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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context

미친 지젝과 함께

* 우선, <시와사상> 봄호에서 철문이 형의 재미 있는 시를 읽었다.

 

유홍준은 나쁜놈이다

장철문

 

유홍준이 멧돼지를 잡았다 맨손으로 돌팍을 던져서 잡았다 다람쥐무늬가 있는 놈을 잡았다 연두빛 칡덤불 밑에서 아장아장 걸어나온 것을 잡았다 나쁜 놈!

 

이병주문학관 주차장 지나 개울에서 물 먹고 있는 놈을 잡았다 2011 6 18일이다 그날 평사리문학관 달빛낭송회에 와서 낮에 멧돼지를 때려잡았노라고 뻥을 쳤다 어차피 힘센 놈이 힘 약한 놈을 잡아먹고 사는 거라고, 쫓아나 볼 요량으로 인사로 돌팍을 던졌는데, 그만 즉사했노라고 박박 우겼다 한번만 말해도 될 것을, 말하고 또 말하고 오래 말했다 옆집누나의 젖꼭지를 스친 사춘기의 손가락처럼 나쁜 놈!

 

유홍준이 하는 짓을 어미가 때죽나무 옆 칡덤불 뒤에 숨어서 다 봤을 거다 두고 봐라 언젠가는 그 어미가 유홍준의 엉치를 한번은 되게 들이받고 말 거다 나쁜 놈!

 

두고 봐라 유홍준이 나중에 파파할아버지가 되도록 살아서 장성한 손자의 임종을 받고 갈 때 그 다람쥐무늬 멧돼지새끼가 구불구불 세이렛길 저승길에 따라붙을 거다 쫄랑쫄랑 따라붙어서 그때 좀 과하지 않았느냐고 짧은 꼬리를 흔들 거다 내 입때껏 예서 기다렸노라고 따라붙을 거다 저승길 노루목 어디쯤 있다는 주막에서 탁배기 한잔에 국밥 한 그릇으로 시장기를 재울 때 필시 와상 밑에 엎드려 우거지 얹힌 고깃점을 기다려 꿀꿀거릴 거다 나쁜 놈!

 

유홍준은 생긴 것만 꺽정이 사촌이다 부리부리한 눈텡이만 무골산적이다 귀뚜라미 다리 하나 뗀 것만도 명치가 아린 것이 유홍준이다 다른 놈이 암컷 불러 우는 것을, 그 놈이 다리가 저려 우는 것이라고 시끄러버 죽것다고 타박하는 것이 유홍준이다 돌팍으로 멧돼지를 때려잡았다고? 나쁜 놈!

 

지금 그 멧돼지새끼가 이병주문학관 냉장고에 있다 내일 관장님하고 같이 털을 끄실를 거라더라 내가 이걸 쓰고 있는 지금, 그 야리야리한 다람쥐무늬 멧돼지새끼를 관장님이랑 헤벌쭉헤벌쭉 끌실르고 있을 줄 누가 알랴 그 애저 같은 살을 짠한 마음에다가 조선간장 찍어먹듯 찍어먹고 있을 줄 누가 알랴

 

나쁜 놈!

 

* 폭력 없이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꼭 새로워야만 하는가? 새로운 것이 좋은 가장 큰 이유는 지속된 낯익은 것의 지루함 때문이다. ‘지루함의 악새로움의 악은 근본적으로 다른데, 지루함의 악은 폐쇄성과 권태, 부패를 불러오며, 새로움의 악은 혼란과 불안, 무질서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지젝은 안정적으로 썩어가느니, 혼란 속에서 광포해지는 것이 낫다는 쪽으로 헤겔의 추상적 보편성을 독해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 “우리는 도덕성을, 즉 보다 넓은 보편성을 위해서 자신의 사회를 한정하는 습속의 정해진 실정적 질서를 침식하는 개인의 행위를 선택해야만 한다(소크라테스 대 그리스 도시의 구체적 총체성; 예수 대 유대인의 구체적 총체성). 헤겔은 이 추상적 보편성이 현실적 존재를 획득하는 실정적 형식이 극단적 폭력의 형식임을 잘 알고 있다: 보편성이라는 내적 평화의 이면은 모든 특수한 내용을 향한 파괴적 광포함인바, 다시 말해서 생성 속의보편성은 모든 특수한 내용의 평화로운 중립적 매개자의 정반대인바, 오로지 이런 방식으로만 보편성은 대자적이 될 수 있다. 오로지 이런 방식으로만 진보는 일어날 수 있다.”(지젝, <까다로운 주체>, 159)

 

