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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혀: 김정환, <황색예수2> 해설 400 쪽에 달하는 그의 이번 시집 원고에 꽂아둔 포스트잇 인덱스들이 빛나는 밤이다. 원고 최종 마감일을 여러 번 갱신한 밤이다. 나는 저 인덱스들을 어떻게 종합해야 할 것인가. 종합은 가능한 것인가. 종합이 그의 시를 이해하는 가장 유의미한 방법이라고 나는 나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우선 회상의 문으로 들어간다.   시차 적응: 1985년 시집을 1991년에 읽고 2023년에 다시 읽으면   언젠가 다른 지면에 몇 번 고백한 적도 있지만, 나는 10대 후반에 지나치게 80년대 문학에 몰입했던 탓에 시대에 맞지 않는 세계 해석에 오랫동안 사로잡힌 적이 있었고, 지금도 거기서 다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이것이 나에게는 오랜 숙제였는데, 내가 80년대 문학에 몰입했던 10대 후반은, ..
두더지 언덕으로 산 만들기 내가 지켜보는 동안 개는 들판 여기저기를 뛰어다닌다. 이따금 멈추어 킁킁대고는 다시 달린다. 원을 그리며 가서. 주로 두더지 언덕들 주위에서 냄새를 맡더니. 곧장 구멍으로 머리를 들이민다. 나는 내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에 산만해진다. 곧 갈게요. 뭐 하고 계세요? 저명한 여성 시인이 묻는다. 독서 중인가요? 집필 중? 공원이 아마 멋지겠죠. 아뇨, 아뇨, 나는 당황한다. 두더지 언덕들을 보고 있어요… 저의 개가 그 속에 코를 들이밀어서요. 오, 정말요? 전 작업 중이실 거라 생각했어요. 알겠어요, 끝나면 전화할게요. 개는 이제 가장 큰 언덕부터 시작해 킁킁거리며 맹렬히 땅을 판다. 나는 총명한 시를 쓰기에는 너무 멍청하다. 나는 개에게로 달려간다, 녀석이 너무 몰입하고 있기에. 소리를 지르지만 녀석..
문학의 공포 1. 초월적 상상력의 부정적 총체성으로 얼룩진 ‘세계의 밤’을 지나 ‘우리-없는-세계’의 ‘존재-없는-생명’의 공포에 도달한다. 또는 충동의 가없는 질주를 지나 매끄럽게 균질화된 권태로운 기분의 세계에 도착한다. 아무튼 저 세계의 밤은 충동과 부정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이 ‘우리-없는-세계’, 또는 균질화된 권태 속을 미끄러져 가는 지금-여기의 시공간은 가장 작은 요철도 무덤처럼 불룩한 충격을 안겨주는 곳이다. 어쩌면 낭만주의 다음에 고전주의가 오는 것처럼, 혹은 패션 유행의 30년 주기설처럼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세대는 복고를 새것으로 겪는 것일지도. 그러나 과거와 꼭 같이 반복되지 않으므로, 복고가 되기 전의 그것을 겪은 사람은 거부감을 표시할지도. 그러고 보면 이즈음의 시는 어떤 면..
20세기의 연기 속에서 시인 겸 철학자 유진 새커의 『이 행성의 먼지 속에서: 철학의 공포』에서 저자는, 자신의 취향을 문화사적이고 존재론적인 연구와 적극적으로 혼합하려고 한다. 그는 고딕 소설과 공포 문학, 20세기와 최근의 공포 영화와 재난 영화에서 재현하고 있는 공포의 대상들을 유형화하고 이를 자기 자신과의 토론을 통해 이론화하면서 느슨한 시적 이론을 펼치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실체가 없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익명적 공포에 관한 담론으로 이것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 근거로, 그는 고전적인 괴수 영화들(좀비, 흡혈귀, 악마, 유령 영화들)과 대별되는 ‘거기 있음’의 공포를 제시한다. 가령, , , , , , , , , 등의, 이름을 확정지을 수 없는 공포의 대상들에 관한 영화 제목들을 예로 들면서, 이런 ‘새로운’ 종류의 공..
어떻게 죄책감 없이 감자를 토막 낼 수 있는지에 관하여 응달에 둔 감자가 서서히 퍼렇게 질리고 있다 구워 먹고 삶아 먹고 튀겨 먹고 볶아 먹고 밥에 넣고 국에 넣고 갈아서 부쳐 먹고 삶아서 으깨 먹고 그러고도 남아서 응달에 펼쳐둔 감자 아, 재밌어. 다음번 생에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고 하지만 다른 많은 감자와 함께 상자에 실려 우리 집에 온 저 감자가 다음 생에 사람이 되면 아주 짧은 시간에 끔찍한 말을 하는 능력을 지닐 수도 그런 능력에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겠지 “응급상황 시 아이들을 먼저 구조해주세요” 라고 차 뒷유리에 스티커를 버젓이 붙여놓고 좆같이 운전하는 새끼들은 끝까지 쫓아가서 박아버리고 싶어 라거나 죄를 용서받고 싶거들랑 네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라거나 나를 찌르고 싶..
4차 산업혁명 시대 하아...오늘은 땡볕에 또 몇 시간이나 더.....
오인된 적자생존과 헐값의, 위험한 자유 외과 의사이자 생물학자였으며, 훗날 우리에게 『멋진 신세계』라는 서늘한 새타이어로 가득 찬 디스토피아 소설의 작가로 알려진 올더스 헉슬리의 할아버지인 토머스 헉슬리는 1888년, 「인간사회에서의 생존경쟁」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은 매끄러운 필치로 이제 유럽 세계의 상식이 되어가고 있는 다윈의 진화론을 인간사회에 적용하여 자연은 도덕적이기보다는 지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며, 우리가 이상사회로 가는 어떤 단계에 속해 있든 “모든 현존 가능한 세상을 놓고 볼 때 지금의 세상이 최고가 아니라 해도, 지금이 최악이라는 말은 그저 별난 사람의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자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제한 없이 증가하고 번식하는 한 평화와 산업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전쟁 체제와 다름없이 치열한 생존경쟁이 따..
고통은 비명처럼 무조(無調)라서: 김혜순론을 쓰기 위하여 않아에 관해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부끄럼 많은 요나 부크롬 씨는 한동안 심하게 망설였다. 고민하던 나머지 친구 병조림 인간에게 상의하고 싶었지만 그는 냉가슴이라는 돌림병을 여직 앓고 있어 말을 걸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맨홀 뚜껑 아래 시궁창에서 쥐 죽은 듯 지내던 크루소 씨에게 물어보았다. 않아는 40여 년 간 글을 써온 사람입니다. 저는 그의 글을 10대 시절부터 읽어왔지만 한꺼번에 몰아서 읽은 적은 없었어요. 않아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은 않아의 이름으로 출간되어 있는 시집 열다섯 권과 산문 세 권과 그밖에 그와 대담을 나눈 여러 사람들의 기록과 그에 관한 수많은 논문과 평론을 읽고 그것으로 그의 인생 40여 년을 가늠하여 종합한 뒤 마치 그것이 그에 관한 모든 것이라 이해하는 척..