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ext & context

미친 지젝과 함께(2)

from http://www.apieceofmonologue.com/2009_05_01_archive.html


Slavoj Zizek: Short Survey
by Rosanna Greenstreet for The Guardian - August 9, 2008

guard image


When were you happiest?

A few times when I looked forward to a happy moment or remembered it - never when it was happening.

What is your greatest fear?

To awaken after death - that’s why I want to be burned immediately.

What is your earliest memory?

My mother naked. Disgusting.

Which living person do you most admire, and why?

Jean-Bertrand Aristide, the twice-deposed president of Haiti. He is a model of what can be done for the people even in a desperate situation.

What is the trait you most deplore in yourself?

Indifference to the plights of others.

What is the trait you most deplore in others?

Their sleazy readiness to offer me help when I don’t need or want it.

What was your most embarrassing moment?

Standing naked in front of a woman before making love.

Aside from a property, what’s the most expensive thing you’ve bought?

The new German edition of the collected works of Hegel.

What is your most treasured possession?

See the previous answer.

What makes you depressed?

Seeing stupid people happy.

What do you most dislike about your appearance?

That it makes me appear the way I really am.

What is your most unappealing habit?

The ridiculously excessive tics of my hands while I talk.

What would be your fancy dress costume of choice?

A mask of myself on my face, so people would think I am not myself but someone pretending to be me.

What is your guiltiest pleasure?

Watching embarrassingly pathetic movies such as The Sound Of Music.

What do you owe your parents?

Nothing, I hope. I didn’t spend a minute bemoaning their death.

To whom would you most like to say sorry, and why?

To my sons, for not being a good enough father.

What does love feel like?

Like a great misfortune, a monstrous parasite, a permanent state of emergency that ruins all small pleasures.

What or who is the love of your life?

Philosophy. I secretly think reality exists so we can speculate about it.

What is your favourite smell?

Nature in decay, like rotten trees.

Have you ever said ‘I love you’ and not meant it?

All the time. When I really love someone, I can only show it by making aggressive and bad-taste remarks.

Which living person do you most despise, and why?

Medical doctors who assist torturers.

What is the worst job you’ve done?

Teaching. I hate students, they are (as all people) mostly stupid and boring.

What has been your biggest disappointment?

What Alain Badiou calls the ‘obscure disaster’ of the 20th century: the catastrophic failure of communism.

If you could edit your past, what would you change?

My birth. I agree with Sophocles: the greatest luck is not to have been born - but, as the joke goes on, very few people succeed in it.

If you could go back in time, where would you go?

To Germany in the early 19th century, to follow a university course by Hegel.

How do you relax?

Listening again and again to Wagner.

How often do you have sex?

It depends what one means by sex. If it’s the usual masturbation with a living partner, I try not to have it at all.

What is the closest you’ve come to death?

When I had a mild heart attack. I started to hate my body: it refused to do its duty to serve me blindly.

What single thing would improve the quality of your life?

To avoid senility.

What do you consider your greatest achievement?

The chapters where I develop what I think is a good interpretation of Hegel.

What is the most important lesson life has taught you?

That life is a stupid, meaningless thing that has nothing to teach you.

Tell us a secret.

Communism will win.



  계속 지젝을 읽는 중
.

지젝은 헤겔의 교양Bildung을 푸코의 훈육 개념으로 보충하면서, 주이상스와 죽음충동이라는 정신분석 개념으로 옮겨간 뒤, ‘아무것도 안 의지함아무것도 아님 그 자체를 의지함이라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에서의 구분을 욕망의 대상원인 a를 중심으로 순환하는 강박증적 주체의 문제틀로 변주하고, 라캉과 니체의 접합점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욕망이 결코 직접적으로 나의 것이 아니며 언제나 타자의 욕망이라는 것”, “따라서 내가 진정으로 욕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욕망의 모든 실정적 대상을 거부하고 아무것도 아님 그 자체를 욕망하는 것이라는 진술로부터 니체와의 상동성을 추출한다. “의지는, 오로지 아무것도 아님을 능동적으로 의지하는 의지인 한에서만, ‘의지에의 의지일 수 있으며, 의지함 그 자체를 원하는 의지일 수 있다.”(185-6)