* 지젝은 헤겔의 인식론 독해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본질적인 갈등구조를 염두에 두고 있다. 하이데거를 독해하는 1장에서 그것은 종합적 상상력이라는 칸트적인 지성의 작용과, 헤겔이 ‘세계의 밤’이라 칭했던 선종합적 상상력에 의해 해체되고 찢긴 세계 인식이라는, 상상력의 두 대립적인 측면을 통해 종합과 해체라는 인식의 대립적 방식에 의해 암시된 후, 헤겔에 대한 본격적인 독해가 전개되고 있는 2장에서는 앞서 언급한 선종합적 상상력에 대응하는 헤겔의 추상적 보편성의 부정적 특질, 즉 부정성 자체가 실정적 존재를 취하고 있음이 “헤겔의 <논리학> 말미의 미해결된 긴장, 즉 절대 이념의 두 패러다임으로서의 삶과 앎 사이의 긴장의 원천일 것”이라고 정식화하고 있다. 즉 “절대자의 ‘표현주의적’/생산적 측면(자신의 계기들의 생성과 퇴락의 무한한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재생산하고 ‘표현하는’ 자기 원인으로서의 삶)과 그것의 ‘인식적 측면(완전한 자기-인식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현실화하는 절대자) 사이의 대립을 다루고 있는 것”(163)으로. 지젝에 따르면 여기에서 드러나는 “첫 번째 역설은 능동성이 실체(’표현주의적‘인 생성적 권능)의 편에 있으며 수동성이 주체(의식으로서의 주체는 발생하는 것을 ’수동적으로‘ 취한다)의 편에 있다는 것이다: 실체는 praxis, 즉 능동적 개입인 반면에 주체는 theoria, 즉 수동적 직관이다. 여기서 Sein Sollen, 진과 선이 대립하고 있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지젝이 헤겔 독해를 통해, 부정성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는 한시적 통일성으로서의 보편성이 세계의 질서를 이루고 있으며 이 구조 자체가 내장하고 있는 능동적 개입으로서의 실체의 praxis와 수동적 직관으로서의 주체의 theoria, 존재와 당위라는 (하이데거의 주된 관심사였던) 오래된 대립 개념에 상응시키면서, 철학사를 관통하고 있는 앎과 함의 대립을 근대(이후)의 삶의 형식과 관련시킬 것이라 예측하게 한다는 것이다. 지젝 특유의 아이러니한 사유의 일단은 이 지점에서 헤겔이 praxis theoria, Sein Sollen, 혹은 진과 선이라는 갈등에 대해 ‘자발적’ 인식을 해결책으로 내놓을 때 세속적인 이해와는 반대되는 해석을 내놓는다; , 헤겔의 ‘자발적 인식’에 따르면 “실체적 내용의 수준에서 ‘모든 것은 이미 발생했다.’ 따라서 인식은 그것을 고려에 넣을 따름이다--다시 말해서 인식은 사물들의 상태를 등록하는 순전히 형식적 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것으로서--즉 ‘즉자적으로’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을 ‘고려에 넣는’ 순전히 형식적인 제스처로서--인식은 ‘수행적performative'이며, 절대자의 현실화를 초래한다.” 통상의 해석은 이것을 “우리는 주체의 활동이 절대자-신 그 자체의 활동과 중첩되는 신비한 통일의 새로운 판본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헤겔의 논점은 오히려 정반대의 것이다: 나의 최대의 수동성에서, 나는 이미 능동적이다. 다시 말해서, 사유가 ’외부 관찰자‘의 자세를 취하면서 그것의 대상에게서 ’탈퇴‘하고 ’분리‘되며, 하나의 거리를 획득하고, 스스로를 ’사물들의 흐름‘으로부터 폭력적으로 갈라놓는 수단으로서의 바로 그 수동적 ’철회‘, 이 비-행위는 그것의 최고 행위이며, 실체의 자기-폐쇄된 전체 속에 하나의 틈새를 도입하는 무한한 권능이다.(164-5)

이것은 통상 실천에 비해서 무능하다고 생각되는 사유가 그 자체로 얼마나 이미 능동적으로 세계에(서 자기를 분리시키는 방식으로) 개입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설이며, 플라톤 이래 강조되어 왔던 철학의 전공 분야--숙고(관조, meditation)의 탁월성에 대한 재서술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결론은 수많은 수동적인 지식인들, 생각만 하고 엉덩이는 무거운 무수한 탁상공론자들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지 않을까? 양심을 편안하게 하는 이 같은 심적 알리바이에 공감하며 지젝의 혁명적이고 전복적인 사유에 동참한다고 믿는 수많은 스놉들은, 실제로 이런 느낌을 주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런 타자의 권위에 기댐으로써 양심을 위안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에 관해 무언가 더 석연치 않은 것이 남아 있다고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가령, 지젝이 ‘혁명적이고 전복적인 사상가’라고 칭해질 때 그 혁명성과 전복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해서 말이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사유의 대가에게 그러한 반복적인 반전에 ‘실제로 깃든 전복성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젝은 이 질문이 무의미한 이유에 대한 사유를 뒤집고 또 뒤집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진정한 매력인데,

