 정신성을 강조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요가의 마지막 순서, 바닥에 긴장을 풀고 누워 불을 끄고 눈을 감은 채 수행하는 명상의 시간에, 그녀는 임철우의 글귀를 읽어주어 적지않게 나를 놀래기도 하였다.
한편, 국민학교 시절 아침이면 전교생들이 눈을 감고 들어야 했던 '명상의 시간'을 생각해보면, 명상에서 반성이 배제되면 명상하는 자가 꼭둑각시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을 비운' 자리에는 무엇이든 들어올 수 있을 테니까. 기독교 교회들에서 대부분 명상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데에는 그런 까닭도 있겠지. 기도와 명상에는 아무래도 (거칠지만) 의식 지향과 평정심 지향이라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물론 중요한 것은 목적과 내용일 것이다. 그것이 기도이든, 명상이든,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서는 안되고, 번민을 초월하기 위해 이기적인 둔감함과 무관심을 차용해서도 안될 것이다. 실로, 나는 '인간됨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탐구과제를 위해 나 자신을 나 자신에게 임상 대상으로 내놓고 실질적인 변화 가능성을 타진하는 중이다.
이상한 일은, 마음이 적이 평온을 찾자 일기가 구체적으로 쓰여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즈음 나는 의식적으로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기도 하다. 머릿속이 어지러울 때, 그 가장 불길한 전조는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상태의 지속'이었기 때문에, 나는 지금 증상과 원인을 거꾸로 뒤집어, 평온의 증상을 외화함으로써 오히려 병인을 제거하려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는 해도, 실제로 그 효과는 작지 않아서 평정심의 상태를 연장하는 데 한몫 단단히 하고 있는 것이다. 파스칼의 관습의 논리처럼, '나의 의장(疑裝)'이 나를 구성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말 보고서 채점을 위해 15년 만에 다시 읽고 있는 복거일의 장황한 소설에도 원인이 있으리라. 구체적으로 쓰지 않는 버릇이 들면 다른 형식의 글에서도 종종 무리한 비약을 감행하게 된다. 다만, 자칫 '전혀 시적이지 않은' 불미스러운 상태가 지속되지 않도록 경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