지젝의 끊임없는 저술활동과 그 저작물들의 내용이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는바, 이것은 그 자신에 관한 진술이다. 그는 나는 강박증자다, 그리고 강박증 속에 세계를 대하는 주체의 진실이 있다는 내용을 거듭 다른 철학자들의 개념을 빌려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이 대목에서 오늘 <손석희의 시선집중>토요일에 만난 사람에 출연한 축구를 좋아하는 세계적인 수학자강석진 생각이 난다. 그는 축구선수야말로 자신이 돼야 할 유일한 미래의 자화상이라 생각하다가 10대 시절에 자신의 신체 조건이 훌륭한 축구선수의 자질에 미치지 못함을 발견하자 수학에 매달린다. 그는 미국의 여러 명문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젊은 수학자로서 국제적인 상도 여러 번 받았는데, 그의 말에 드러나는 여러 징후들은, 그러한 유명세가 그가 지속적으로 수학 바깥에서 사유하며, 수학보다 가까운 자신의 주변에서 수학의 참조점들을 발견하기 때문임을 방증한다. , 망실된 첫사랑(축구)에 한참 못 미치는 두 번째 사랑(수학)을 다루는 것은 한결 용이했던 것이다. 어쨌든 지금 그는 서울대 수학과 교수가 되었고, 교내 힙합 동아리의 지도를 담당한 한편, 이과대학 축구팀 지도 교수로서 전지훈련, 체력훈련 등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프로 축구계 바깥의 축구 달인의 삶을 병행하고 있다. 박민규의 축구도 잘해요의 주인공이 시인 대신 수학자로 바뀌어 현실화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사학자였던 외할아버지와 어문학자였던 아버지의 영향 아래서 학문적 세계 바깥그 정반대에 있는 육체들의 경합--으로 나가고자 했던 그의 열망은, 선험적 조건의 결핍으로 무산되었으나, 그 열망보다 그 자신의 인식론적 틀이 먼저 바깥으로 나감으로써, 사실상 가문의 요구와 자신의 욕망을 현실적으로 민활하게 타협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이 리비도의 경제 기술, 즉 축구에 대한 애착을 수학이라는 대리 보충물에 대한 성실로 변환시키는 과정을 통해, 남아 있던, 만족의 미진한 영역은 현실적으로 축소되고, 실정적으로는 만족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비친다. 손석희가 수학자로서 가장 즐거울 때는 언제인가?”라고 묻자, 그는 만들고자 하는 공식을 증명해내는 순간,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척할 때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이른바 현실에서의 능력이란, 선택과 집중이라는 실정적인 리비도 관리 기술의 강도와 유연성에서 비롯하는 것은 아닐까?

*

연구실에 올라오면서, (엘리베이터를 끊은 지 한 달째) 계단에서 급하게 달려 내려가고 있는 ㄱㅎㅈ 선생님과 마주쳤다. 그녀는 내게 오렌지를 주고 다시 달려 내려갔다. 이파리가 하나 달린 오렌지는 햇빛을 담은 폭탄처럼 이상하고 기쁘게 빛났다. 얼핏 오렌지의 표정을 본 것 같다. 많은 것을 이해하지만 섣불리 동정하거나 연민을 표현하지 않는 세련된 배려의 향기가 배어나는 표정이었다. 그것은 표정과 향기가 있을 뿐, 묵묵했다. 추운 연구실에서 먹고 싶은 생각은 나지 않는 것. 시고 달고 찬 과육을 가진 이상하고 기쁜 표정이 가방 안에 있다. 가방 안의 어둠 속에 빛나고 있을 햇빛의 색상과 오롯이 자기 자신인 향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