한 마디로 그는 ‘미쳐 있다’. 그가 지속적으로 ‘부정의 부정’에 관해 이야기하는 행위 자체가 그의 이러한 반복적 사유 전복에 서려 있는 광기를 암시한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헤겔의 <논리학>에서 변증법적 과정을 작동시키는 모든 한정된/제한된 범주들의 지위에 있는 내적 긴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쓸 때, 그는 그 자신에 관한 훌륭한 기술을 제공한다; “매 개념은 필연적인(즉 현실을 개념파악하고자 한다면, 현실의 기저에 놓인 존재론적 구조를 개념파악하고자 한다면, 필수불가결한) 동시에 불가능한(즉 자기-논박적이며, 비일관적인: 우리가 그것을 현실에 온전하게, 당연한 결과로서 ‘적용’하는 순간, 그것은 그것의 정반대인 것으로 붕괴되고/거나 화()한다) 것이다. 이 개념적 긴장/‘모순’은 동시에 ‘현실’ 자체의 궁극적 활력소spiritus movens이다: 우리의 개념적 도구의 내적 비일관성은, 우리의 사유가 현실을 포착하는데 실패했음을 신호하기는커녕, 우리의 사유가 논리 게임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현실을 구조화하는 내적 원리를 표현하는 가운데 현실 그 자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궁극적 증명이다.(166-7)

, 지젝에게 ‘아무도 참조하지 말고 논리적으로, 그리고 비모순적으로 진보가 보수보다 더 나은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라’든가 ‘혁명의 당위성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좋은 점에 관해 기술해달라’고 요구하는 독자는 이미-아직 지젝의 독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지젝은 독자에게 해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념적 도구의 내적 비일관성’이 ‘현실’ 자체의 ‘궁극적 활력소’인 한, 어쩌면 그의 사유는 충실하게 현실주의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현실에서 왕왕 벌어지듯이, 실제 힘을 발휘하는 것은 팩트가 아니라 신념이며, 이 신념의 가장 강력한 형태가 광기라면, 우리는 그의 광기를 신념의 다른 말로 읽을 수 있다. 그때, 그는 지금 자기의 사유 자체를 자기의 행동 강령으로서 선언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을 읽는 사람들을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염시키기를 원하고 있다. 마치 플라톤의 "이온"에 나오는 자철석처럼, 그는 시적 영감의 자질, 거대한 파급력 그 자체이다. 쉴새없이 그가 쏟아내는 저서들이 그의 광기를 증명하고, 이 저서들이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는 갈등의 근본 구조가 쉼 없이 변주되면서 다른 철학자들의 다른 개념들을 빌려온다는 점은 어쩌면 철학이 그 어휘들을 다소 단순화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실용주의 철학의 전제를 증명하는 것 같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철학이 전문 용어들을 인식하고 그 내용을 섭렵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판단적 사유를 실행해나가는 것을 진짜 목표로 해왔음을 방증한다. 어쩌면 철학의 꿈은 주체의 입 밖으로 나오는 세계에 관한 반성적이고 기획적인 말들과, 이 말들이 그리는 현재와 미래의 세계에 대한 그림이 청중들에게 (‘옳게 재현된다기보다는’) 감염되고 그들에게도 역시 그러한 욕망을 품게 하는 것일진저, 감염력은 시의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호메로스에 대한 플라톤의 집착은 질시가 아니었던가? 그는 철학 용어들로 시를 쓰고 있다. 그는 미쳤다. 뮤즈에게 사로잡힌 호메로스처럼. 그리고 사람들은 호메로스에게 사로잡히듯이 지젝에게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한계이기도 하다. 지젝의 팔로워들은 지젝을 팔로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얼마나 만족스러워하는가. 마치 기형도 애호가나 카프카 애호가처럼. 지젝 본인의 생각과는 달리 독자들이 그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단일한 진리에 대한 궁구를 다소 비유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얼마나 ‘포스트모던’한가. 하지만 그 이상이 정말로 필요한지도 따져 물어야 할 중요한 문제다. 이를테면 정말 ‘포스트모던’한 사유는 세간에 퍼져 있는 것처럼 그토록 무책임하고 공허한 것이었는가 하는 질문, 그리고 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마치 이미 끝난 질문인 것처럼 다루고 있는가 하는 문제. 가령, 실제로, 문학적 사유가 종교적 사유를 대체했다면, 우리는 왜 성서를 문학작품처럼 읽어서는 안 되는가. 우리는 왜 지젝을 카프카나 기형도처럼 읽어서는 안 되는가.

