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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context

시인과 평론가 + 행복에 대한 두 개의 태도

오늘날의 비평가들은 한 사람이 옛 시인들의 개별적인 장점을 모두 능가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18장. 1456a 8-10 


2200여 년 전에도 비평가들은 시인들에게 요구가 참 많았구나.

시인이 불가능한 것을 그렸다면 그는 과오를 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오도 그것이 시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이바지하거나, 그것이 속한 부분이나 다른 부분을 보다 놀라운 것으로 만든다면 정당화될 수 있다.
- Ibid. 25장 1460b 21-25


'과오'에 관해서라면 김수영의 "제3 한강교(인도교?)"에서 시작해 미래파에 이르는 '실험과 상상, 소통(불)가능성'에 관련되는 한 편의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여기에는 미메시스를 문예사조 상의 개념과 분리하여 '최호한의 소통가능성'에 한정하여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근대철학사>의 저자가 말했던 "잘 그린 말 그림"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과오에 관해 들고 있는 "뿔 달린 암사슴"의 예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시학> 25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많은 비평가들의 비판에 대해 시인들을 옹호하며, 세밀하게 시 구절의 해석을 들어 반박하고 있는 장면은 오늘날의 시와 비평의 관계와 너무 유사해서 깜짝 놀랄 만한 부분이다. 말꼬리를 잡고 늘어져 사실과 부합하는지 여부를 따지거나 기표를 하나의 기의에 임의로 연결시키고 오류를 지적하는 비평가들의 궤변 역시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오세영의 김수영론과 같은 것을 떠올려 보라.) 재미있는 것은 문예사가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미메시스 미학의 선구자로 내세우고 그에 따른 예술 작품의 '현실 반영'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고 있는 반면에, 정작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나치게 미주알고주알 시인이(이를테면 호메로스가) 사실 관계와 맞지 않는 시구들을 썼다고 비평가들이 비난하는 것에 대하여 거의 필사적으로 시인들을 옹호하고 있다는 점.

가령, 그는 이렇게 현대적인 해석 방법을 제안한다;
어떤 말이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이 생각될 경우에는, 문제의 구절에서 그 말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고찰할 필요가 있다.
-Ibid. 1461 a 33-35


이 모던함도, 관대함도 놀랍지만 가장 돋보이는 건 작품에 대한 사랑이다.  

1461 b 1에서 언급하고 있는 글라우콘과 관련하여, 주석에서 천병희는 그가 플라톤의 <이온>에 등장한 그 글라우콘일 것이라 쓰고 있다.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에게 칭찬 받던 플라톤의 형?) 찾아볼 것.


며칠 전 ㅈㅇ과 빈트리에서 나눈 대화는 많은 유익한 생각거리들을 던져 주었다. 특히 우리가 나눈 '윤리와 행복의 제로섬 게임'에 관한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행복'에 대한 두 개의 상이한 태도를 정식화하도록 추동한다.

1. 플라톤 식 행복 : <국가>에서 플라톤은 철인을 '철인 체제를 닮은 사람'으로 비유하며, 트라시마코스의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훌륭해보이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국가의 상상적 구축을 실행한다. 이 물음과 답의 핵심을 기억한다면, 철인의 '행복'은 훌륭해 보이는(그런 척하는) 사람들의 '행복'과는 다른 종류의 것으로서, 훌륭해 보이는 이들은 불행이라 여길 만한 것을 행복으로 지칭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행복은 자기를 어떻게 구조화하느냐에 따라 그 성격과 종류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때 철인의 행복은 유덕함과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행복과 덕은 배타적인 가치나 상태가 아니다.

2. 반면, 아리스토텔레스 식 행복;은  좋은 가문, 재물의 여부, 훤칠한 미모, 건강 등 우연적인 조건들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서, 1차적으로 이 같은 의미에서 행복은 전적으로 운에 달린 것이다. (이것은 마치 지젝이 <죽은 신을 위하여>의 한 각주에서 썼던 '혁명적 유물론에서 행복은 순전히 우연의 문제로 간주된다'는 내용과 연관된다. 여기에서 지젝은 신념에 따라 산다는 것의 가치를 지지하며 '감각적 쾌'를 내포한 '행복'의 수반은 필연적이지 않음을 명시하는 셈이다.)

1.의 태도는 훨씬 원리주의적인(orthodoxist) 것으로, '행복'의 개념을 윤리적 정당성과 일치시킬 의지를 요구한다.

2.의 태도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매우 현실적이며, 가치와 취향 사이의 근본적인 선택이나 비율 안배의 실질적인(정치학적인) 관리 기술을 필요로 한다. (지젝의 경우, '쾌의 문제는 등한시하라'는 메시지를 광범위하게 함축한다.)

윤리적이 된다는 것은, 플라톤을 따르면, '쾌'를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쾌'의 내용을 바꾸는 것이다. (다르게 구조화시키는 것이다.)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쾌'를 적당한 선에서 억누를 줄 아는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쾌'에 무심해지는 것이다. 불론 정신분석의 교훈을 따르자면, 무의식적인 층위에서 플라톤 식의 행복에 있어서도 엄청난 리비도의 억압이 뒤따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에 입각한 '쾌'와 '옳음' 사이의 협상과 타협의 지속적인 관리가 훨씬 현실적이랄 수 있다. 지젝은 정치적 대의명분을 실천한다는 데서 '쾌'를 찾으라고 은밀히 종용하는 듯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플라톤이나 지젝의 '행복'은 엄청난 승화 작용을 필요로 한다. 그것을 거의 성공적으로 실행하는 사람은 플라톤 식으로, '훌륭하디 훌륭한 사람-철인'이 될 것이며, 지젝 식으로, '진정한 투사'라고나 할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아리스토텔레스 식의 최소한의 관리된 행복은 소시민적이고 졸렬하게 보이겠지만, 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다는 점에서 가장 현실적인 기술 묘사라고 하겠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철인이나 투사를 목표로 삼고 점근선적으로 접근하는 자기 수행인가, 아니면 쾌와 윤리를 조정하는 관리 기술 연마인가? 아는 것이 힘이지만 힘의 과잉은 무지의 약("모르는 게 약이다") 처방이 필요하다고 사후적으로만 알려준다. 그저 모른다면, 그는 힘의 병에 걸리지 않을 테지만, 이렇게까지 쓰면서 모르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 

끊임없이 두 태도 사이를 오간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즐거움과 옳음 사이의 반복적인 진자 운동이 아니라 그 관계에 대한 두 개의 태도 사이라는 데서, 지금은 문제의 정식화를 하는 데 만족할 수밖에 없다. 더 많은 것을 몸과 마음과 머리로 배우자. 더 깊이 배우자. 방어하는 방식으로 돌아오지 말고, 균형을 위해서만 물러서자. 무지는 경멸스럽지만, 과도한 지성의 자율성에 삶을 맡기는 것은 끔찍하다. 물론 최악은 자기의 무지를 한정된 자기의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경험에만 의거하여 구조화된 불균형적인 지적 자율성에 맡기고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자칭 지식인들이 이런 우를 종종 범한다. 조심, 또 조심. 


동생의 졸업작품. 정수진, <이웃을 사랑하라는데>, oil on canvas,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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