지젝은 또한 아무것도 아님 그 자체를 의지하는 강박증적 주체 개념으로부터 밖에서부터 포함시키기’(그 유명한 세 형제 농담, “내 형제는 어니스트, , 그리고 나 자신이다”)의 조건을 발견하며, 이것이 칸트가 의식하지 못한 채 해내고 있었던 것이라고 여긴다. (지젝은 헤겔이 그것을 의식의 수면으로 떠올렸다는 것을 제외하면, 헤겔이 의외로 칸트와 보기보다 훨씬 가깝다고 쓴다.) “하나의 계열과 그것의 과잉 간의, 전체와 그것의 예외인 그 하나 간의 환원불가능하고 궁극적으로 설명불가능한 틈새는 구체적 보편성의 바로 그 지형”(192)이며, “이런 이유 때문에 헤겔의 진정한 정치-철학적 계승자란 어떤 새로운 형태의 유기적 실체적 질서로 되돌아감으로써 근대성의 과잉들을 교정하려 노력하는 저자들(예컨대, 공동체주의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일체의 확립된 질서에 대해 구성적인 그 과잉의 정치적 논리를 완전히 인정하는 저자들”(192), 이를테면 칼 슈미트 같은 사람이다. 슈미트의 예외 개념은 실재의 침입을 나타내는 동시에 상징적 규범적 질서를 부과하는 주권자의 제스처를 나타내는 것으로, “라캉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대상 a를 나타내는 동시에 주인기표 S1을 나타낸다.”(194) “예수 그 자신의 윤리적인 것의 종교적 중지’”법을 완수하는 바로 그 행위는 그것의 직접적 권위를 침해한다”(195)는 것의 본보기다. 키에르케고르의 구분을 이용한다면, “전통적 우주는 윤리적인 반면에 종교적인 것은 옛 방식들의 근본적 붕괴를 내포한다참된 종교는 일단 전통의 지지를 우리가 잃게 될 때 우리가 만들어야만 하는 불가능한 것에 대한 미친 내기이다.”(195)

아마도 이것은 바디우 독해를 예비하는 논변이리라. (실제로, 이 책의 3장은 바디우의 바울 서신 독해에 관한 것이다.) 율법의 폐지와 완성의 이중성이 동시적인 사랑의 실행은 바디우의 『사도 바울』의 중요한 핵심주제이며 바디우의 보편주의의 가장 강력한 프로퍼갠더이다. 언젠가 블로그에 썼던 내용, 바디우의 『사도 바울』은 vs. 무법이 아니라 vs. 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이와 관련된 내용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와 정치논쟁의 작은 곁가지였던 올바른 외국 이론 수용의 문제에서 불거진, 황정아와 서동욱 사이의 『사도 바울』에 대한 독해에 관한 논쟁은 저급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서동욱은 보다 실용적으로 정리했고, 황정아는 자신의 저급한 독해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이 논쟁의 일단은 바디우의 『사도 바울』이 법의 완성에 관한 것인가 법의 폐지에 관한 것인가 하는 양단 간에 결정을 내려야 할 것처럼 진행되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완수하는 동시에 그 권위를 일시적으로 중지시킬 수 있는 법, 자기 자신 보편자이자 특수자로 온전히 나타나는 법의 현신은 단지 자기를 질서의 원리이자 선포자로 공표하는 법의 상징적 대리보다 훨씬 더 절대적이고 강력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바디우가 아들의 이론이라 부르고 있는 기독교 교리에서 이 보편적 특수자로 나타나는, 삼위일체이면서 동시에 온전히 인간인 육화된 독생자 예수의 형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보다도 훨씬 강력하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사람들이 아들일 가능성을 위해 자기를 믿을 것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파괴시킴으로써 그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아들에 초점을 맞추고 아버지와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으나, 내 생각에 이 아들은 도저히 아버지 개념만으로 이길 수 없는 아들로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초자아 스스로 유한성을 완전히 체화하고 의식화한 형태의 가능성을 제안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제 안에 아버지를 일부가 아니라 온전히--지니고 있다!) 이미지화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충분히 진술될 수 있는 형태로 전승된, 즉 눈앞에 그릴 수 있고 말할 수도 있는 이 개념이야말로 서구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력적인 발명이 아닐까?

 

3장에서 지젝은 (알튀세르라는 시작을 자기 식으로 변형하고 그 시작점을 지워버린 발리바르, 랑시에르, 바디우, 라클라우 네 명의 철학자 중 하나인) 바디우로 시작한다. 이 챕터와 다음에 인용할 바디우의 사건에 관한 설명을, 논문에서 419와 그 주체로서의 419 세대에 관해 논할 때 참조하자.