 

* 미친 지젝을 읽고 있으면, 지젝이 읽는 헤겔도 좀 미쳐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 이걸 읽고 있는 나도 훨씬 오래 전부터 좀 미쳐 있었으며 점점 더 미쳐가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 광기에는 어떤 긍정적인 에너지가 있는데, 그건 그가 지속적으로 ‘부정성’을 대상화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기 안의 부정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아를 치료하는 심리상담의 역할을 지적인 측면에서 맡아 하고 있다고 할까. 자아심리학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지젝으로서는 이 비유가 못마땅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a sketch from http://daleberan.com/blog/?p=335

 
 

* <까다로운 주체>의 148쪽에서 참조하고 있는 마르크스의 <브뤼메르 18일> 서두, “어떻게 인간이 역사를 창조하되 무에서, 혹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조건들 속에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그에게 부과된 조건들 속에서 창조하는 것인가에 관한진술은 아마 다음의 것을 가리킬 것이다. “Men make their own history, but they do not make it just as they please; they do not make it under circumstances directly chosen by themselves, but under circumstances directly encountered, given and transmitted from the past.” 그런데, 이와 관련해 뒤따라 나오는 진술은 외국어 학습에 이것을 비유한 것인데 흥미롭다. , 이미 주어진 조건들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선은 자기의 환경과 습속에 비추어 그것을 이해하고, 그러고 나서는 이전의 것을 잊어야 (그러나 실제로 깡그리 잊는 것은 아니니 잠정적으로 망각하기, 망각한 것으로 가정하기, 괄호치기에 가깝다) 새로운 언어 학습이 완료된다는 것. 여기에서 성서를 참조해도 이상할 것은 없으리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당연하게도, 이전 것이 지나가지 않으면, 새것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단절을 전제한다. 하나가 남아 있으면 전부 다 남아 있는 것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감수성을 지속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이전 것은 말소되어야 한다.

새로운 나가 된다는 아이디어를 통해 진보적인 사상은 지속된다. “(…) a beginner who has learnt a new language always translates it back into his mother tongue, but he has assimilated the spirit of the new language and can freely express himself in it only when he finds his way in it without recalling the old and forgets his native tongue in the use of the new.” (Karl Marx, The Eighteenth Brumaire of Louis Bonaparte, translated from the German, PROGRESS Publishers, Moscow, eighth printing 1983, pp. 12-3)

이 참조점을 찾기 위해, 나는 오래 전에 사두었던 <브뤼메르 18일>의 영문판을 내 책장의 맨 가장자리로 밀려난 사회주의섹션에서 뽑아 들었다. 기억하기로, 나는 이 책을 98년인가 99년인가에 교보문고인가 영풍문고의 외국어서적 덤핑 판매 코너에서 역시 구소련의  프로그레스에서 출간한 철학사전과 함께 헐값에 구매했다. (둘 다 제본 상태가 말이 아니지만, 제본 상태에 관해서라면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에서 간행한 플라톤 대화선집도 만만치 않으니, 이것이 구소련의 빈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처럼 외국서적 코너가 화려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국내 출간 서적들에 관해서는 혹독한 검열을 했던 당국이 외국 수입 서적에 대해서는 거의 검열을 하지 않았던 탓에 구소련 책들이 많이 들어와 있던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하여간 이제는 다양화되고 풍요로워진 상품의 잔칫상에 쇳내 나는 옛 사회주의권 서적은 올라오지 않으려니 생각하면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아련하고 짠해온다.

 

* 그리고 시오도어 카진스키의 <산업사회와 그 미래>(aka. <유나바머 선언문>)의 국역판에 첨부되어 있는, 카진스키가 그의 희생자 데이빗 갤런터 박사에게 보낸 편지와 갤런터 박사가 후에 <뉴욕 타임즈>에 실은 유나바머에 관한 회상은 아무래도 분석을 좀 해봐야 할 것 같다. 특히 갤런터가 표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유나바머에 대한 대립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의 여러 디테일들은 그가 유나바머의 취지에 동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역설에 관하여. 이를테면, 갤런터는 테러리스트에 의해 오른손을 잃었는데도 유머를 잃지 않고 자기가 테크놀로지의 숭배자로 지목되었다는 것이 과분하다고 농담을 하고 있으며, 자기는 컴퓨터를 비롯한 테크놀로지의 위험을 이전에도 지속적으로 경고해왔고, 오른손을 잃은 후 왼손으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거나 이전에 소홀했던 가족과의 평화로운 시간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는 점 등을 즐겁게 이야기하면서, 마치 유나바머에게 감사의 편지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갑자기 다시 유나바머 선언문 생각이 난 것은 지젝이 2장의 17번 각주에서 쓰고 있는 올바른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잘못된 선택을 해야만 하는 필요성에 관한 설명 때문이었다. (2012-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