 

사건은 자신에 고유한 일련의 한정들을 내포한다: 사건 그 자체; 그것의 명명(‘프랑스 혁명이라는 명칭은 어떤 객관적 범주화인 것이 아니라 사건 그 자체의 일부이며, 그 추종자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지각하고 상징화한 방식이다); 그것의 궁극적 목표(완전히 현실화된 해방의, 자유-평등-박애의, 사회); 그것의 작용소operator’(혁명을 위해 투쟁하는 정치적 운동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지만 그렇다고 하찮은 것이 아닌, 그것의 주체, 즉 진리사건을 위해서 상황의 역사적 다양성 속에 개입하며 그 속에서 사건의 기호들-효과들을 식별/확인해내는 작인. 주체를 정의하는 것은 사건에 대한 그의 충실성이다: 주체는 사건 이후에 오며, 자신의 상황 내부에서 그것의 흔적들을 끝까지 남아 식별해낸다.(210-211)

 

*

역사주의와 역사성에 대한 지젝의 논의를 읽고 있으니, 어쩌면 며칠 전 썼던 행복에 대한 두 태도 사이의 반복적 동요는 신앙과 중용 사이의 동요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과도한 것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와, ‘영감에 차 글을 쓸 때마다 (특히 시를 쓸 때 발휘되는) 광기, 무조건적인 (맨 정신에서는 종종 편집증자의 것이 아닐까 의심되는) 어떤 믿음의 불가항력적인 매혹, 그 사이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산다. 한 편에 유종호, 로티, 아리스토텔레스, 그리스, 현자가 있고, 다른 한 편에 예수, 바디우, 지젝, 시인이 있다. 전자는 교양인의 세계고, 후자는 맹수의 세계다. 예수가 맹수의 세계에 있는 것은 예수 자신의 미친 행위에 대한 결단 때문이다. 그때 수도사, 사도, 성자와 맹수는 한 몸이다. 로티는 전자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 구분된 상태를 용인하게 하는 작인이다. 그는 이 분열의 용인과 관리의 다른 이름이다. 그의 광기는 과도함을 피하려는 광기로, 지젝의 광기와는 구별된다. 1950년대에 대학 초년생으로서 트로츠키와 셸리를 종합하려 했던 로티가 40년에 걸친 학문적 노력 끝에 다다른 결론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종합의 포기--가 보여주는 그 이상하고도 평온한 광기, 어쩌면 그것은 포기이거나 체념이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보수적인 편을 선택해버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쩌면 가장 어려운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가끔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깊은 허무주의적 뉘앙스가 그의 가없이 활달한 필치를 뚫고 솟아오를 때 느껴지는 깊은 슬픔을 그의 반대자들은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

정신분석은 외설성을 그 자체의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 지젝에 대한 경직된 철학자들의 거부감은 바로 이 외설성에 대한 경멸에서 비롯한다. ㅈㅇ이 전해준, 지젝-바디우 순회 강연에 함께 했던 프레드릭 제임슨과 그의 팬덤이 보여준 태도도 여기에서 기인할 것이다. 가령, (에드먼드슨이 Philosophy against Literature에 썼던) 프로이트가 융과 결별하게 된 계기를 떠올려보자. 트리니티 칼리지 강연을 위해 배에 몸을 실은 두 사람은 정신분석의 전통에 따라 서로의 꿈을 분석한다. 어느 날 아침 갑판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고 융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혹시 사모님과의 관계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까?” 이에 대한 프로이트의 대답은 이 질문에 대답한다면 정신분석의 권위가 실추될 것이라는 것이고, 두 사람은 결별한다. 수많은 환자의 성욕에 대한 (환자 자신의 잠재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최면 상태에서의재서술을 근거로 한 연구와 가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지향성에 따른 해석을 과학이라는 중립적인 학문의 이름으로 용인하기를 학계에 요구했던 프로이트의 이 의외의 대답은, 사실상 그의 성욕에 대한 연구와 가설이 그 자신에게는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 정신분석의 상징인 프로이트만은 정신분석 대상의 예외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자가당착을 함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은 매우 적실한 판단이기도 했는데, 그는 많은 사람들이 그 자신의 사적 사실들을 알기만 해도 상징적인 그의 권위가 실추될 것이며, 사실상 그가 정신분석이라는 학문 전체를 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타자의 욕망과 신념으로 이루어진 상징체계를 경유했다. 한편, 이런 사실은 그가 환자들의 성욕에 관한 연구와 가설을 중립적인 과학적 담론이라 학계를 설득하려 시도했을 때, 그 자신 안에 있는 타자의 시선을 필연적으로 무시해야 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속설의 프로이트 식 판본(내 성생활은 사생활, 남의 성생활은 학문적 사례)이 아니라, 정신분석이라는 학문 자체가 내장하고 있는, 폭로하고 금기를 초월하는 외설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2012-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